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병원 복도 대기용 의자에 앉아서 맞은 편 벽면의 진료과목과 세부적인 질병의 종류와 구체적인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사이코패스적 악의를 가지고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어떤 동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존재가 떠오른다. 어떤 동물의 구체적인 예로 인간을 들어 보자. 만약 선의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사고, 질병, 노화 등으로 인해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무수한 육체적 고통의 존재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육체를 통해서 느끼는 쾌감과 행복에 비해 인간이 육체를 통해서 느끼는 고통의 종류와 크기가 절대적으로 더 많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노인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종합병원 로비와 각 진료과의 대기실을 보면서 인간들은 다들 생로병사하려고 태어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병원에는 명의가 1명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과장님으로 불리는데 그 명의만은 원장님으로 불린다. 나는 종합병원 내의 서열직책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다 선생님으로 부른다. 아무튼 명의가 있고, 내가 봤을 때 그 명의는 과로사 위험이 있어 보였다. 


나는 늙으면서 병들어 가고 있다. 몸의 이곳저곳이 닳고 낡아서 제 기능을 못하는 듯도 하다. 머리도 귀밑 3cm로 잘라 버렸다. 어떤 책이더라 나이든 여자가 젊었을 때처럼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것을 한심하다고 서술한 책이 이었는데... 무슨 책이었더라? 올리브 키터리지였나? 새치 염색도 시작했다. 배에는 수술 자국이 아직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너무 빨리 늙고 병이 든다. 


어차피 사람은 금방 병들고 늙어 죽을 건데 자식을 낳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모른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빈도가 점점 많아진다. 또한 번식하지 않은 나 자신의 현명함에 자아도취하는 횟수도 점점 빈번해진다. 어차피 죽을 목숨을 굳이 낳아서 고통받게 하는 이유가 뭘까?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그런 마음을까? 아니면 너무 멍청해서 그냥 이 이승이 좋은 걸까? 그래서 이 좋은 걸 나혼자 즐길 수는 없지, 박애의 의미로 번식하는 걸까? 이쯤되면 생을 교주로 하는 사이비 종교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어제도 방송했다지...보진 않았다만)사이비 종교 신자들과 다를 바 없다. 교인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노예 혹은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납득이 안가는 것처럼 나는 생 맹신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케빈에 대하여>를 다시 봤는데 이번에 보니 피해자는 낳아짐 당한 케빈이었다. 10여년 전 영화제에서 봤을 때는 그저 단지 케빈의 악한 인성에 경악했을 뿐이었다. 이번에 봤을 땐 내 마음(괜히 태어났다)이 그래서인진몰라도 아기 케빈이 울어재끼고 엄마를 괴롭히는 게 '나를 왜 낳았어? 난 태어나기 싫었는데. 당신이 나를 낳아서 나는 너무 힘들다.'하는 걸로 보였다. 케빈을 직접적으로 잉태하고 낳은 것은 엄마이므로 케빈이 그렇게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악의를 품고 괴롭히는 것이리라. 아빠는 간단히 죽여버리면 되지만 엄마에 대한 원한과 원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서 죽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케빈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하루 종일 tv만 본다. 그것도 범생이들이 나오는 걸 보는 게 아니라 나 같은 범죄자들이 나오는 것만 골라 본다.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나도 늘 하는 의아해하는 점이다. 왜 악이 재미있을까? 더 정확히는 악이라기 보단 권선징악. 권선징악이 되려면 선과 악이 동시에 있어야 하고 그게 재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리고 인간이)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 나쁜 일이 발생하고 그것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재미가 있는 것이다. 해결이 되지 못하면 분통이 터진다. 그래서 범죄수사물을 보는 것이다. 해결이 되니까. 


하지만 세상사는 드라마처럼 간단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분통만 터질 뿐 그 어떤 쾌감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뉴스 같은 거, 정치 시사 그런 거 애초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실제 인간사 유일한 해결책은 태어나지 않는 것 혹은 낳지 않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입장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선택할 수 없지만 낳지 않는 것은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걸 실천했고 그걸로 내 의무는 다 한 거라고 여긴다. 특히 친환경적 관점에서 그렇다. 


살 빼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적으로 적게 먹는 것 뿐인 것처럼,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낳지 않는 것 말고는 없다. 


이상이 내가 노인으로 특화된 종합병원 대기실에서 보고 느낀 바이다. 




p.s. 태어난 것이 불찰이고 낳지 않은 것만이 내가 이 생에서 유일하게 한 선행이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내가 사용한 일회용 마스크를 쓰레기통에 버릴 때마다 하는 회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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