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핀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 욜랭드 모로 외 출연 / 에스와이코마드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영화를 보기 위해 선택할 때 우리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주로 스토리와 배우, 감독을 보고 선택한다고 생각했던 매우 평범한 관객이지만,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순간을 포착하고는 선택과정에 대해서 흥미를 품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머리가 아프고 생각하기 싫을 때 선택하는 영화들은 우선 배우를 고른다. 내 구미에 맞고 영화를 보고 싶은 현재 내가 보고 싶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 아마도 영화를 고르는 것 보다 배우가 나오는 장면을 사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맘에 드는 영화가 없는 예쁜 그림과 맘에 드는 그림으로 채워진 애니메이션을 본다.

  또 심심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때울 때 흥행한 영화, 남들이 봐서 재미있었다는 영화, 뻔한 내용이 아닐 것 같은 스토리의 영화를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으로 된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 나는 예술가가 나오는 영화나, 영화제의 수상작, 또는 흔히 말하는 예술영화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흔치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살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생각도 하기 싫고 머리 아픈 것도 정말 싫은데 이런 영화들을 생각과 마음을 열어서 봐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여유와 시간, 체력까지도 필요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대부분의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8500원이라는 돈을 영화보기에 투자하는 데 드는 선택을 좌우하는 것들이 쉽게 영화흥행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오늘은 영상으로 된 자극이 필요한, 그리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드문 날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 영화 세라핀을 선택했다. 상식이라는 것은 정말 네이버에 있는 상설기사수준인 나에게 이 불운의 화가의 이야기는 생소했고, 그래서 더 영화에 푹 빠져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검은 밤 물가에서 더듬는 손에서 성당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성가를 부르는 저 못생긴 중년아줌마로 화면이 바뀌는데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 뚱뚱한 여자는 뭐지?  하지만 이 여배우의 홀린 저 모습은 이 배우와 영화가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 줄 정도로 강렬했다.

 

 

 

   세라핀은 자연을 사랑한다. 나무에 올라가서 바람을 자연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세라핀은 하늘의 계시로 그림을 그린다.

 

 

  그녀의 이 진지하고 광기에 휩싸인 표정을 보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세라핀은 더이상 남의 집 빨래와 청소를 나는 가정부가 아니다. 그녀는 어느 예술가보다 더 큰 예술혼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이며,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예술가이다.

 

 

 그런 그녀의 예술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아트 딜러 '우데'를 만난다. 그는 그녀의 예술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정원 밖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는 그림에 정진하여 위대한 예술가가 되라고 격려한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인인 우데독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상피르를 떠나야 한다. 눈 덮힌 우데의 집에서 텅빈 의자가 우데의 부재를 보여 준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상피르로 돌아 온 우데는 조그만 나무판에 습작을 하던 세라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림에 정진하여 예술가가 되어있음을 알고 기쁨에 휩싸인다. 상피르의 사람들에게도 그녀의 예술성이 알려지고 우데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전시회를 준비하는 세라핀. 늙고 힘이 없는 몸이 될때까지도 남의 집 빨래와 가정일을 하면서 힘들게 그림을 그리던 세라핀에게도 이제 따뜻한 봄날이 온 것일까?

 

 그녀의 방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성공은 그녀를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고, 아마도 자신을 지탱해 온 예술에 대한 광기가 갈 곳을 잃은 채 그녀의 정신을 휩싸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상피르의 세라핀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이다. 정신병원 앞에 있는 큰 나래로 다가가 앉는 세라핀의 모습은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예술적 영감과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영화 내내 생각한 것은 '역시 이 아줌마(욜랭드 모로) 정말 연기 잘 하는데!' 였다. 욜랭드 여사는 광기와 순수를 오가며 뚱뚱하고 비루한 몸을 통해서 세라핀이라는 예술가를 생생하게 연기하였다. 정말 멋진 연기는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몰입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다시금 생각하게끔 하는 연기였다.(외모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야 하는 이 땅의 배우들이 보면 더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까?)

 

또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여 줄 수 있는 소통이 뭔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전문적 지식은 잘 모르고 생소하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영화 속에서의 관객에게 상상을 줄 여지와 멋진 화면을 부여하며,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매우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생각들을 엮어 내는 솜씨가 멋졌다. 영화 내내 들리는 자연의 소리와 화면들, 적절한 이야기의 흐름과 음악들이 영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솔직히 이 영화에 더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예술가의 삶을 경외하는 마음이 깊게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남의 집 바닥을 박박문지르고, 지저분하고 형편없는 옷차림을 한 뚱뚱하고 볼품없는 세라핀의 모습에서 현실 속에서 늘 넘어지고 타협해가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는 세라핀은 그림이라는 예술에서 삶의 가치를 얻고 빛나는 행복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드넓은 풀밭에서 혼자 예술혼에 깊이 빠져 있는 세라핀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비앙 로즈 - La Vie en ro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제 에디뜨 피아프의 인생을 담은 장미빛 인생을 보았다.

 

  보게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한 데 최정원씨의 연극 에디트 피아프를 보러 가려고 했다가

 시간이 오버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김에 영화라도 봐두어야 겠다며 영화시청 시작!

 

 

   영화를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는 고아나 다름없는 피아프의 어릴적 모습이 나오는 데 그 장면에서

 가난 한 거리에 앉아 있는 어린 피아프의 장면은 카메라가 비루한 거리의 모습과 불쌍한 피아프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어중간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첫 인상인 첫 장면을 중요하게 보는 관객인 나는 왠지 불안한 출발인것 같았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조목조목 잘려서 퀄트 이불처럼 짜 맞쳐 만들어진 장면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호하게 나타나서 이야기 전체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며 (특히 피아프의 인생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관객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엉거주춤 바의 구석 끝에 앉아서 감독의 애매한 여가수에 대한 열정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감독은 매우 유명한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관객들에게 지겹지 않고 새롭게 보여주려고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잘려진 장면들이 이어붙여지는 과정이 하나의 작품의 완성이 아닌 어둠 속에서 장면들이 우춤주춤하며

  이어 붙여진 것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영화의 이론적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그럼 공부를 해! 감독의 예술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감독이 의도한 연출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끝까지 나같은 평범한 관객에게 와 닿지 못했다는 것이 정답이겠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아니야, 후회하지 않아]를 연기하는 마리온 꼬띨라르를 보며, 아 이 장면을 감출려고 감독은 조각이불을 난도질했구나 싶었다. 그만큼 피아프의 인생 속에 묻어 있는 외로움, 무대에 대한 열정, 사랑들에 대한 것등 그녀의 삶의 모든 것이 마지막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통해서 늙고 병든 몸으로 무대에 서서 인생을 담아 노래하는 그녀로 표현되었다. 마지막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영화를 떠날 수 있게 하는 여배우의 힘에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 노래를 몇번씩 반복해 들으면서 에디트 피아프의 후회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열정적 삶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에 잠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스트릭트 9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닐 블롬캄프 감독, 샬토 코플리 출연, 피터 잭슨 / 소니픽쳐스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외계인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ET, 우주 괴물, 괴생명체, 빛 속에 나타난 신비로운 생명체, 우리의 과학과 이성을 초월한 존재 등
  지금까지 너무나 다양한 외계인에 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우리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1. 외계인에 대한 상상력을 배제하고, 그들과의 담론을 통해서 우리를 비추어 보다.
 
(여기서 그들은 외계인이자 우리와 다른 보잘것 없는 존재들이라고 해도 좋다.)
 
    어떤 때는 그들을 통해서 공포를 느끼고 (에일리언 시리즈, 프레데터 시리즈 등) 외계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ET, 콘택트 등 스필버그 사단에 의해 유명해진 감각), 외계인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외계인인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들과 만났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에서 감독은 외계인이 가지고 있는 속성, 외계존재로써의 상상력을 배제하고
외계인과 지구인이라는 담론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외계인은 신비로운 모습으로 감춰져 있지 않으며, 영화내내 그 모습은 생생하게 비춰진다.
우리를 엄청난 공포로 몰아넣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지 않으며, 새로운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외형으로 쓰레기를 뒤져
아무것이나 먹어되며, 폭력적이고 무질서하다.
  
 지구인들은 그들을 혐오하고 역겨워하며,
 야만적으로 사는 하층종족인 프라운(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부르며 억압한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지구에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의 삶을 다큐멘터리형식으로
사실적으로 보며주면서, 우리가 그들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서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지구 행성의 인간들은 위선적이며 폭력적이다.
 
 
  외계인이 살고 있는 디스트릭트 9 지역의 입구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외계인과 지구인의 조형물은
우리의 위선적인 모습을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조형물, 외계인 금지와 같은 여러 가지 디테일한 묘사들은 감독의 의도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영화초반 외계인들을 디스트릭트 9에서 도심에서 200km 떨어진 외딴 곳으로 집단 이주를 걸정한 인간들,
비쿠스는 이런 이주과정을 담당하는 MNU에서 일하며, 이주과정의 책임자를 맡게 된다.
 
 
 인간들은 외계인들을 무력으로 무참하게 진압하는데, 비쿠스가 외계인의 알을 제거하며,
기뻐하는 모습이나 그들의 생명을 쉽게 빼앗는 모습은 그들에게 아무런 죄책감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구인이 아니라 징그럽고 협오스러운 프라운들이 아닌가!
 
  MNU는 외계인들을 보다 좋은 곳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그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위선을 떨고 있지만
실상은 외계인의 무기를 빼앗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이주를 계획하고 진행시킨다.
(비쿠스가 외계인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돌아가는 차에서 감독은
'외계인에게 친절해야 합니다.'라는 방송을 들려주며 이런 모습을 조롱한다)
 
#3. 지구행성의 인간들은 탐욕적이고 잔혹하다. 
 
  외게인을 탄압했던 비쿠스는 외계 물질에 노출되어 외계인으로 변해가고,
이에 외계인들만 다룰 수 있는 외계 무기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는
열쇠로써 인간들은 그를 생체실험하여 그의 모든 것을 조사하려고 한다.
 
 
  그의 생체 실험을 결정하는 사람이 그의 장인이며, 그의 생물학적 가치에 대해 담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우며,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아무도 그를 치료하거나 인간으로써 존중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사실 그가 외계인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생물학적 가치가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인간의 폭력성이 탐욕성에 기반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외계인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외계인의 고기를 먹는 갱들은 외계인으로 변해가는 비쿠스의 팔을 먹음으로써
외계무기의 힘을 이용하려고 한다.
 
#3. 지구행성의 인간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외계인이 되어가는 비쿠스는 결국 디스트릭트 9으로 숨어 들어와 자신이 강압적으로 이주시키려 했던
외계인 부자(크리스토퍼 존슨, 얼마나 인간적인 이름인지!)를 다시 만나 자신을 숨겨 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런 모습은 매우 뻔뻔하다.
 
 또한 비쿠스는 그를 통해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걸고, MNU 사무실을 습격해서
힘들게 외계물질을 탄환하지만, 그가 생체실험당하는 외계동포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며
모행성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크리스토퍼를 때려 눕히고 혼자 비행선을 이륙시켜 도망가다가 추락하고 만다.
 
 
 
차에 갇혀서 어린 아들을 걱정하는 크리스토퍼는 외계인이지만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4. 지구행성의 인간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일까?
 
 앞에서 이야기한 잔인하게 폭력적이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은 평범한 비쿠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비쿠스는 합법이라는 위선으로 잔인하게 외계인을 죽이고, 그들의 집과 무기를 빼앗으며 기뻐한다.
또한 그런 짓을 하고도 디스트릭트 9으로 돌아와 크리스토퍼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가 동포를 돕겠다는 말에 욱해서 그를 버리고 비행선으로 탈출한다.
 
 하지만 영화 초반에 겁쟁이같은 모습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쿠스는 외계인으로 변모함과 동시에 인간적으로 성숙되어 간다.
(감독의 친구로 단편영화에도 출연했던 살토 코플리라는 배우은 사실적으로 그 변화과정을 잘 연기한다.)
결국 크리스토퍼가 죽음을 당하려는 순간에 그를 구하고,
아들과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목숨을 걸고 그를 탈출시킨다.
 
 
 감독은 영화 전반을 통해서 비쿠스에 대한 객관적 시선과 이후 MNU의 비리를 밝히려는 관계자들,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쓰레기로 만든 꽃을 버리지 못하는 비쿠스의 아내를 통해서
희망을 기대하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00일의 썸머 - 아웃케이스 없음
마크 웹 감독, 조셉 고든 레빗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썸머와 함께한 500일을 통해서 주인공인 톰은 사랑을 느끼고,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조금씩 변화해 간다.
  다양한 카드의 문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톰은 회사에 새로 온 썸머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고, 특별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썸머와 함께하는 일상은 그에게 행복 그 자체이다.
 

 

 그러나 썸머와 톰의 연애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기만 한데, 그것은 톰의 분명하고 확실한 감정에 비해

썸머는 관계를 규정짓기 싫어하거나 거리를 두려고만 한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다가갈 때마다 상처 받는 톰, 점점 벌어지는 그들의 관계는 그녀와 함께한 일수들이
쌓여갈수록 위태로워 진다.
 
 친구로 남자는 썸머의 말은 톰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된다. 사랑을 믿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 톰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버리려고 한다.
그들이 만나고 헤어진지 470여일이 지난 어느날 톰이 좋아하던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썸머를 만난다.
톰은 아직도 그녀 때문에 아프고 상처 받았지만 사랑을 믿지않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싫어 했던 썸머는
벌써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네가 옳았다고. 사랑은 존재한다" 면서 자신이
우연을 통해서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썸머와 헤어진 지 500일째 톰은 새로운 사랑을 용기내어 시도해 본다.
 
 각각 남남인 여성과 남성이 만나서 사랑하기 까지는 노력 이상의 운명이라는 요소가 있는걸까?
물론 그 남녀의 매력과 취미와 생활습관 등 연애를 관통하는 요소들은 많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다가 오는 특별한 감정이 서로가 동시에 느낄 때만
그것이 하나의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우티풀 - Biutifu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하비에르 바르댐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조화는 이 둘 중에 한명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 둘의 궁합이 무척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험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통과 절망의 삶을 보여주지만

 

바르뎀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영화 내내 삶에서의 안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허름한 아파트,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 희망을 가질 수도 없고, 벗어 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처럼 우울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들의 삶에는 가족도 친구도 인생도 있다.

 

그렇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오늘을 내일을 살아야 하는 인생이 있다. 그래서

 

적어도 음울하고 힘겨워보여도 주인공은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죽은 자를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를 매개로 한 죽은 자와 산자, 아프리카인, 중국인과, 경찰, 갱과 건설업자들...

 

그는 중간자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이용하며 살아왔으며, 그의 삶도 역시 비루하고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그는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그럴수록

 

삶은 더욱 꼬이기까지 한다. 공장 지하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자신이 사준 히터때문에 떼죽음을 당하고, 아프리카인은 고향으로 쫓겨가며,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간 부인은 아들을 학대한다.

 

나라면 이 상황에서 나의 안식과 죽음을 바라볼 용기 조차도 가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한다.

 

정서불안으로 형과 잠자리를 하는 부인을 어루만지며 오히려 자신의 용서를 빌고, 추방당한 아프리카인의

가족을 돌보려고 애써 본다. 아이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인 친구의 부인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주며

부탁해 본다.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하지만 그 마저도 돈을 들고 떠나 버린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그녀를 밤늦게 까지 아픈 몸으로 기다리는데... 그에게 보이는 건 죽음을 맞이한 그들의 영혼.

 

아~! 그에게 안식은 찾아 올 수도 없다. 그래도 딸아이에게 얼굴도 본 적없는 할아버지의 반지를 건네며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에게 안식은 찾아 온 걸까?

그의 노력은 아무것도 이루어 지지도 해결되어 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삶에서 안식은 찾아 온 것같다.

그는 생을 버리지도 않았고, 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것을 가져도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ㅜ.ㅜ 결국 가지지 못한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 불행과 절망이 삶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보아야 하는 것은 생의 이면에 있는 또다른 진실,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인간성임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