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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때로는 섹시하게... 때로는 푼수처럼... 가끔은 집요하게...
뭘해도 멋진 여자 친구가 런던 여행을 다녀와서 며칠 밤을 새워가며 들려주는 속삭임...
정혜윤PD의 처녀작 '침대와 책'의 매력을 아는 독자들이라면 망설임 없이 선택할 것 같은 이 멋진 책... 전개방식이나 표지의 관능적 밀어부침은 그때와 유사하다. 첫 작품의 성공으로 충분히 자신감이 붙어버린 그녀가 언제까지 침대 주변의 야시시함과 관능의 다리로 표지를 장식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아직은 싫증나지 않는 컨셉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런던 여행은...
대관식과 장례식 모두를 그곳에서 치른 역사적인 인물 엘리자베스 여왕의 무덤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의회 연설을 인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친구에게 속삭이듯 독자에게 나긋나긋하게 수다를 떠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바로 그 무덤 옆에 메리 스튜어드라는 당시 최고의 정적인 스코틀랜드 여왕의 무덤을 발견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독자인 내게도 충분한 대리 만족감을 챙겨 준다. 정말 그녀처럼 런던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영국인의 신앙의 본산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가득 채운 왕들의 무덤들은 부명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곳의 비극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소박하고 가난한 아낙네들의 비극이 아니라 욕망과 폭력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비극이었다. (23쪽)
다빈치 코드를 끄집어 내서 아이작 뉴턴의 무덤을 이야기 하고, 바이런을 이야기 하며 소호 거리의 당당한 게이들을 기억해 내는 그녀만의 독특한 소곤거림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레이먼드 카버, 위대한 유산과 올리버 트위스트의 찰스 디킨스, 브로텐 자매의 소설들, 윌리엄 워즈워스를 인용하여 들려주는 여행기는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보는 듯 눈과 마음이 즐겁다.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은 흑사병이 휩쓸고 간 런던의 거리를 9개월만에 다시 폐허로 만들어 버린1666년9월2일에 시작된 대화재의 비극과 함께 기억된다. 그곳에서는 두 번이 나 결혼에 실패했고 서서히 시력을 잃어 가는 비극의 시인 밀턴이 있고, 새뮤얼 존슨 박사의 멈추지 않는 명언들과 조슈아 레이놀즈, 윌리엄 호가스, 찰스 램, 터너, 넬슨 제독으로 이어지는 지워지지 않고 역사가 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성된 1710년 이후의 어느 날, 런던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면 풍경은 이렇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공되어 우뚝 솟아 있고, 시티의 상인들과 중산층의 부와 자신감을 반영한 듯 거리 여기저기에 금박을 입힌 기둥을 가진 교회들이 나타난다. 런던 대화재 때 금화를 조심스럽게 땅에 묻었거나 장롱에 재산을 넣고 자물쇠를 채웠던 런더너들, 아니면 금을 아예 허리에 두르거나 가족들에게 들려 시골로 보냈던 런더너들은 그 무렵엔 그런 촌스러운 방법을 그만뒀다. 그들 대부분은 금세공업자 출신인 은행원들에게 금을 맡기기 시작했다. 결국 왕국의 모든 자금이 런던에 예치되었고 잉글랜드 은행이 생겨났다. (75쪽)
여성 가이드는손을 들어 높이 111.3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리켰는데 우리의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지상의 거대한 돔, 그녀의 가슴에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천국이 바로 여기 있다는 듯, 지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뭐 다른 거대한 돔이 저 높은 곳에 필요하냐는 듯. 십분 이해한 나는 기도했다. 지상의 형제들을 위해 상쾌한 바람 한자락 불어 그녀의 옷섶이 살짝 흔들리기를. (93쪽)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서 발견하는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낭만스런 장면, 인디앤나 존스의 크리스털 해골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 초현실적인 공간의 감동... 그곳에 전시된 보물들을 중심으로 수메르 문명과 길가메시 서사시, 수 많은 미라와 특히 투탕카멘 왕의 이야기, 그리스 항아리, 파르테논 신전과 그리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감하고 매력적인 그녀의 표현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매끈한 여인의 다리를 털장갑을 끼고 만지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듯 이 유물들을 감히 질문없이 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02쪽)
만약 남성이 이런 표현을 쓴다면 편견과 더불어 소모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정혜윤 그녀의 당당한 표현법은 매력있고 부러울 따름이다.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에서는 2009년에 탄생 200주년을 맞은 찰스 다윈과 월리스의 진화론, 공룡 화석과 원시 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한 없이 펼쳐지고, 트라팔가르 광장에서는 넬슨 제독과 엠마 해밀턴의 사랑과 대처 수상의 포클랜드 전쟁과 전세계적인 금융위기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에 여왕과 그녀의 남편인 독일 출신의 앨버트 공의 이름으로 완공된 빅토리아 앤드 엘버트 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속삭임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투철하게 반복되어 도대체 잠은 언제 자나 싶을만큼 밤새도록 끊어지지 않을 기새다.
자연사 박물관을 나오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도킨스식대로 표현하자면 DNA의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나뭇잎맥을 따라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자 우리는 풍부한 개성으로 남아 획일성을 거부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163쪽)
자본과 제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취약한 나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인간 소외, 실업 등 후몰아치는 사회의 문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 자체일지도 모른다. (213쪽)
트라팔가르 광장(Trafalgar Square)은 내셔널 갤러리 앞에 있으며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며 다양한 스펙트럼의 행사와 시위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하여 영면한 위대한 넬슨 제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그곳에는 넬슨 제독의 동상과 해전에서 패한 프랑스 군의 대포를 녹여 만든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1990년 3월에는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오늘날 세계를 이 모양 이꼴로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 대표주자 마거릿 대처에 저항한 민중의 집회가 시민을 폭도로 규정한 그녀에 맞서 승리한 흔적이 깊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MB도 뭔가 깨닳아야 할텐데...
트라팔가르 전투가 끝나고 나서 1815년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한 번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은 웰링턴이 이끌었고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이 이끌었다. 그런데 그때 운명을 건 것은 국가뿐 아니라 수많은 투자자들도 있었다. 당시 증권 거래소의 긴장감은 더할 나위 없이 팽팽 했다고 한다.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은 가문의 셋째 아들 네이선이 이끌고 있었다. 전쟁터에 스파이를 보내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그는 보유하고 있던 국채를 팔았다가(당연히 패닉 상태에 빠진 일반 투자자들의 투매 열풍이 뒤따랐다) 되사는 방법으로 보유액의 20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단 하루만에 벌었다. (181쪽)
트라팔가르 광장의 1990년을 닮지 못한 2008년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계속 세계 화패 전쟁의 희생양이 될 것인가? 그녀 혜윤은 멀고 먼 섬나라 광장에서 이 나라를 걱정으로 한 숨을 쉬고 있었을 것이다.
런던탑(Tower of London)과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로 이어지며 그녀가 끊임 없이 쏟아내는 파워풀한 관능적 콘텐츠들은 언젠가 런던으로 떠나게 될 우리들에게 대충 준비해서 떠나지 말것을 당부하는 듯 친절하면서도 약간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니치 천문대 아래에는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템스 강을 건널 수 있는 보행자용 지하 통로가 있다. 걸어서 템스 강을 건너기 위해서 나도 맥주 한 병을 준비 했는데 사실은 두 병, 세 병 늘다가 결국······. 내려오면서 공원과 천문대를 뒤돌아보니 햇빛 때문에 손으로 눈을 살짝 가린 천문대가 실눈으로 날 바라 보는 것 같았다. (265쪽)
아, 마지막 한 마디가 그녀의 깊은 고독을 드러 낸다.
할수만 있다면 밤새 책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와 맥주를 나누고 싶을만큼 안타깝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고독을 씹어서는 안될 것이며, 어쩌면 여우같은 그녀도 스스로 잘 알면서 괜한 푸념을 했으리라 본다. 이미 그녀와 맥주를 나누고 싶은 독자들이 끝없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두툼한 에필로그까지 마저 읽고 덮었을 때에야 나는 출판사를 읽었다.
요새 시선을 끌만한 순수 국내산 신간들은 죄다 푸른숲 출판사가 싹쓸이 하는 느낌...
언변이 매우 뛰어난 여장부가 CEO로 있는 출판사의 장점인지 아무튼 불황에도 거뜬하게 힘을 발휘하는 출판사의 에너지가 부럽다.
책벌레 보다는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런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