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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인형 1
장경 지음 / 청어람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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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여점에 오랜만에 들렸다. 장경님의 성라대연을 빌려볼 생각이었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황금인형을 뽑아왔다. 작가의 말 - 떼돈 벌 겁니다, 역사의 요리사 장경! 하는 것이 어쩐지, 이 아저씨가 숨어살면서 어지간히 마음이 찌들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장경이라는 작가는 저런 식의 독설적인 자기 비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좀처럼 보기 힘든 자신감에 기대가 들기도 했다.

현재 1권만 읽었는데, 아무래도 장경이라는 작가는 무거워야 한다는 느낌. 예전의 벽호에서부터 가벼워지고자 시도했으나, 그 가벼움은 어쩐지 애처로워 보인다. 황금인형에서도 마찬가지. 인물 자체의 설정을 가볍게 하고자 했으나, 글 전체의 흐름에 맞지 않는 가벼움이라고 느꼈다. 뭐 모르지, 내게 장경은 언제까지나 암왕의 작가로 남아있을테니까.

머릿말에는 한국무협에 대한 오랜 고민을 토로했다. 그 고민은 '글을 잘 쓰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황금인형의 경우, 여전히 무협을 읽는 느낌이다. 무협을 읽는 느낌이 들면 이미 제대로 된 맥락의 한국 무협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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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과 햇살
김용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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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인 것 같은데 처음 이름을 들어본다. 역시 세상은 넓고 작가는 많다.

울진삼척 무장공비와 당시 신고 주민의 이야기를 2003년에 그리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울진삼척 사건의 주역들은 이제 환갑이 넘은 노인네들이 되어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이야기들은 이제 노인네들의 이야기이다. 반공과 적화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낡아버린 시대.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돈 욕심으로 간첩생포를 주장하던 황봉만(이름 맞던가? -_-) 과,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이념만 주장하기에 자수가 아닌 체포당했음을 주장하던 배승태, 두 노인. 1960년대에는, 분명 자수한 것임에도 서로 체포당했음을 주장한다.

그 두 사람이 2000년도에는 서로, 그것이 사실은 자수였음을, 당시에는 자기들이 잘 못 생각했음을 서로 이야기하며 화해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 확실히 이념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 왈가왈부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은, 논쟁을 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논쟁 자체로 서로가 서로의 논리에 승복한다든지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결국 논쟁이 시들해지고난 후의 얼마쯤에는 논쟁 자체가 의미없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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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데이비드 조지 고든 지음, 문명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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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퀴벌레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폭넓게 담고 있다. 이중에는 평범한 교양인이라면 알고 있을만한 상식적 내용도 있고, (비교적) 전문적인 지식에 속하는 내용도 있다. 지하철에서 책을 들고 다닐때는, 꼭 손에 바퀴벌레 몇 마리를 들고 다니는 기분이다. 표지의 바퀴벌레는 반투명한 밝은 갈색, 진한 고동색 등이 있는데, 살아있는 바퀴벌레같다. 책을 펴도 마찬가지다. 바퀴벌레들이 금방이라도 기어다닐듯한 느낌을 몇 번 받았다. 재미있는 내용이 가끔 있다. 가령, 세계에서 가장 큰 바퀴벌레로 기네스북에 오른 것의 크기는 12cm정도라든지 하는... 기존의 모든 책들이 지겨워서, 정말 겪어보지 못한 엽기를 권한다면, 바퀴벌레 두어 마리 손에 들고다녀보는 것도 괜찮을테다. 다만 내용은, 썩 괜찮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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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무협이 왜 순수문학에 비해 천대받는가? 순수문학자들중에는 대학교수가 더 많다는 류의 대답은 빼고 생각해보자.

순수문학자가 우월감,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를 어떤 분은 그 태생에서 찾았다. 순수문학은 우리 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해서 식민지시대라는 우여곡절을 겪었는데비해 무협은 중국 소설의 번역과 번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근대문물이 다 그렇듯이, 순수문학이라고 해서 어찌 자생적일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순수문학의 기원은 일본을 통해 번역된 러시아 문학 정도라고 알고있다.

오히려 그 논리가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면, 순수문학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함께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것이다. 심훈이나 이육사로부터 시작해서 김지하, 황석영, 박노해, 조정래등이 목숨을 걸고 글을 썼으며, 혹은 윤동주나 임철우같은 이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깎아가며 여린 서정을 썼다. 혹은 백석이나 최명희는 스스로의 삶에 녹아든 이야기를 담담하고 치열하게 썼다.

무협에서 괄목할만한 사회적인 의식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가. 사회적 의식에서 비롯된 서정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가.

박영창의 무림 파천황 필화사건은 해프닝에 가깝다. 금강의 작가 소개에 빠지지 않는 "당시에 금기시되던 황궁을 소재로..." 라는 프로필은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 순수소설가로 활동중인 김영하의 등단전 작품 "무협 학생운동"은 나름대로의 절실함은 있지만 습작에 가깝다.


0-1.

열한번째 사과나무에서 비롯된 순수문학 - 무협에 대한 이야기가 무협 동호회 주변에서 제법 시끄러웠다. 순문학작가 엿먹어라! 라는 요지의 평은 대중문학동 그리고 무협소설 동호회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 무어라도 건설적인 토론이 좀 있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램이었다.

1.
무협을 읽고 여기저기 평하는 글을 끄적인 것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도저히 쉽게 평할 생각을 갖기 곤란한 작가가 두 명 있다. 좌백과 장경이다.

좌백의 경우, 그의 진지한 관념과 좌충우돌하는 도전, 부단한 노력이 만들어낸 가장 무협지다우면서도 전혀 무협지 같지 않은 그의 작품은 적어도 내 손에 쥔 어설픈 칼로 썰어질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다른 작품은 만만하냐? 라고 반문한다면... 울어버릴꺼에염 T_T)

장경은 약간 경우가 다르다. 장경의 작품은 매우 솔직하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의 낭만이나 허영, 혹은 가식에 솔직하다. 즉, 무협에서는 드물게도 작가와 작중 인물 사이의 정서적 거리가 매우 가깝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작가의 인격에 대한 평가가 되지 않을까, 혹은 작품의 특정요소에 대한 날선 비평은 작가의 가치관에 대한 무례한 재단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무례한 비평은 때로는 작가에 대한 쌍시옷 들어가는 욕설보다도 더 기분 나쁠 수 있는 법이다.

장경의 상상력은 배경이 틀리다. 대부분의 무협작가는 상상력에서 시작한 상상력을 무협이라는 틀에 맞춘다고 하면, 장경의 상상은 최초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항상 장경 그 자신이다. (여담으로, 나는 장경이 대중의 눈치를 본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대중 앞에 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놓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민감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짐작은 해본다.)

2.
대중에게 인지된 장경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산검로와 암왕은 모두 386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 천산검로의 경우 정서적인 면에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던 386의 절박하고 암울한 의식은, 암왕에 이르러서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드러난다.

정과리는 대중문학의 특징이 "정서의 격렬함에 있다“라고 표현해서 여러 대중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빈축을 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표현에 담긴 부정적인 폄하의 뉘앙스를 제거한다면 과히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순수문학에서도 이 정서의 격렬함이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모티브이다. 정서의 격렬함은 "감동적"이라고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암왕은 감성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회상이라는 면에서 최영미나 공지영의 후일담들과 같은 맥락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적 감성의 회상과 여성적 감성의 회상이라는 곳에 그 근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가령 배교와 무림이 싸움을 시작하게 된 근거는 "무림 정파들이 먼저 탄압했기 때문에" 이며, 사실 그 무림은 한 줌도 안되는 "고관대작의 만수무강"이라는 음모에 어이없게 놀아났다. 이것은 한 줌 자본가에 의해 놀아나는 공권력의 민중 탄압,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이것을 당시 상황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라거나 혹은 세월을 흘려가며 차분해진 관찰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재현했다기보다는,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격렬하고 낭만적으로 회상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80년대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코드는 암왕 다섯 권을 통해 계속해서 보인다. 초반의 명강량의 도피극은 수배중인 학생회 간부, 배교도들의 굳건한 믿음은 주체로 뭉친 동지, 신성때문에 사랑해서는 안되는 성녀는 사랑하되 사랑할 수 없는 동지, 온 세상에서 마교라고 불리우며 탄압받는 것은 매스컴과 세상에게 탄압당하던 '반정부 빨갱이', 정통 배교와 만인촌은 자민투와 민민투 (만인촌. 이라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타오르는 불꽃....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 암왕의 처절하고 통쾌한 복수극은, 꽃다지등이 절망적으로 희망차게 부르던 노래들이 그리는 바로 “해방의 그날이 오면”이다. 마인거와 구룡선이 가는 곳 마다 그들을 탄압하던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잿더미가 되어 무너져 앉는다. 승리의 그날. 그리고 마지막은 비극이다. 명강량은 배교를 위해 마침내 자기 스스로를 태운다. 그 처절한 분신.

3.
황석영의 장길산을 생각해보면 암왕과 몇 가지의 정서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뿐 아니라 상징의 기의나 서사의 흐름에도 제법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80년대 적이라는 점인데, 장길산의 경우는 시대를 몇 년 앞서있고, 암왕은 십년 이상 뒤에 있다. 이 20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의 간극이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크게 다르게 만들고 있다. 20년을 앞선 장길산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20년 뒤에 있는 암왕은 심심풀이 무협지로.

4.
무림동에서 읽었던 가장 인상적인 감상문중의 하나는, 어느 80년대 초반 학번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분이 야설록의 신객에 대해서 이야기한 짧은 글이었다. 80년대 초반의 대학생으로서 숨막히고 절박하던 때에 야설록의 신객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읽고 또 읽으며, 감상적이고 가슴아프게 읽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말했을 때에, 인간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이상지향적인 동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인간성은 공상, 낭만, 이기, 감상 등도 동시에 지니고 있으므로, 무협소설은 무협소설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참여를 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았을 때에, 야설록의 신객은 황석영의 장길산만큼의 기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없을까.

신객을 장길산과 같은 등위의 다른 각도에서 평가하는 일은 작가의 임무가 아니라 평자의 임무다. 비정치적이고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인간성을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이념적인 인간성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일은 무협작가의 오롯한 문제가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로 인간성의 사소한 부분들에 대해 사람들이 보다 더 주목하고 있다. 신객이 장길산 만큼의 기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분위기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자유나 정치보다는 잘 차려진 한 끼 식사라는 주장이 특별히 낯설지도 그렇게 못나보이지도 않는다.

5.
정치적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일보가 야당지를 자처하면서 “한겨레 신문 특혜” 운운하는 세상이며, “이야기 속으로”에서 분위기 잡으려고 음침한 조명 아래 “Karl Marx, Das Kapital"이라는 붉고 두꺼운 책을 쌓아놓는 세상이다. 즉, 암왕의 작가 정신이 시대를 앞서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암왕을 사회적 역할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암왕을 재미있게 읽었고, 쪽팔림을 무릅쓰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대학 초년때 나는 공지영의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같은 것을 아프고 슬프게 읽었으며, 사회 초년생인 요즘에 암왕을 아프고 슬프게 읽었다. 암왕이 아름다운 방황보다 못할 것이 있었을까.

이만하면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라고 해도 될 듯 하다. 적어도 나에게 암왕은 별 다섯 만점이면 별이 다섯 개이고, 별 일곱 만점이면 별이 일곱 개이다. 물론 나에게는. 다만, “일반적으로 무협소설은...” 이라는 말머리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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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재지이 1
포송령 지음, 김혜경 옮김 / 민음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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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홀리는 이야기들의 모음.

중세 중국 남성의 Sexual Fantasy의 모음이다.

나는 점점, 단순함에 매력을 느낀다.

삶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점점 듣기가 고달퍼진다.

이리이리하여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둥의, 지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매우 거창한 듯이 늘어놓는 작가들을 볼 때면 짜증이 난다.

그래서 한문이 재미있다.

한문으로 된 이야기들은 때로는 심하다 싶을만큼 앞뒤를 생략한다.

가령 책 한두권이나 되는 여행기는, "나는 중국에 갔다. 가는 길이 십만리였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뭐 이정도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요재지이는 한문 특유의 그 압축적인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그래서 간결하고 재미있고, 그리고 환상의 여백이 있다.

 

환상의 여백.

갤러그나 제비우스에 익숙한 세대가 플라이트 시뮬레이션같은 최신 비행 시뮬레이션 액션을 할 수 있을까? 뭐 할 수야 있겠지만... 그리고 확실히 그 게임들은 진보된 것이지만,

세모는 비행기이고 네모는 유에프오이고 작대기는 총알이던 그 시절,

작대기의 모습과 세모의 모습을 제 마음대로 상상하던 그 여유로운 환상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요재지이는 정말 재미있는 환상의 연속이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늦은 밤, 어느 여우가 내 집 문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다면 기꺼이 받아줄만도 하리라.

단. 요재지이는 총 6권 전질이고, 각 권별로 내용이 다르다. 지금 읽은 1권은 남성의 Sexual Fantasy에 가깝다. 다른권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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