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1 - 봉단편 홍명희의 임꺽정 1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임꺽정을 두번 읽은 지금, 세간의 평에 대한 몇 가지의 궁금증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임꺽정이 <우리 말의 보고> 라는 것이다.

임꺽정을 처음 읽었을 때 노트에다가 <문체가 너무 좋다> 운운을 적은 것이 있던데, 기실 정말로 내가 좋다고 느꼈었는지 아니면 좋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듣고서 읽어서 좋다고 느꼈었는지 약간의 불확실함이 있다.

구수한 토박이말이 많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예스러운 말이 주는 단정함도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시대를 관통할만큼 대단한 것인가? 라는 자문을 해보았다.
홍명희가 쓰는 토박이말은, 말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김주영이나 이문구씨만큼 풍성하지 못하다. 김유정의 토박이말보다 굳이 대단하게 구수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한편, 예스러운 말의 단정함이라는데에 있어서, 적어도 1970년대생인 나에게 옛날에 쓰인 글에는 다 옛스러운 단정함이 있고, 나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가령 이광수나 심훈 김성한등이 쓰는 말도 간결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다.

분석을 하자면 이런데, 분명히 읽고 나서 남는 정서에는 뭔지 모를 구수함이 있단 말이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었는데... 이 질문은 소설가 김남일씨의 평론을 보고서 해결되었다. (김남일씨가 초독시 느꼈던 당황스러움도 나와 같다는 것도 알았다.)

김남일씨가 제시하는 요소로는 첫째. 임꺽정의 토속성은 문장미학이 아니다. 문장에서 오는 구수함이 아니라 전체의 정서에서 오는 것이다. 둘째. 홍명희는 이야기 할아버지의 위치에 서서 조곤조곤 청중을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부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는 분은, 저 옆의 링크, 로 사계절 출판사 홍명희 문학제로 들어가서, 김남일씨의 관련글을 찾아보시길.


궁금증이 또 하나 있다. 이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다.
과연 임꺽정이 영웅인가? 서민의 희망을 대표하는 시대의 영웅인가?
여기에 대해서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임꺽정을 두번째 읽으면서,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놈, 이렇게 나쁜 놈이었다니. 가령 글 안에서도, 사람 목숨은 파리같이 여기면서 날개다친 벌레에는 눈물을 떨구는 괴퍅함 운운한 부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부하고 마누라고 말 안들으면 한 방에 보내버리는, 도적놈 두목일 뿐이었다. 떠올리자면, 장길산처럼 <의적행각>을 벌이는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배고픈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낭만적인 의적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임꺽정이 한 유일한 혁명적인 행동이라면, 신분사회에서 <왕> 다름없는 권위와 행세를 누렸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소설속의 임꺽정이 영웅이 된다면, 오늘날의 영웅은 <세계는 넓고...>의 김우중이나, <시련은 있어도...>의 정주영 같은 사람이 아닐까?

즉, 지금까지로는, 드는 생각은, 임꺽정을 민중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소설 임꺽정이 아니라 저자 홍명희를 둘러싼 여러 이데올로기적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홍명희가 묘사한 임꺽정은 천하의 장사이자 도둑놈중의 제왕일 뿐이다.

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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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 2005-02-0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양서 새살림 차린후의 행동거지나 8권에 굿구경을 가겠다는 것을 굳이 못가게 하는 장면이나..임꺽정은 민중의 대표라는 이미지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도덕적 윤리기준보다 좀 더 악독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당시 보쌈치기나 어린 아이를 납치했다는 풍속을 기준으로). 개인적으로 청석골과 같은 산채의 자유로움을 부러워 하지만 홍명희 선생의 청석골은 분명 임꺽정의 공화국같은 냄세가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지음, 김경숙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 기본 전제 :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 드러나는 특성 : 남자는 성공지향적이고 여자는 행복지향적이다. 남자는 미래지향적이고 여자는 현재지향적 / 관계 지향적이다. 남자는 역동적 능동적이고 여자는 피동적 수동적이다. 남자는 존경과 신뢰를 받는 기사가 되길 원하고 여자는 보살핌과 존중을 받길 원한다.

* 독후감 1. 어떻게 서양인들의 구체적인 예시들이 하나같이 내게도 공감이 올까? 우리가 이만큼 서양화 되어있단 말인가?

* 2. 많은 공감을 했다. 이상한 동아리의 이상한 여자들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것이라는 최초의 여성관을 가졌던 찬군에게 -_-, 더없이 구체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 3. 화남금녀는 전체적으로 약간의 보수성향을 띄는 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화된 특성들은 충분히 공감할만큼 구체적이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좀 더 알게 된 느낌이다.

* 4. 노자에 나오는 추상적 개념의 여성적 힘, 세상을 구원하는 힘, 에 대한 약간의 구체적인 꼬투리를 잡은 느낌이다. 실제 관계개선에 관한 구체적 처방들은 지루했지만, 문제의식에 있어서만큼은 획기적이고 감동적이었다.

* 5. 지구를 구하는 법에 대해서 연구중이다. 종종 나는 <여성적 힘>이 우주를 구한다는 따우의 흰소리를 하고 다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적 힘이 남성적 힘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는거다. 불완전한 음과 양은 둘이 서로 도와줘야 하는거다. 결론은, 우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장가를 잘 가야 한다.

찬별.

* p-1
현재로서, 이 음과양의 조화가 가장 구체적으로 보였던 것은 김소진형의 소설들이었다. 신풍근 베이커리 약사, 굶주린 시위학생들에게 찐빵을 먹이려던 신풍근씨가 전경에게 막혀서 들어가지 못하자, 대신 전경들에게 찐빵을 먹이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던 기억이 난다. 젊고 따뜻한 사람을 일찍 데려간 하늘이 아쉬울 뿐이다.

* p-2.
자취를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은. 정균형과 상원형의 글을 읽으면서였던 듯.

* p-3.
화남금녀에서 인상에 남은 구절중 하나는 ; Never argue.
토론은 좋되 논쟁은 안된다, 가 아니라 절대로 그런 거 하지 마라, 라는 맥락. (사실 영어로 대강 읽어서 조금 불확실하다만)
그러고보면 논리라는 거 참 못나기 짝이 없는거다. 나는 오년전의 나에 비해서 분명히 글로 표현하는 논리빨이 강해졌지만, 그러나 그래서 결론은? 하고 묻는다면 결국 똑같다. 결론을 정해놓고 논리는 거기다가 맞추는 것일 뿐이니.
가령 오년전의 나는 내가 느끼던 것에다가 노자의 현현지덕 같은 것을 가져다붙일 재주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오년전에 정균형 상원형의 글에서 읽은 느낌과 지금 내가 떠드는 소리사이에서 실질적인 간극은 얼마 없지 않은가. 오년전 무의식적으로 묘사한 흰도리는, 찬별이는, 모두 다 남자이되 여성적인 놈들 아니었던가.

* p-4
통신에서 혹은 지면에서 벌어지는 토론에서도, 누가 승복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결론은 감정으로 정해놓고, 논리라는 룰을 흉내내는 것일 뿐. 강준만씨가 그 대표라고 느껴진다. 김지하씨가 <내 사상의 전향은 한번도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적이 없다> 라는건 절반쯤 어거지로 들리지만 그러나 많이 공감이 되는 말이다.

* p-5
논리적 = 남성적 = 이성적. 도구적 이성이 인간의 특질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남성 본위의 사고가 깔려져 있다. 내가 좀 더 자유롭게 배우고 자라났다면, 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마누라와 새끼들을 먹이는데 내 모든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일종의 성공증후군 시간관리 증후군에 걸려있으므로, 돈사태에 깔리더라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 p-6
어제 마신 술 맥주 다섯병. 오늘 맥주 한 캔 + 데킬라 한 잔.
캐나다와서 여지껏 마신 술보다 더 많은 술을 이틀동안 마셨다. -_-

* p-7
정치.사회적인 힘은 기본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이라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남녀평등에 있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울러 여성의 사회활동도 당연한 것이지만, 요즘의 내 머릿속으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내 논리속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 써놓고 나니 굉장한 구닥다리가 되는 듯 한데. 실은 나도 사회활동 같은 거 별로 하고싶지 않다. 신문에서 만화와 문화와 까십란 이외의 란을 읽은 지는 오년이 넘었다. 나는 사회활동 말고, 나홀로 군자 같은 거 하고 싶다. 숙녀가 곁에 있어주어도 좋다.

* p-8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들어있는 - 노자의 유토피아. 변화없이 멈추어있고 고립되어 사회적 활동 없는 삶. 거기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고 (호랑이나 늑대 같은 놈들만 조심한다면). 내 공상속에서 이 노자의 유토피아야말로 여성적 힘으로 만들어낸 행복한 세상의 극치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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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조정래 문학전집 1
조정래 지음 / 해냄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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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대장경이라는 소설은 조정래씨가 1975년엔가 썼다는 소설이다. 그 문제의식, 즉 <몽고가 그토록 국토를 유린하는데 대장경을 새로 만들겠다는, 그 엄청난 불사를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비민중적인 것이다> 하는 것이 정말 날카롭다. 조정래씨의 문제의식, 그리고 주제의식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아-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대장경!! 감탄하고, 애써 보존하고, 세계에 널리 알리세- 하는 구태의연하고 지루한 생각이 아니다. 전란에 불타고 굶어죽고 찔려죽고 맞아죽고 끌려가고.... 그야말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어떻게 그런 큰 불사를 담담하게 이루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은 정말로 본받아야 할 것이다.

글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크게 두갈래이다. 무신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방책>으로 시작되고 추진되는 불사. (추진되는 도중에 그들에게서도 불심을 확인하게 된다. 혹은 임금의 경우 처음부터 불심을 갖는다. 그러나 임금은 지극히 무기력하고 최우가 가지는 불심은 체제유지보다 앞서지 않는다.) 그리고, 민초들의 동원.

이 민초들의 동원도 단순한 <불심>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님이 중요하다. 만약 민초들이 가득한 불심으로 천지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하는 식의 묘사라면 이 소설은 시중의 그 수많은 소설들과 차별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몰려드는 민중은 혹은 가슴에 쌓인 한으로, 혹은 예술가적인 신념으로, 혹은 어차피 부초같은 놈의 인생 착한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그들이 단지 불심만으로 대장경을 이루어낸 것이 아님을 조정래는 그 특유의 필력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조정래의 최근 작품들 - 태백산맥, 아리랑과 비교할 때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 사람은 늙으면 순해지기 마련이라고 표현이나 사상같은 것이 부드러워지는 법인데, 태백산맥-아리랑과 비교할때 이 대장경은 훨씬 선악의 구별이 약하다.

대장경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이는?

최우 - 최초에는 정권유지에 눈이 먼 독재자의 형상이나, 이야기가 나아가면서 그에 대한 작가의 눈길은 그렇게 차갑지가 않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 불심등을 밝히면서, 가끔 잊혀질만할때 '그래봐야 그는 독재자이고 정치가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보여줄 뿐이다.

고종 - 미련하고 어리석으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눈길도 그렇게 차갑지 않다. 오히려 무능을 자탄하는 고종에게서 어떤 동정심까지도 자아내게 할 정도다.
몽고 - 악역이다. 말할 것 없이 악역이다. 사람을 죽이고, 겁탈하고, 불지르고, 끌고가는, 악역이다. 그러나 이 악역이 한번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초반에 잠시 악행을 저지르나, 그 부분이 전체 글에서 삭제된다고 해도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무리를 주지 않는다. 단지 형식적인 악역일 뿐이다.

글쎄. 그렇다면 그 이유는, 마찬가지로 두가지쯤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대장경이라는, 부처의 안으로 모든 것이 크게 함께 하는 세상을 그리기 위하여. 찧고 까부는 것들 모두 부처 안에 있음을 말해주는...

둘째는 조정래씨의 역사인식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예를들면 80년 광주라든지.

이 소설이, 궁중 비사 내지는 전쟁사들을 피상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달리 취급되어야 하겠으나, 불만스러웠던 것은, 그의 시선이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되는 적은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엘리트로서, 그 시대의 엘리트인 수기대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면서 가끔 장균, 근필, 등의 속으로 들어가서 보기도 한다. 세사람은 분명히 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태백산맥, 아리랑이 줄곧 평범한 사람들이 털어내는 이야기라는 것과 비교할 때에 확실히 연륜이 쌓이기 전 조정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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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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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한 편의 잘된 역사소설은, 수십권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과학 서적 한박스를 읽느니 태백산맥을 읽기를,
독립운동사 한박스를 읽느니 아리랑을 읽기를,
민속사 한 박스를 읽느니 장길산이나 임거정을 읽기를,
그리고.
80년 광주에 관한 책 한박스를 읽느니 봄날, 을 읽기를.

2.
올해는 1999년이다. '광주사태'는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먼지가 가라앉는데에는 일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말은 그 사건과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모조리 저세상에 가고 난 후에야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쓰여진 객관적인 역사는 아무에게도 의미
가 없는 죽은 역사다. 크로체식으로 말하자면 '연대기'일 뿐이다.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역사이다.

3.
80년대의 숱한 사회과학 도서들, 그리고 진보진영에서 발행하는
각종의 자료에 묘사된 80년의 광주는 민주와 혁명과 전사와 투쟁과,노동자의 불굴의 투혼이 살아 숨쉬는 불꽃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봄날,에서 묘사되는 광주는, 그렇게 이데올로기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들, '백성'들은 그런 어려운 가치를 알지 못했으며,
빨갱이를 미워하고 경상도 사람을 싫어하며 자그만 시비로 밥상을 뒤집으며 부부싸움을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다른 어느 곳에 살고있던 사람들과도 똑같은, '백성'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백성들은, 죽지 않기 위해 몽둥이를 들었고,
죽지 않기 위해 총을 들었고,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총을 놓았다.
금남로에 모인 10만 군중도 물론 강조되어야 할 수치이지만
도청에서 옥쇄한 시민군이 겨우 백명안쪽이었다는 것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 할 수치이다.
광주 시민은 전사도 투사도 아니다.
어이없게 애타게 죽어간 이땅의, '백성'일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백성들을 죽였는가?

4.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그리고 그 대답에 따르는 댓가를 위해 우리나라의 80년대는 그렇게도 뜨거웠고 그렇게도 아팠으며, 사회과학서적속에서 광주시민은 전사가 되고 투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임철우씨는 그러한 대답을 상당부분 자제한다. 교설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기껏해야 작중의 윤상현씨나 김상섭기자등을 통해 추측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명치, 오하사, 유이병등을 통해 드러나는 공수부대원들의 고뇌는 결코 광주시민을 학살한 것이 공수부대원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백성들을 죽였는가?

5.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아니, 정치를 매우 싫어한다.
정치인들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뉴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박정희도 좋고 김영삼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남들이 좋다면 좋은가보고 싫다면 또 싫은가보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싫긴 하지만.)
정치에 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6.
"아, 112에 신고를 해야 한다니께 그러네. 지금 김일성이가 보낸 무장 공비가 공수부대 옷을 입고서 시민들을 쥑일려고 하고 있는데 경찰은 뭣하는 것이냔 말이여." - 어떤 취객들의 대화중.

7.
나는 75년생이며 부산 출생이다. 80년 봄에 나는 아마도 쫀드기 같은 것을 물고 광안극장앞을 뛰어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저러나, 빨갱이들이 광주에서 난리라더라, 같은 뜻모를 말을 주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광주는, 실존으로서의 체험이 아니다. 책을 통한 추체험을 조금 아프게 한 편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 점점 더, 광주는, 잊혀질 것이다.
공수부대와 광주시민이 서로 악수까지 한 마당에.
(도대체 그건 무슨 코미디였단 말인가. 1980년의 공수부대 지휘관이 끝내 잘못이 없노라고 떳떳이 버티고 있는데, 1999년의 공수부대 사병이 도대체 뭘 잘못해서 광주시민에게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처참했던 봄날의 열흘간이, 조금 더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면 좋겠다. 좀 더 정확히는, 후배들에게 기억되면 좋겠다. 하다못해,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은 몇월 몇일이었나?] 라는 수학능력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외우는 방식으로라도.

8.
조금 더 주관적인 감상.
무협을 많이 읽는 나는, 글로 표현되는 선정성에는 그리 예민하지 않다. 기실 사람의 눈을 붙잡아 끄는 선정성으로는 섹스와 폭력만한 것이 없을텐데, 그것도 익숙해지고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봄날은, 내가 읽어본 어떤 무협보다도 훨씬 더 잔혹하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팔기위해 마구 써댄 그 어떤 책보다도 더 잔혹하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잔혹한 사건들이 중원이나 신주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극명한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임철우씨는, 가능한한 과거형 어미를 자재하고 있다.

9.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미친놈처럼 통곡하고, 혼자 술에 취해 망월동을 찾고, 혼자 소리를 질렀다는 임철우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테다.
그 고통스러운 추체험속에 그의 남은 생이 절반이 깎였다고 하더라도충분히 믿을 수 있다.

찬별.

감상문 다시 읽으며 :

광주라는 말을 떠올려본 것이 이 감상문을 쓰고나서 오늘이 처음이 아닐까... 그러나 내 감상적 추체험속에서 그 날의 광주는 여전히 아프다. 책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광주의 그 봄날은, 풍년집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는 여의도 정치학 박사들과, 386 세대들과, 전현직 대통령들에게는 정치적인 사건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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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향기 1
이인화 / 세계사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이인화의 역사소설은,
고도의 지식인 소설로 보기 드문 꼼꼼한 고증을 하면서도
여기저기에서 잔잔한 잔재미를 준다.

초원의 향기, 는 고구려 유민인 고문간이
당나라에서부터 돌궐의 유목민 사회의 대장군이 되고
그리고 한 여자 - [동방교]의 교주격인 아란두라는 여자와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단상 몇가지.
1.
적어도 이 시대를 다루면서
이만큼의 꼼꼼하고 세밀한, 치밀한 고증을 한 글을 보기는
아주 보기 드물다.
그리고 화자의 역사관에 이만큼 객관적이고 진지한 무게가 느껴지는 소설도
참 보기 드물다.

삼국시대가 배경이 되는 소설의 열 가운데에 다섯은
삼국지의 무대를 우리나라로 옮기려는, 한국판 삼국지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로 쓰였다고 느꼈고 - 대륙의 한, 한삼국지...
나머지 열 가운데 셋은 고대 우리의 영광을 오늘에 되살리세, 하는 류의 경도된 민족주의가 우려되는 글들이었으며 - 잃어버린 왕국, 고구려를 위하여...
나머지 둘은, 굳이 삼국이 아니었더라도 문제가 없을 통속소설이었다 - 계백, 연개소문, 의자왕...
적어도 이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에서는 이만큼 진진한 역사적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소설이, 내 읽은 바로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2.
역사학자조차 객관적 모더니티를 포기한지가 이미 오래인데
소설가이랴 오죽하랴. 결국은 받아들이는 독자의 몫이겠는데
나는 다만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 (혹은 소재)로 등장하는
[동방교] 라는 것이 어쩐지 너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인화씨의 개인적 종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소설중에 등장하는 동방교의 여러 교리, 혹은 교리에 따른 행동들은 매우 기독교적 냄새가 풍겼다
- 마치 이문열의 대륙의 한, 을 읽으면서 상상력의 기반이 삼국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듯이, 초원의 향기의 기반은 기독교가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당나라에 당시 유행하던 경교등에 관한 자료는 매우 흥미있었지만 기독교와 관련된 작가의 어떤 편향을 보여주는 다른 자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3.
다만 쉽게 책장을 넘기기는 조금 어려운 소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 1권 이후부터는 술렁술렁 책장을 넘기기는 했지만, - 일부러 그렇게 했지만 조금만 쉽게 써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그건 내가 쓰고 싶은 바이기도 하다.

4.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은 실존인물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하는 문제는
특히 동방교라는 것에 관련된 부분은 작가가 각주라는 장치로 개입해서라도 조금 가려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
다른 이에게 강하고 추천하고 싶을만한 책은 못 되었는데
그 아쉬움은 위에서 말했던 [어려움] [기독교 냄새] 등이 되겠다. 하지만 이 시대에 관심이 있고, 역사소설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도 하겠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걸걸중상의 택껸, 이가도 휘하 청성파 네 도사의 무서운 무공,
죽어도 죽지 않는 오이, 등 몇가지의 신비스런 삽화는
치밀한 고증으로 짜여진 소설속에서, 어떤 역사적 생명력을 얻는 듯 하다.

찬별.


감상문 다시 읽고서...

이 감상문을 쓰고서, 그 날 대화방에서 신나게 떠들때 누군가가 "찬별님은 역사소설 비슷한 무협소설 아니면 무협소설 비슷한 역사소설만 읽으시네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_-
그 취향은 여직 변하지 않았다. -_-
그리고 지금 '다정' 이라는 역사 소설에 관한 평론을 손보는 중이었는데, 나는 최근 일년동안 초원의 향기에 대한 감상문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이 글과 구성이 똑같다. 신기하다.
취향만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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