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후집(산문)- 올해 꼭 읽기로 한 묵은 책 중 하나.
고문진보는 송나라의 학자 황견이 당송시대의 유명한 글을 묶은 것인데, 조선 선비들의 필독서였으며 중국에서보다 더 많이 읽히고 인용되었다.
간만에 한문 읽기가 쉽지 않지만, 모르는 글자는 애써 찾지 않고 한글 번역과 주석에 의지해 읽기로 한다. 고 김달진 선생의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바탕으로 최동호 선생님, 윤재빈 선생님이 보완, 교정을 본 데다 주석이 쉽고 충실해서 한자를 좀 띄엄띄엄 읽어도 뜻놓지지 않고 따라 갈 만하다. (그래도 어디 강독반이 있었으면 싶다)
굴원 (屈原 BC 343? - BC277?)은 초나라 懷王의 左徒라는 중책을 맡았으나 중상모략으로 왕의 곁에서 멀어졌고, 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아래는 나의 요약.
나(굴원)는 혜(蕙)초(椒)난(蘭) (향초 이름들)처럼 높고 곧은 사람이다. 임금이 그런 나를 버리고 간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임금이 정사를 잘못할까 걱정스럽다. 요순과 삼왕(하 우왕, 은 탕왕, 주 문왕)의 크고 밝음은 어진 신하를 높이 쓴 데 있다. 이에 비하여 간신의 말에 흔들리고 어진 신하(나)를 내치는 회왕은 약속을 어기고 쉽게 변하는 덕이 부족한 왕이다. 어진 신하를 소금에 절여 죽인 하 걸왕과 다를 바 없다.
반복되는 향초의 비유는 고매한 어진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참한 비유이며 글을 향기롭게 하지만,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니 어째 좀 뻔뻔스럽다. 게다가 왕에 대해서 저렇게 말하면, 듣는 왕은 마음이 돌아서려다가도 더 화가 나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아침 저녁 향초 사이에 서 있으며 나의 곧고 바름은 변할 수 없고, 왕이 노여워 하더라도 할말은 해야겠다. 나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의 세태에는 맞지 않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세속은 그릇되어 질시하고 아부하는 것을 법도라 하고 나를 모함한다. 어쩌겠나, 나아갈 길을 잘못 살핀 것은 내 잘못이다. 그러나 나의 아름답고 향기로움은 변치 않는다. 나는 그저 옛 성인의 본을 받아 정도를 지켰을 뿐인데, 쫓겨나고 이 지경이 된 것이 분하다. (상상 시작) 상수를 건너 순 임금을 만나 이 억울함과 나의 변함없이 곧음을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토로하고, 네 마리 용이 끄는 봉황 수레를 타고 어진 이를 찾아 이리저리 떠돈다 (상상 끝) 임금에게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전할까 하였으나 말을 건넬 사람은 모조리 간신이니 도로 포기한다. 어진 이를 질투하고 향초가 향기로운줄 모르는 혼탁한 세상에 나는 차마 어울릴 수가 없다. 내 아름다움이 꺾일까 걱정스럽고 잡초가 무성하니 나의 향기로움을 지킬 수 없을 듯하다.
아침에는 목란(木蘭)의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지는 꽃잎을 먹으며 "선녀에게 꽃을 전하고 미인에게 중매쟁이를 보내 결합을 꿈꾼다"는 말로 임금에게 다시 쓰임을 얻고 싶다는 뜻을 전하는 비유와 신화 속 고운 것들을 꺼내어 쓰는 문장은 아름답다. 그러나 세상은 다 이지러지고 나쁘며 나 홀로 곧고 향기롭고 아름답다는 말의 반복은 좀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다시 쓰임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구차하게 들린다. 그 역시 말이 서투르게 전해지거나 모략에 의해 왜곡되어 전해진다고, 또 남 탓이다.
(다시 상상 시작) 내 향기로운 뜻과 같은 곳을 찾아 떠돌아 볼까나. 옥과 상아로 만든 수레를 타고 비룡을 몰아 곤륜산, 천진, 적수, 부주산에 들러 황천 가는 길에 옛 고향을 굽어보니 슬프다, 말(비룡)도 마부도 머뭇머뭇한다.
(맺는말) 그만두어라. 날 알아주는 이가 없는 고향을 그리워해서 무엇 하겠는가. 아름다운 정치(美政事)를 할 수 없으니 차라리 팽함(彭咸 은나라 현신. 임금에게 애타가 직언을 하다가 임금이 듣지 않으므로 물에 빠져 죽었다)이 있는 곳을 따르리라.
이소는 문장과 비유가 아름답지만, 간신들에게 둘러싸인 임금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어진 신하의 글이 아니다. 나쁜 것은 남과 세상이고 자신을 내친 왕은 부덕하다고 폄하며 나만 억울해, 억울해 하는 글이다. 스스로 옳고 곧고 향기롭다고 자꾸 말하는 것도 거슬리거니와, 군자는 때를 잘 만나고 그 그릇의 크기를 알아보는 어진 임금을 만나야 제대로 쓰임을 얻는다고 했다, 그렇게 세상이 어지럽거든 때를 잘못 만났다 하며 왜 그저 은둔하지 못하는가. 어부사의 어부처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 물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
노래하며 노 젓지 못하는가. 어째서 이 글이 버전에 따라서는 <이소경> 이라고도 하며 왜 그렇게 높이 평가되었을까. 쓰임 받지 못하고 당쟁에서 밀려 좌천되거나 유배된 선비들의 심정이 이와 같아서일까. 굴원은 결국 이소에서, 또 어부사에서 스스로 말한 것처럼 "차라리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어부사의 사공은 지나가던 은자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굴원이 스스로 자신의 뜻을 투영하기 위해 지어낸 인물이라고 한다. 물에 빠져 죽을 만큼 강직한 자신의 성품과 "성인은 모든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을 따라 변해가는 것입니다" 고 한 어부의 삶의 자세를 대조하기 위해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죽기 전에 굴원은 어쩌면, 차라리 발씻고 떠나 잊고 사는 어부의 초연함을 따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내 입장에서 억울한 일 당하고 "나라고 왜 잘못한 일 없겠어" 라고 말할 수는, 당연, 없지. 나야 억울함이 받치면, 어디 자연과 고사에 기댄 비유로 글 쓸 생각이나 하겠어, 실컷 욕이나 하겠지. 남들 다 좋다던 영화 기대 만빵에 보고나니 별로더라, 와 비슷한 기분일거다. 큰 맘 먹고 펼쳐든, 한시간에 네 페이지도 잘 못 읽는 책에 선비들 사랑을 받았다는 글이 어째 맘에 안들고 보니, 제갈량의 출사표를 비롯하여 충신의 도리가 주제인듯한 권1은 일단 뛰어넘고 나중에 읽으리라, 유유자적, 소요하며, 초연한 글들을 먼저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