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1:제1부 -상 - 창비장편역사소설
송기숙 지음 / 창비 / 1989년 10월
평점 :
절판


1.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평론가가 뽑은 해방후 한국소설 50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알만한 역사소설들은 대강 다 목록에 올랐던 걸로 기억난다. 장길산, 혼불, 토지, 태백산맥, 봄날, 객주.... 그 이외에 기억나는 것이 바로 송기숙씨의 녹두장군이었는데, 글에 비해 별로 읽히진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객주 또한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지만, 작가인 김주영씨는 칠성사이다 선전에 나올만큼 대중적 주목을 받았나본데, (홍어, 라는 것도 꽤 베스트셀러였지? ) 송기숙씨는 유독, 그 주목이 적은 것 같다. 대학생들이나 돌려보는 자랏골의 비가, 정도?

열권이나 되는 대하소설들에는 나름대로 색깔이 뚜렷하다. 단편으로 보여줄 수 없는 작가의 모든 것들이 통틀어 나열된 역사소설 속에는, 가령 임꺽정이면 잘 차려진 옛날 이야기 밥상 하나 가득이라는 느낌. 봄날은 피맺힌 광주의 절규를 쓰기 위해 자기 명을 깎아가며 망우리 공동묘지를 미친 사람처럼 헤맸다는 착한 소설가의 피끓는 절망과 분노, 장길산에는 정의로 가득 뭉친 우리들이 우리의 손으로 역사를 바꾸고 말겠다는 낭만적이고 힘이 넘치는 긍정, 같은 것 쯔음이 될 텐데,

저마다 그 시대 백성의 가장 낮은 곳을 훑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소설이 많은 데 비해서 진짜로 그 낮은 곳을 훑었다는 느낌이 드는 소설은 몇 없었다. 나는 특히 이 범주에 조정래씨를 넣고 싶다. 그들의 소설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낮게 관찰하려고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를 지식인의 냄새가 난다. 가령 태백산맥에서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인물인 김범우의 한계를 벗어던지지는 못한다는 느낌이다. 물론 작가는 그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김범우 스타일의 인물을 빼놓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2.
그래서 송기숙의 녹두장군은 느낌이 색다르다. 녹두장군의 문장은 옛 글의 냄새를 풍기는데, 이 옛 냄새는 김주영이나 황석영의 '우리말 문체'와는 또 느낌이 틀리다. 녹두장군은 1920년대 작가들이 쓴 문장과 여러 가지로 느낌이 비슷하다. 짧고 간결한 문체로 툭툭 던지듯 액센트 없이 흐르는 문장을 별 생각없이 읽다가, 사건이 어떻게 넘어갔는지 제대로 짚지 못할 때가 가끔 있다. 또 녹두장군에는 '심리 묘사' 라는 것이 거의 없다. 어떤 인물의 내면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데로 겉을 훑어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송기숙씨의 글에서 1920년대를 느끼는 이유는, 헌책방에서 산 그 책이 1920년대책처럼 빛이 바랬기 때문일 수도 있다. -_-)

송기숙씨는 동학란을 동학이 아닌 농민 봉기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나야 잘 모르긴 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이다.

3.
녹두장군에는 '착한 관원'이 없다. 하지만 이건 조정래씨의 소설에 '착한 우익'이 없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착한 우익'이 없다는 것은 우선 사실과 다를 것이고, 그리고 우익이 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착한 관원이 없는 이유는 너무 명백해 보인다. 돈 내고 수령 임직 받아서 석달 있으면 갈리기 전에 본전 뽑아야 된다는 그 시대 실상이라면,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4.
관원들이 이끈 역졸이 고부 부녀자 '전체' 를 다 겁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열 살 짜리 어린아이까지 겁탈당했다는 그 이야기들을 사료 뭉치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리는 이야기였다. 몸을 버리면 목을 매던 시절에, 명색 대하소설에서 없는 이야기를 했을리는 없는데...

함께 그런 이야기도 있었다. 그 마을 남자들이 그 일을 조용히 덮어버렸다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정말, 덮어둘 수도 덮어두지 않을 수도 없는 문제인 것 같다.

5.
역사소설속에서 가끔 그렇게 훑고 지나가는 사건들을 현재로 추체험하면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무서운 일이 된다. 나 자신에게 추체험하면 더 무서운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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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전 3
권오단 지음 / 영언문화사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전우치전에서 내
눈을 가장 잡아당긴 것은 서사의 방식이었다. 서양 소설 이론에서의 개연성
어쩌구 하는 것을 끌어들일 경우, 전우치전은 소설도 뭣도 아닌 황당함 뿐이
다. 전우치전의 사건 전개는 개연이나 필연보다 우연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
다. 우연히 만난 노인이 조선 제일검이더라, 도망가다가 만났는데 풍류문의
후계자더라, 전우치전의 사건 전개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이
서사가 조금도 짜증나거나 낯설지 않은 까닭은?

전우치전의 내용은 조선시대의 것이라기보다는, 새소년이나 어깨동무에 연재
되던 일지매의 정서라고 느껴진다. 이 정서는 임꺽정과 장길산을 대조해서 읽
었을 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임꺽정이나 홍길동을 의적의
대명사로 칭해 부름에도 불구하고, 실제 벽초의 임꺽정이나 허균의 홍길동전
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의적의 활약은 구체적이지 못하다. 전우치전(권오단님의
전우치전이 아닌,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도 전우치의 활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적의 모습과 약간의 거리가 있다. 이에 반해 장길산에 등장하는 의적들의
활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과 구체적으로 일치한다. 양반네 집에 쳐들어가서
통쾌하게 무찌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모습. 아울러 내용중에 등장하는
숱한 경전의 인용, 고전의 인용들은 빛바랜 도덕교과서의 느낌을 준다. 이 경
전 인용구를 읽고서 인생을 반성할 사람이 있는가? 오히려 열명중의 아홉명은
시리얼란에서 이 인용구가 나오기 시작하면 엔터를 눌러 장을 바쁘게 넘겼을
것이다. (나또한 그랬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장황한 인용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용들은 통채로 하나의 기호가 된다.
장길산의 장황한 민속 재현, 객주의 민요 재현, 혼불의 민속 재현들은 독자의
정밀한 눈길을 받지는 못하지만, 소설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한 마디의 수식어쯤이라고 할까? 임꺽정이라고 하면 토속성, 장길산이라고 하
면 사회경제, 객주라고 하면 유장한 우리말, 이라고 붙이는 한마디씩의 수식어
들 말이다. 그래서 전우치전, 이라고 하면 공자님 말씀! 이라는 정도의 수식어
가 떠오르게 하는 인용구라고 할까. 그러나 이 공자님 말씀들은 권위나 엄숙함
보다는 약간의 희극성과 함께 지나간 낡은 것이 주는 정다움을 보여준다. (작
가의 의도에 아마 훨씬 못미치는 해석이 될 듯 하다. 조금 당황스럽게도, 나는
작가가 정말로 독자들에게 옛날식으로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싶은건가? 라는 느
낌을 받았다.)

전우치전의 내용적 측면이 그렇다고 할 때에 형식들은 어떤가? 사건의 전개 방식
그리고 이야기의 서사 방식은 민담 및 구전소설들의 양식과 매우 닮아있다.
사실 전우치전에는 기발한 반전이라고 할 부분이 거의 없다. 한 단락이 시작하는
부분에서 어지간한 독자라면 앞으로 사건 전개가 어떻게 될것인지 대강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때쯤 누가 나오겠네. 이때쯤 누가 도와주겠네. 하는 식의 짐
작은 글을 읽어가는 중에도 종종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독자의 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의 전개는 고전소설의 서사양식에 매우 닮
아있다. 흔히 고전소설이라고 하면 해피엔딩, 권선징악, 이라는 말부터 떠오르는
데, 이것은 전우치전에도 적용되지 못할 말이 아니다. 서양 소설의 베이스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갈등 양상, 혹은 기승전결의 반전 중심에 있다고 할 때에,
동양적 서사의 베이스는? 글쎄. 명확하게 표현은 못하겠고, 연극과 굿의 차이 쯤
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봐야 하지만, 굿은 아무 거리
나 봐도 큰 탈이 없다, 라고 한다면? (굿이라는게 그렇지 않다면, 줄타기라도 괜
찮겠고, 아니면 줄거리 뻔한 심청전 같은 것의 구연장이라고 해도 되겠다.)

전우치가 과연 70년대의 정서인지 조선시대의 정서인지, 그건 70년대에 젖병을
빨고 조선시대에는 뭐하고 있었을지 모를 나로서 판정지을 수가 없다. 다만 전
우치전의 가치는, 그 서사의 방식에 있어서 전통적 방식을 성공적으로 살려내었
다고 하겠다. 이것에 비하자면 고증이나 경전, 기타 역사에 관한 작가의 세심한
공부와 고증들이 만들어낸 성과는 오히려 미미하다고 할 정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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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12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적 메세지를 가지게 될 때,
그 메세지는 순문학보다 훨씬 다 강렬한 에너지와 파괴력을 뿜기도 하는데,
그것은 순문학이 돌려말하기, 은유나 상징하기, 말을 아끼기등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순문학을 읽는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이 순문학
을 보고서 뭔가를 느끼는 것은 쉽지 않으며,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
지를 제대로 혹은 나름대로 잡아내기란 더욱 어렵다.

한편 장르문학은 훨씬 더 자유스러운 상징적 도구를 쓸 수 있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극단적인 상징들을 쓸 수가 있다는 것이 되겠는데,
드래곤라자의 "영원의 숲"에서 보여주는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
퇴마록에 등장한 귀신에 씌워져 서울로 탱크를 모는 충성스런 사단장,
금강불괴가 상징하는 인간성 완성으로서의 금강불괴,
등등이 이런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들이 전하는 메세지의 강렬함과 진지
함이 결코 순수소설의 강렬함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독자의 경우다. 대중문학을 읽는 독자가, 정신수양이나 인격향상등을
위해서 글을 읽지는 않는다. 전우치전에 나오는 숱한 경전 말씀이나, 드래곤
라자에서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직접 등장한 부분, 들에 이르면 누워서 방
바닥을 딩굴며 책을 보던 독자들은 미련없이 그 부분을 건너뛰고, 칼싸움을
하거나 마법을 부리는 장으로 건너뛴다. 그래서 아무래도, 대중소설이 독자
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방법은 순수문학보다 훨씬 교묘하고 기술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이다.

드래곤라자는 생전 처음으로 읽어본 환타지이므로 (그나마 다 읽지도 못했으
므로) 할 말이 많을 수는 없지만, 무협에 대해서 떠오른 생각으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무협은 보다 보수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령 팔십
년대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영웅담들은 팔십년대 젊은이들의 생각이라
기보다는 새마을운동시대 맨주먹으로 돈벌어보세를 외치던 젊은이들의 생각
에 가깝다고 느껴지고, 구십오년 이후 보여지는 무협에서의 사회적 리얼리즘
의 경향들은 구십오년 이후 젊은이들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삼팔육세대
의 방식에 가깝다. 진지한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무협의 경우, 대개는 개개의
인간을 탐구한다기보다는 사회에서부터 개인으로 탐구해들어오는 경향이 강
하다고 하겠다. 드래곤라쟈가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서 사회로 탐구해 나가는
것과는 반대라고 하겠다. (다른 환타지를 좀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함)
이것을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전통에까지 이어본다면. 글쎄. 가능할 수도 있
다고 본다. 개인적 감상이지만, 드래곤라쟈의 처음 얼마를 읽어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우리 세대의 감성에서 서양의 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내가 생각했
던 것보다 높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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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 - 봉단편 홍명희의 임꺽정 1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임꺽정을 두번 읽은 지금, 세간의 평에 대한 몇 가지의 궁금증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임꺽정이 <우리 말의 보고> 라는 것이다.

임꺽정을 처음 읽었을 때 노트에다가 <문체가 너무 좋다> 운운을 적은 것이 있던데, 기실 정말로 내가 좋다고 느꼈었는지 아니면 좋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듣고서 읽어서 좋다고 느꼈었는지 약간의 불확실함이 있다.

구수한 토박이말이 많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예스러운 말이 주는 단정함도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시대를 관통할만큼 대단한 것인가? 라는 자문을 해보았다.
홍명희가 쓰는 토박이말은, 말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김주영이나 이문구씨만큼 풍성하지 못하다. 김유정의 토박이말보다 굳이 대단하게 구수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한편, 예스러운 말의 단정함이라는데에 있어서, 적어도 1970년대생인 나에게 옛날에 쓰인 글에는 다 옛스러운 단정함이 있고, 나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가령 이광수나 심훈 김성한등이 쓰는 말도 간결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다.

분석을 하자면 이런데, 분명히 읽고 나서 남는 정서에는 뭔지 모를 구수함이 있단 말이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었는데... 이 질문은 소설가 김남일씨의 평론을 보고서 해결되었다. (김남일씨가 초독시 느꼈던 당황스러움도 나와 같다는 것도 알았다.)

김남일씨가 제시하는 요소로는 첫째. 임꺽정의 토속성은 문장미학이 아니다. 문장에서 오는 구수함이 아니라 전체의 정서에서 오는 것이다. 둘째. 홍명희는 이야기 할아버지의 위치에 서서 조곤조곤 청중을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부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는 분은, 저 옆의 링크, 로 사계절 출판사 홍명희 문학제로 들어가서, 김남일씨의 관련글을 찾아보시길.


궁금증이 또 하나 있다. 이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다.
과연 임꺽정이 영웅인가? 서민의 희망을 대표하는 시대의 영웅인가?
여기에 대해서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임꺽정을 두번째 읽으면서,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놈, 이렇게 나쁜 놈이었다니. 가령 글 안에서도, 사람 목숨은 파리같이 여기면서 날개다친 벌레에는 눈물을 떨구는 괴퍅함 운운한 부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부하고 마누라고 말 안들으면 한 방에 보내버리는, 도적놈 두목일 뿐이었다. 떠올리자면, 장길산처럼 <의적행각>을 벌이는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배고픈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낭만적인 의적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임꺽정이 한 유일한 혁명적인 행동이라면, 신분사회에서 <왕> 다름없는 권위와 행세를 누렸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소설속의 임꺽정이 영웅이 된다면, 오늘날의 영웅은 <세계는 넓고...>의 김우중이나, <시련은 있어도...>의 정주영 같은 사람이 아닐까?

즉, 지금까지로는, 드는 생각은, 임꺽정을 민중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소설 임꺽정이 아니라 저자 홍명희를 둘러싼 여러 이데올로기적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홍명희가 묘사한 임꺽정은 천하의 장사이자 도둑놈중의 제왕일 뿐이다.

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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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 2005-02-0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양서 새살림 차린후의 행동거지나 8권에 굿구경을 가겠다는 것을 굳이 못가게 하는 장면이나..임꺽정은 민중의 대표라는 이미지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도덕적 윤리기준보다 좀 더 악독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당시 보쌈치기나 어린 아이를 납치했다는 풍속을 기준으로). 개인적으로 청석골과 같은 산채의 자유로움을 부러워 하지만 홍명희 선생의 청석골은 분명 임꺽정의 공화국같은 냄세가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지음, 김경숙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 기본 전제 :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 드러나는 특성 : 남자는 성공지향적이고 여자는 행복지향적이다. 남자는 미래지향적이고 여자는 현재지향적 / 관계 지향적이다. 남자는 역동적 능동적이고 여자는 피동적 수동적이다. 남자는 존경과 신뢰를 받는 기사가 되길 원하고 여자는 보살핌과 존중을 받길 원한다.

* 독후감 1. 어떻게 서양인들의 구체적인 예시들이 하나같이 내게도 공감이 올까? 우리가 이만큼 서양화 되어있단 말인가?

* 2. 많은 공감을 했다. 이상한 동아리의 이상한 여자들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것이라는 최초의 여성관을 가졌던 찬군에게 -_-, 더없이 구체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 3. 화남금녀는 전체적으로 약간의 보수성향을 띄는 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화된 특성들은 충분히 공감할만큼 구체적이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좀 더 알게 된 느낌이다.

* 4. 노자에 나오는 추상적 개념의 여성적 힘, 세상을 구원하는 힘, 에 대한 약간의 구체적인 꼬투리를 잡은 느낌이다. 실제 관계개선에 관한 구체적 처방들은 지루했지만, 문제의식에 있어서만큼은 획기적이고 감동적이었다.

* 5. 지구를 구하는 법에 대해서 연구중이다. 종종 나는 <여성적 힘>이 우주를 구한다는 따우의 흰소리를 하고 다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적 힘이 남성적 힘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는거다. 불완전한 음과 양은 둘이 서로 도와줘야 하는거다. 결론은, 우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장가를 잘 가야 한다.

찬별.

* p-1
현재로서, 이 음과양의 조화가 가장 구체적으로 보였던 것은 김소진형의 소설들이었다. 신풍근 베이커리 약사, 굶주린 시위학생들에게 찐빵을 먹이려던 신풍근씨가 전경에게 막혀서 들어가지 못하자, 대신 전경들에게 찐빵을 먹이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던 기억이 난다. 젊고 따뜻한 사람을 일찍 데려간 하늘이 아쉬울 뿐이다.

* p-2.
자취를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은. 정균형과 상원형의 글을 읽으면서였던 듯.

* p-3.
화남금녀에서 인상에 남은 구절중 하나는 ; Never argue.
토론은 좋되 논쟁은 안된다, 가 아니라 절대로 그런 거 하지 마라, 라는 맥락. (사실 영어로 대강 읽어서 조금 불확실하다만)
그러고보면 논리라는 거 참 못나기 짝이 없는거다. 나는 오년전의 나에 비해서 분명히 글로 표현하는 논리빨이 강해졌지만, 그러나 그래서 결론은? 하고 묻는다면 결국 똑같다. 결론을 정해놓고 논리는 거기다가 맞추는 것일 뿐이니.
가령 오년전의 나는 내가 느끼던 것에다가 노자의 현현지덕 같은 것을 가져다붙일 재주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오년전에 정균형 상원형의 글에서 읽은 느낌과 지금 내가 떠드는 소리사이에서 실질적인 간극은 얼마 없지 않은가. 오년전 무의식적으로 묘사한 흰도리는, 찬별이는, 모두 다 남자이되 여성적인 놈들 아니었던가.

* p-4
통신에서 혹은 지면에서 벌어지는 토론에서도, 누가 승복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결론은 감정으로 정해놓고, 논리라는 룰을 흉내내는 것일 뿐. 강준만씨가 그 대표라고 느껴진다. 김지하씨가 <내 사상의 전향은 한번도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적이 없다> 라는건 절반쯤 어거지로 들리지만 그러나 많이 공감이 되는 말이다.

* p-5
논리적 = 남성적 = 이성적. 도구적 이성이 인간의 특질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남성 본위의 사고가 깔려져 있다. 내가 좀 더 자유롭게 배우고 자라났다면, 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마누라와 새끼들을 먹이는데 내 모든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일종의 성공증후군 시간관리 증후군에 걸려있으므로, 돈사태에 깔리더라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 p-6
어제 마신 술 맥주 다섯병. 오늘 맥주 한 캔 + 데킬라 한 잔.
캐나다와서 여지껏 마신 술보다 더 많은 술을 이틀동안 마셨다. -_-

* p-7
정치.사회적인 힘은 기본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이라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남녀평등에 있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울러 여성의 사회활동도 당연한 것이지만, 요즘의 내 머릿속으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내 논리속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 써놓고 나니 굉장한 구닥다리가 되는 듯 한데. 실은 나도 사회활동 같은 거 별로 하고싶지 않다. 신문에서 만화와 문화와 까십란 이외의 란을 읽은 지는 오년이 넘었다. 나는 사회활동 말고, 나홀로 군자 같은 거 하고 싶다. 숙녀가 곁에 있어주어도 좋다.

* p-8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들어있는 - 노자의 유토피아. 변화없이 멈추어있고 고립되어 사회적 활동 없는 삶. 거기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고 (호랑이나 늑대 같은 놈들만 조심한다면). 내 공상속에서 이 노자의 유토피아야말로 여성적 힘으로 만들어낸 행복한 세상의 극치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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