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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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가까스로 한 척의 배에 오르고 있는 중이다. 그 배에는 선원도 없고, 따로 내릴 수 있는 여분의 배역시 없다. 그 배도 이미 좌초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표류한 것으로도 모자라 버려진 배에 올라 타게 된 남자. 로베르토의 기록을 기초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다프네> - 영점선 - 전날의 섬

로베르토가 오른 배 <다프네>의 서쪽으로 영점선이 지나가고 그 너머에는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섬이 있다. 그 섬은 영점선을 지나 거슬러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전날의 섬'이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면 그곳은 목요일일 것이고, 오늘이 토요일이라면 그곳은 금요일일 것이다. 로베르토는 그 '전날의 섬'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로베르토의 경도.

<다프네>에서의 고립상태는 그에게 과거 중에서도 '카살레 공방전'에 참여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그가사랑하던 아버지 포초는 지극히 고전적인 생각에 의존하여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는 참전을 선언한다. 요컨대 의리와 충성의 논리이다. 모시던 주인의 뜻에 따라 새로운 주인을 모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는 그 사고방식 그대로 전투하고 그리고 죽는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면 되었던 시기는 끝났다. 그의 어린 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는 가문의 주인이 되었고, 이제 아버지의 사고가 아닌 자신의 사고를 세워야 할 시기가 왔다.
로베르토의 경도선을 하나 지난 것이다. 그는 전투후 자신의 평화롭고 안전했던 농장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파리로 올라온다. 그의 새로운 경도선에는 아버지 '포초' 대신 '생 사뱅'과 '에마누엘레 신부'가 등장한다. 당시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사상을 가지고 로베르토를 성장시킨다. 로베르토는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다 흡수한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버릴 필요가 없었다.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배우는 자에게는 어떤 것을 버리고 취할지 당장에 판별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반쯤 수용한다는 로베르토의 자세는 배움에 있어 매우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라온 그에게 새로운 경도가 다가온다. 그가 사랑하는 '릴리아'의 호의를 얻기 위한 연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전에 있었던 그의 행동 때문이었을까. 경도의 비밀을 밝히는 스파이가 되라는 추기경의 명을 받고 <아마릴리스>호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버드박사'를 만나 그의 실험을 몰래 살피는 한편 그의 과학적 사고를 듣게 된다. 그러나 곧 이 배에 잇던 모든 사람드로가 헤어져 <다프네>에 오르고 여기에서 카스파르 신부를 만난다. 

가질 수 없는 <다프네> - 릴리아 -  전날의 섬

소설의 초반부터 자주 언급되는 <여인>의 정체는 릴리아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그의 존재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할 것이 분명한 여인 릴리아. 그 배에서 죽음을 맞게 될 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 배를 소유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던 다프네처럼 릴리아 역시 절대로 소유할 수 없었다. 전날의 섬 역시 그에게는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여인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처럼 그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가 곧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닿을 수 없는 공간이다. <다프네>와 <여인>그리고 '섬'은 로베르토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합치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결국 그는 릴리아가 저 섬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전보다 더 절실하게 저 섬에 도착할 이유가 있으니 생애 마지막 모험을 감행해도 되겠다고 판단한다. 그의 다음은 결국 그의 과거가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전날의 섬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로베르토의 모습은 우리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미래로 향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간인 전날의 섬으로 향해가는 로베르토의 행동은 결국 미래에 있다. 전날의 섬에 도착한다고 해도 로베르토의 시계로 본다면 그건 결국 그의 미래의 모습이 될 뿐이다. 그리고 곧 그 미래는 현재. 그리고 과거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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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시대의 사상이 매우 심도 있게 다뤄진다. 전날의 섬에는 특히나 17세기 과학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과학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읽기 힘들 수 있다.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그 시대에 실제로 있었을 법한 논쟁들이 등장하고, <다프네>위에서 로베르토의 생각이 전개되는 장에서도 역시 심도 있는 철학적 논의가 진행된다. 그러니 에코의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최대한 크게 숨을 쉬어야 한다. ^^ 나는 과학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 힘들었지만, 에마누엘레 심부의 '천리경'-은유의 상자 부분이나, 로베르토가 그의 만들어진 형제 페란테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 나가는 부분. 비둘기에 관한 고찰은 재미있었다. 역시 도전해 볼 만한 책이다. 
. <움베르토 에코, 전날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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