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밤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다음날 일어나보니 밤새 비행기와 페리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섬을 떠나야 할 사람들 발이 묶여서 호텔이 복작복작합니다. 피라 시내에 나갔더니 가게들도 거의 다 문을 닫았습니다.

바람이 심해 배가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고 서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쥬얼리샵에 가서 귀고리를 하나 사면서,
이런 날이 잦으니? 이런 날엔 뭘 할 수 있니?
등등 물어보다가
이런 날 다니긴 어딜 다녀, 집에 쳐박혀 있어야지... 어쩌구... 와인 한잔 줄까?
이래서, 마시다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한잔 더 얻어마시고, 돌아와서 책을 조금 읽다가는 오후 내내 잠들어 버렸어요. 일어나보니 늦은 저녁,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겠고, 어제 사다놓은 오렌지와, 가방에 컵라면이 있기를 다행입니다.
그런데도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맑아져, 아침을 먹자마자 차를 빌려서 섬 여기저기를 돌아보기로 합니다. 첫날 이아의 노을을 보러 갈 때도 그랬고 섬 구석구석 가고 싶은데 여정을 뽑아보니, 버스가 한시간에 한대 꼴로 있어서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더군요.

이왕 렌트하는 거, 독일차를 빌리고 싶었는데 수동밖에 없습니다. 오토매틱은 전부 "키아"이거나 "현다이"라는군요. 렌트할 때는 역시 다른 걸 몰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조금 더 비싸기는 했지만, 꾸역꾸역 한국차가 아닌 걸 찾아서 빌린 게 일본차, 이거.


다시, 이아 가는 길에.




바다를 볼 수 있는 찻집은 그저께의 그 집만 문을 열었어요. 웨이터가 알아보고 반가워하네요.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면서 수다를 떱니다.


어제 폭풍으로 날아가고 망가진 게 많다고, 파라솔이 날아다닌 해프닝을 한참 이야기합니다. 이아는 예쁘지만 텅 빈 것 같다 하니, 10월까지로 시즌이 끝나면 비즈니스의 절반은 문을 닫고 내륙으로 가버린답니다. 11월이 지나면 섬에서 농사를 짓거나 주민 상대로 사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문을 닫는답니다.

아무디 항구에서 올려다본 이아.

할아버지들이 어제밤에 굴러내린 돌덩이를 치우고 있습니다.

까마리 비치에서 점심을 먹고.

화산석으로 된 해변이라 까맣습니다.


자꾸 길을 잃어버립니다. 길이 구불구불하니 지도가 별로 도움이 안되고. 뻔한 데를 찾아가는데 표지판은 왜 있다 없다 하는 걸까요? (저녁에 식당에서 궁시렁거렸더니, 어제 폭풍으로 표지판들도 많이 쓰러져버렸다는군요.)

길찾기를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갔더니, 처음에 가려고 했던 페리사 비치가 나왔습니다.


화장실을 쓸 겸, 어느 식당에 들어가 커피 한잔 시켜 마시고 일어나는 길에 안쪽 테이블에서 자꾸 와서 앉으라 합니다. 속을 채운 버섯이랑 무슨 자잘한 생선이랑, 그리스 음식 맛 좀 보라고.
어디서 왔니? (이 질문 아주 지겹습니다)
아, 내 아는 누구가 코리아 가봤는데 좋다더라,
우리는 이아에 산다. 언제 산토리니 왔니? 이아 가봤어? 좋지?
피르고스의 카스텔리는 봤니? 그거 좋은데, 꼭 보러 가려무나.
와인도 마실래?
아뇨, 운전하고 있어서 못마셔요.
아저씨는 이미 와인에 취해서 기분이 몹시 좋으시네요 --괜찮아 괜찮아, 마셔,
아줌마는 --운전하고 있으면 당연히 안되지, 권하지 말아요,
나는 내버려두고 이제 둘이 내가 와인을 마시네 마네로 옥신각신합니다.
노을은 다시 이아에 가서 보고 싶었는데, 아까 이아 찻집에 웨이터가 "또 올거지?" 묻길래 "아마 그럴거야" 라고 대답했는데, 또 길을 잃어서, 피르고스에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결국 피르고스의 카스텔리에서 해 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피르고스 언덕에서는 멀리 피라, 더 멀리로 이아가 내려다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