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세상은 울타리가 무너져 버리는 듯 하다. 분화와 해체의 저편을 넘어서면 통합과 총체성이 있는 듯 소설과 만화 음악과 미술 그리고 영화 등이 모두 종합적인 양상을 보이면서 서로의 경계들을 넘나드는 듯 하다. 만화를 토대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리얼리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외면하지않고 볼 수 있는 것은 만화의 구성이 복잡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코엘료의 소설은 단순한 구성과 설명없는 반전을 기본틀로 갖고 있어서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쉽게 얇은 쪽수를 넘기면서도 인간 본연의 문제 혹은 철학과 사색을 할 수 있는 주제와 만나기 때문에 무거움을 갖게된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터치하기 - 이것이 코엘료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내가 만일 샹탈 프랭이었다면, 나는 어디까지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베르타 할머니를 구하는 것까지가 아니었을까? 그다음에 금을 차지하게 되고 부를 창출하여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방법은 지금껏 살아오고 선택했던 삶의 방법과는 매우 동떨어져 이방인에게 요구하지도 혹 요구를 해왔어도 외면했을 듯 하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이방인을 지금까지의 방법처럼 꼬드겨서 금을 갖고 도망치는 것이 일관성을 지닐듯하다.

내가 만일 베르타였다면, 죽은자 그리고 자연과 말하고 교감하는 영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마을의 지도자였으며 사건을 휘몰고간 신부와 능동적인 대면을 했을 것이다. 늙어서 육체적 힘은 없지만, 영성은 가득차있는 인물이, 자신의 영성이 악마를 알아보고 마을에 닥친 위험을 식별하는 것으로만 끝이나, 그외에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는 노인에 불과하다면,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영성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이겠는가? 삶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반대편인 죽음과도 늘 함께한 삶이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아닌 희생물로 겁에 질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는 대단히 서구적인 생각이 아닌지, 삶은 죽음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아무튼 소설의 실마리를 여는 인물이 뒤에 가서는 별 쓸모없는 늙은이로 그려지는 게 불만이었다.

베스코스라는 한촌의 경우도 매우 특이한 곳이다.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이미 죽어가는 곳이라는 뜻이 아닌가. 무기력하고 일상적으로 안정된 습관들로 인하여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도 똑같은 일상이 지배할 그곳은 선도 악도 질식할 것 같은 곳이다.그런데도 정치권력과 부와 종교권력의 부활을 꿈꾸는 자들이 존재한다. 좀 상상이 안가는 곳이었다.

코엘료의 소설을 몇권 읽다보니 그의 단순 명료한 스토리전개와 꿈꾸는 사색이 있는 소설이 지니는 한계점이 보여진 것인지...' 선과 악이란 손과 손바닥같은 하나이면서 둘인 존재에 대해 목숨을 걸고 일주일이란 짧은 기간동안 철저히 대면하게 된다는 것은 작가의 말대로 충분한 것인지, 아마도 풀어놓으면 사건같지도 않을 우리들의 일평생의 삶이 되는 것인지, 나 편한대로 갖고있는 종교관과 행위의 일관성없음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지금부터 생각의 꼬리를 잡아보아야 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