인간사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우리를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만든다.

<울프 일기 /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붙임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새침하지도 않게 책과 워크맨으로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자궁병동 / 런던스케치 / 도리스 레싱>


어쩐지 요즘엔 사는게 짜릿짜릿해.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렇게나 즐거워. 나의 예쁜 뿔.

<뿔 / 패닉3>


온라인에서는 익명의 존재로 이렇게 일기를 주절주절 써대고 있지만

오프라인에서의 나는 나에 대해서는 묵언으로 일관하는 편이다.

정말 친한 사이라면 온라인 일기에서 하지 않는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상황적으로 알고 지낼 수밖에 없는 사이인 경우에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멋 부리기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 정도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는 게 편하다. 

사람들이 나를 납작하게 보도록, 그래서 애초에 나한테 별 관심을 두지 않게 해두는 게 편하다.

오프라인의 사람들은 성가시다.

내가 니체는 아니지만 나 역시 사람들이 모기떼처럼 여겨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니체를 좋아하진 않지만 모기떼를 보면 저걸 다 죽여버리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고

얼른 도망쳐라 했던 그 문장은 산삼보다 더 귀한 보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점에 대해서 굳이 대답해주고 싶지 않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나만 알고 있는 것들이 

내가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무게중심이기 때문이다.

그걸 발설해 버리면 나는 균형을 잃고 자빠질 것만 같다.


가수 오지은을 좋아한다.

하지만 오지은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오지은은 자잘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자제력이 없고, 집안을 정리 정돈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오지은과 직장 동료나 같은 반 친구로 만났다면 결코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오지은은 수신(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그 수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수신 못함이 그의 창작력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오지은은 노래, 팟캐스트, 에세이를 통해서 자신의 많은 것을 공개했는데

나는 사람이 자신을 저렇게 많이 공개하고도 균형을 유지하고 살 수 있을까 의문이긴 하다.

오지은은 균형을 잃어서 의학에 의존한 시기가 있었다.


자유가 뭘까?

나에게 자유는 사생활을 가질 권리,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을 권리, 자기만의 비밀을 가질 권리이다.

쉽게 말해 내 방문을 닫을 권리, 방문을 닫고 잠글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해운대 경동 제이드(내 기준 제일 좋은 위치의 고급 아파트, 일단 제이드에 살면 동백섬 아침 산책을 하고 조선비치에 가서 조식을 먹는 생활이 가능!) 팬트 하우스 거실에서 다른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사는 것과 30살이 넘은 주공아파트 9평에 혼자 사는 것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9평 주공아파트를 선택할 것이다. 

사생활이 없는 삶, 자신의 모든 행동과 모든 시간이 타인에게 노출된 삶은 그 삶이 아무리 안락하더라도 허깨비 같달까? 사상누각 같달까? 가짜 같달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노예 같은 삶이랄까? 반려동물의 일생 같달까? 주인에게 철저하게 종속된 반려동물의 일생은 좀 가엽지 않나? 나는 18년 동안 반려동물로 사느니 그냥 3~4년을 살더라도 야생에서 내 본능대로 살다 죽고 싶기 때문에. 


나는 좋은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그 비밀을 간직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좋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좋다.

예를 들면 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감옥 운동장을 홀로 산책하면서 주머니 가득 담은 흙을 조금씩 버리는 식으로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고 그걸 즐기는 것.

비밀을 집요하게 즐기면 탈옥마저도 가능해지니까.

하지만 앤디같은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랑하고 싶어 하니까.

타인에게 누설하고 싶어 한다.


오늘부터 <울프 일기>를 조금씩 읽을 것이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혼자 있는 걸을 더 즐기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굳이 옆에 있는 타인에게 다 말하지 않고 남겨둔 것을 

스스로에게만 털어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훌륭한 대화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기를 쓴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일기를 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나 자신이 기 때문에.

오늘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기를 쓰는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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