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깊은 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5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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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을 전에 하나도 안읽었다는게 신기하였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의 작품을 훑어보았는데, 하나도 안읽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익숙함과 친숙함이 느껴졌다.

작가의 말대로 '당시 이나라 백성 모두가 하루 세끼 밥 먹기도 힘들었던 때였지만, 지금와서 "마당깊은 집"시절을 돌이켜 보면 우리 식구는 물론이고, 가난한 이웃들이 이른 봄 들녁의 엄동을 넘긴 보리처럼 안쓰럽고 풋풋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 이웃들을 떠올리며 가난은 절망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는 길로, 마당이 깊었던 집의 남루한 삶은 언젠가 언덕위의 집처럼 푸른 하늘과 더 가까이 살고 싶은 사람들의 꿈이 서렸던 집으로 그리고 싶'어 지는 듯 하다.

자전적 소설에서 보여지는 친숙함 외에도 가난함은 남루하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 빈곤할 것도 없다고 기억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나에게도 가난은 늘 곁에 있었다. 마을길을 벗어나 아이스크림 통을 멘 고학생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다 녹아가는 아이스케키 한번 빨아먹어보았으면 하는 기대로 지냈던 것 하며, 세끼 밥을 먹기 힘들어서 한끼는 한사발의 밥을 끓여서 온 가족이 나누어 먹었던 시절, 그리고 추위에 옹그리고 자고 일어나 김이 허옇게 나오는 방안에서 떨었던 기억 등등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십년정도의 연배차이에서 느껴지는 사회적인 경험들이 비교적 리얼한 추체험을 가져오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의 현존성을 추억속에서 객관화하였다는 평가는 잘 어울린다.

세월이 흘러 이젠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따뜻한 곳에서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으며 지내는 우리가 가난을 짐지기 싫어하는 무엇일까? 가난이 실패자의 표상인듯 해서인가? 아님 정신적 여유까지도 몰아내는 것으로 확장해석하게 되기때문일까?  주인공의 엄마가 짐지우는 부담감(대리남편, 가장 등)을 성년이 된 주인공이 다 내려놓지 못했던 이유를 심리적 억압을 해소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본다면 빈곤한 유년시절이 우리에게 준 가난의 이미지는 무엇으로 그릴 수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리 저리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한 이틀에 걸쳐 보았다. 빈곤이 더덕더덕 묻어있음에도 가난하지 않은 추억, 그 삶의 추억으로 인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음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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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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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는 내가 읽은 코엘료의 소설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스토리로 남아 있다.추억할 수 있는 유년기의 만남과 그 존재들이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상대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너무도 흔한 소재를 가지고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게 채색할 수 있는지...' 사랑이란 소재는 가장 진부하고 낡았으면서도 여전히 후레쉬한 인상을 풍기면서 영속성을 자랑하는 듯 하다.

신앙과 에로스란 매우 충돌적인 가치가 만나 화해하고 더불어 상생하며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도 멋있었지만,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단편을 재음미해 보는 맛도 좋았다. 그동안 아름다운 머리빗과 시게줄이란 선물을 통해 가난한 연인들의 아름다운 선물로 둘이 열심히 절약하며 살고 또 세월이 흐르면 머리는 자라나는 것이니까, 선물을 잘 간수하면, 또 한번 감격을 느끼게 되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을 언뜻 하고 말았다. 물질적 가치외에는 별로 깊이 각인된 게 없었다. 한데 소설 속에서 재인용된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니 그 선물들 속에는 전적인 자기희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었다. 필라의 여섯째날, 혹은 일곱째 날에 겪었을 상황들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 느낌,

필라의 울음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소설의 앞뒤를 서너번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별을 통한 종결이 아니라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해피엔딩이 이루어지면서 그 자취는 또 다른 출발점이 됨을 느꼈다. 아마도 이 울음과 강물에 섞여 흘러갔을 눈물이 없었더라면, 코엘료의 소설같은 생각이 안들었을 것 같았다.

지리책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피에트라 강가는 역시 우리 지도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 유년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던 동네 개울 혹은 실개천이어도 상관없을 듯 하다. 꿈과 삶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기만 하다면, 그런데도 책을 닫으면서 보랏빛 향기를 띤 푸른 강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낭만적 분위기에 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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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
권명아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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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가족주의란 혈연중심의 이기적 심정으로 타파해야할 유산으로 생각되었다. 내 가족 내 집의 울타리를 먼저 생각하다보면 타자에 대한 높은 울타리를 치게 되고 논리성이라든지 합리적인 사고의 틀을 무시하는 원초적 본능으로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 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이런 생각을 토대로 7,80년대를 거침없이 살아왔다. 매사에 가족보다는 이웃과 사회를 먼저 생각한다며 자식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왔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배운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회에의 기여도가 전혀없이 곳곳에서 이기적인 집단들과 울타리들을 만나며 상처를 입고 자기 방어을 하기 시작한지 꽤 되었다. 하지만 가족의 울타리도 제대로 치지 못한 어줍잖은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을 접기가 어려웠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오랫동안 괜찮다는 직장에서 맞벌이를 했으면서도 남들보다 십년은 더디게 집장만을 겨우 하였고, 자녀들을 위해서나 노후를 위한 적립을 제대로 못하여 늘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인생의 중반기에 들어서서 이런 나를 들여다 보면서 가족로망스를 부정하는 근대의 이야기나 서사를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 하는 회의를 많이 하였다. 내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가족을 향한 눈을 떼지않고 휴일이면 가족끼리 여행하고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이 내심부러워 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여러 작가들의 소설을 바탕으로 가족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읽는 맛이 여러 가지로 났다. 소설 속에서 들여다 보는 가족이란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밝히고 실체에 접근해가는 저자의 관점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늦은 헌신과 충성(?)을 생각하는 중이다. 따뜻함이 필요할 때 돌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것이 꼭 가족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못하지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오목이에게 내일을 여는 집의 가정을 주는 일이 여의치 않음은 부모된 자로서 내가 자기검증없이 가담한 가족이기주의 비판으로 내 자식에게 지운 짐의 무게 속에서 발견하게 될까 저으기 두렵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내일을 여는 집에서 발견되는 희망에 별로 긍정적인 것 같지도 않다만, 가족에 기대는 신화나 신비의 껍질을 죄다 벗기어 버린다 해도 기대고 싶은 언덕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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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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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울타리가 무너져 버리는 듯 하다. 분화와 해체의 저편을 넘어서면 통합과 총체성이 있는 듯 소설과 만화 음악과 미술 그리고 영화 등이 모두 종합적인 양상을 보이면서 서로의 경계들을 넘나드는 듯 하다. 만화를 토대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리얼리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외면하지않고 볼 수 있는 것은 만화의 구성이 복잡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코엘료의 소설은 단순한 구성과 설명없는 반전을 기본틀로 갖고 있어서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쉽게 얇은 쪽수를 넘기면서도 인간 본연의 문제 혹은 철학과 사색을 할 수 있는 주제와 만나기 때문에 무거움을 갖게된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터치하기 - 이것이 코엘료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내가 만일 샹탈 프랭이었다면, 나는 어디까지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베르타 할머니를 구하는 것까지가 아니었을까? 그다음에 금을 차지하게 되고 부를 창출하여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방법은 지금껏 살아오고 선택했던 삶의 방법과는 매우 동떨어져 이방인에게 요구하지도 혹 요구를 해왔어도 외면했을 듯 하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이방인을 지금까지의 방법처럼 꼬드겨서 금을 갖고 도망치는 것이 일관성을 지닐듯하다.

내가 만일 베르타였다면, 죽은자 그리고 자연과 말하고 교감하는 영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마을의 지도자였으며 사건을 휘몰고간 신부와 능동적인 대면을 했을 것이다. 늙어서 육체적 힘은 없지만, 영성은 가득차있는 인물이, 자신의 영성이 악마를 알아보고 마을에 닥친 위험을 식별하는 것으로만 끝이나, 그외에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는 노인에 불과하다면,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영성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이겠는가? 삶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반대편인 죽음과도 늘 함께한 삶이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아닌 희생물로 겁에 질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는 대단히 서구적인 생각이 아닌지, 삶은 죽음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아무튼 소설의 실마리를 여는 인물이 뒤에 가서는 별 쓸모없는 늙은이로 그려지는 게 불만이었다.

베스코스라는 한촌의 경우도 매우 특이한 곳이다.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이미 죽어가는 곳이라는 뜻이 아닌가. 무기력하고 일상적으로 안정된 습관들로 인하여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도 똑같은 일상이 지배할 그곳은 선도 악도 질식할 것 같은 곳이다.그런데도 정치권력과 부와 종교권력의 부활을 꿈꾸는 자들이 존재한다. 좀 상상이 안가는 곳이었다.

코엘료의 소설을 몇권 읽다보니 그의 단순 명료한 스토리전개와 꿈꾸는 사색이 있는 소설이 지니는 한계점이 보여진 것인지...' 선과 악이란 손과 손바닥같은 하나이면서 둘인 존재에 대해 목숨을 걸고 일주일이란 짧은 기간동안 철저히 대면하게 된다는 것은 작가의 말대로 충분한 것인지, 아마도 풀어놓으면 사건같지도 않을 우리들의 일평생의 삶이 되는 것인지, 나 편한대로 갖고있는 종교관과 행위의 일관성없음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지금부터 생각의 꼬리를 잡아보아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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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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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 역사 등 인문학적 소양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제 비로소 책읽기에 들어선 내 아들은 코엘료의 '연금술사'야 말로 현재의 자기내면을 가장 잘 말해주는 정말 좋은 책이라고 어서 읽으라고 권하였다.

구입은 내가 했지만, 읽기는 아들이 먼저 마쳤고 나는 전공서적들을 뒤적이다가 늦으막히 읽어보았다. 동화같은 느낌, 그렇다고 어린왕자와는 느낌이 다르고 꽃들에게 희망을 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참 다르다. 만물정령사상(Animism)을 밑에다 깔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순화로운 접촉이 눈에 띄며 연금술사를 통해서 자아를 찾아가는 양치기 산티아고의 이집트 여행은 뭐랄까 만화적인 요소가 무척 많이 눈에 띄었다. 단순성과 심리묘사가 거의 절제된 채로 사막이나 바람, 해와 같은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 자아의 신화를 완성해가고, 그런 여정을 알려주는 작은 표지들은 사막의 뱀이나 풍뎅이 점쟁이의 예언, 양과의 무언의 대화속에서 꿈꾸는 반복적인 몽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짧은 대화와 글속에서도 주옥같은 아포리즘이 줄줄이 박혀있다. 만화나 동화와는 매우 이질적인 요소이다.

일상사에 빠져있다는 의미는 반복을 통해 얻는 익숙함과 안정감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 안정감이란 소홀히 해도되는 요소는 분명 아니다. 사회를 지속시키고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갈 가치나 이유를 찾게 만드는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상사는 우리가 꿈꾸었던 것들을 접고서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시말해 안정감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지루함과 권태를 몰고온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로운 여정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권태를 물리치며 현재의 자신을 재해석하는 작업과 상충되는 것일까? 정말 모험만이 가치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산티아고는 재화를 찾아 그를 기다리는 여인에게로 돌아간다고 해서 자아를 정확하게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소설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분명 성공인데 마치 영화의 해피엔딩처럼 리얼리티가 부족해 보인다. 만일 그의 후반부의 인생을 그린다면? 이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실현된 자아는 이미 일상을 이루는 익숙한 상이되었으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에 산티아고의 삶은 젊은 시절 누렸던 꿈과 자아를 다시 발견하고자 원할 것이다. 자아란 분명 고정된 것이 아니며 유동적이고 발전적인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잡아두는 매력이 많은 작품이다. 많은 독자들이 남긴 독후감을 보더라도 많이 읽혀지는 책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난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간결한 구성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하는 아포리즘이 인상적이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리얼리티를 반영한 아포리즘을 쏟아놓고 있다면, 이 책은 종교나 철학쪽에 가까운 순수성을 확보하고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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