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온의 징후때문인지, 방학 초반에 무척 더워서 고생깨나 하였다. 지구의 온난화가 걱정되기 보다는 에어컨을 사야할지 말지를 놓고서 심각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몸을 편안하게 쉬면서 되도록 영적인 각성을 많이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건마는, 새벽기도는 며칠 나가보지도 못하고 몸이 일어나지지 않는다는 구실로 슬그머니 주저앉고 말았다. 연수를 안하는 것이 편안하기도 하고, 되도록 눈이 빠지도록 책을 읽지 않으려고 책조차도 슬그머니 밀어놓고서 되도록 이런 저런 교과서와 아이들과의 수업에만 충실해지려는 정도의 노력을, 최소한의 노력이랄 것을 하면서 쉽게 하루를 보냈다.

  학기초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기실 앉아서 하는 작업들을 이젠 곧잘 하게 되는 걸 보면 많이 좋아진게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도 허리가 뻐근하고 좋아하는 여행도 답사도 다 생략하고 되도록 몸을 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의 기록은 다리의 신경줄때문에 고생을 했던 흔적은 있으나 일상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는 별다른 불편을 못느낀 듯 싶다.

  지금은 수업외의 시간은 여교사 휴게실에서 딴딴한 곳에 누워 책을 좀 보고 쉬고 혹은 오수를 즐기기도 하면서 보내고 있다. 올 한해를 이렇게 보내면 씻은 듯이는 아니라도 좋아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면서... 긍정의 힘을 믿고 날마다 천번의 감사를 하면서 살고자 애씀에도 걱정이나 불안은 얼마나 영향력이 큰 마이너스인지... 얕은 긍정과 헐거움으로 비척대는 때가 너무 많다. 그래도이만큼의 삶을 살 수 있음에도 감사하게 되고 늘 넘치는 은혜를 느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편안함과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시기도 인생에 몇번이나 있으랴 기꺼워하면서 ...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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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박스 세트 - 전2권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신윤복의 가계를 추리하여 4대째 도화서의 화공으로 머무는 필력있는 집안과 이재에 밝은 부(父) 신한평, 헌신과 희생을 일삼으며, 동생을 위해 사화서로 가서 색을 창조하는 형 영복 그리고 천재화가 신윤복을 설명함

- 김홍도와 신윤복을 천재끼리의 갈등을 넘어선 대결과 사랑의(혹 애증의) 구도로 잡아가면서, 윤복을 위에다 올려놓으려니까 빚어지는 문제, ‘주사거배’에 대한 설명과 한낮의 술타령, 그에 대한 정풍이라? 이건 무슨 현대판 숙정작업인가?

- 도화서의 틀과 정형성은 왜 비판 받아야 하는가? 도화서 출신의 김홍도와 신윤복이 풍속화를 그릴 수 있었음은 도화서가 품고 있는 잠재력과 시대의 반영이다.

- 당파싸움으로 찌든 상황으로 시대적 배경을 삼고 있음. 그런데 영․정시대라니...?

- ‘유곽쟁웅’에 대한 설명 역시 탈역사적임. 사내들이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익숙한 싸움, 마치 명예를 건 싸움이라고 하지만 기생집에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특히 점잖은 문인 양반이 기생집을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 오늘날 요정정치를 하듯 기생정치를 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

- 정조가 신윤복과 김홍도를 데리고 벌인 어진화사와 그림을 찢는 행위, 그리고 출원을 막지 못하면서 거리의 화원이 되라는 당부 등

<2권>
- 사화서 : 신한평과 윤복의 관계(김홍도의 친구 서징의 자식 - 그림자놀이)
시전상인 김조년의 문하에서 (연소답청, 주유청강)
계속되는 화사대결(김홍도의 빨래터, 계변가화)
- 비밀의 그림 : 복초지 기술 - 초지의 결을 바꿔서 2겹을 바르는게 보통이나 얇은 것은 3-4겹 가능
(김홍도의 그림감상), 살인자의 얼굴 합치기, 장헌세자의 초상
- 달빛의 여인 (월하정인-포도군관, 남색끝동(남편이 있음을)과 자주옷고름(자식이 있음)의 흰옷여인, 기녀)
月 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달빛 어스름한 야삼경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알겠지
歡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向後期 보내는 정 아쉽기만 한데 하늘은 밝아오네, 다시금 옷자락 붙잡고 뒷날의 기약묻네 (선조때 김명원)

- 그림의 얼굴(黃猫弄蝶圖-호랑나비, 패랭이꽃 5, 누런고양이) 그림이 글씨를 대신하는 것으로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설명하는 형태를 띠고서.... 그림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근대이건만,
(예)
고양이, 나비|| 묘접은 耄耋(모질)과 음이 비슷 | 고희를 의미, 묘접도→모질도
갈대, 기러기 || 蘆(갈대)雁(기러기)은 老安으로 | 노인의 장수를 축하하는 노안도
포도덩굴(蔓帶) || 만대를 萬代로 해석 | 자손만대
버드나무, 오리 2마리 || 柳를 留로, 鴨의 파자 甲 |장원급제의 행운이 머무르기를...
모란, 목련, 해당화 || 화중지왕, 玉蘭花, 海棠花  | 富貴玉堂
모란, 장닭|| 닭의 共鳴을 功名으로 | 富貴功名
새우(등이 굽어 바다의 늙은이라) || 海老를 偕老로 | 백년해로
소나무, 불로초 || 新年(소나무)如意(불로초) 용 |신년축하용

- 김조년에게 보내는 신윤복의 도전장(月夜密會, 離婦貪春) - 김조년의 죽음을 예감하게 하는...
- 마지막 대결 : 색을 볼 수 없는 청록색맹(김홍도)와 남자의 심리를 모르는 여인(신윤복)이라...
- “……그림은 색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니 선과 면과 그로써 이루어지는 형태와 먹의 농담과 필법과 기세와 운율과 그 안에 담은 뜻이 모두 합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니 내가 색을 보지 못한다 하나 염려하지 않는다.” (p.184)
- 쟁투 : 씨름도와 검무
- 씨름도 : 동심원 구성으로 구경꾼 배치, 중간의 여백에 씨름꾼을 놓아 시선을 집중, 벗어놓은 발막신과 짚신은 동심원 구도를 완성하는 백미, 오른쪽을 비워놓음으로써 화면의 긴장과 역동성을 화면 밖으로까지 확장, 엿장수의 시선만 밖으로 향함으로써 보는이의 시선을 바깥으로 유도하여 화면을 무한대로 확장 - 안정감과 변격이 팽팽하게 싸움 / 화원의 시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구경꾼의 시각 + 위로 올려다본 씨름꾼의 시각, 화원은 앞쪽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씨름판의 전경을 그리며 구경꾼의 입장이 되어 씨름꾼들을 올려다봄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힘찬 느낌을 줌 / 위쪽에 13명의 구경꾼 아래쪽에 6명을 배치 각양각색의 얼굴모습과 표정으로 다양한 느낌을 주어 왁자한 장터 씨름판의 분위기를 훌륭히 살림 / 누가 이겼는가? 그림을 등진 사람(화면 아래쪽의 두구경꾼의 표정에서, 손이 뒤바뀜) (pp.195-201)
- 쌍검대무도 : 가로 3등분(상 7명, 중 2 검녀 배치, 하 7명), 두 여인이 보여주는 약동성과 색채의 현란함 / 누가? 푸른 치마를 입은 여인이 진 것(몸의 중심이 흐트러짐) / 정중동을 묘파하였으며 여성적이면서도 강렬한 시각적 긴장감을 제공(pp.202-209)

- 무동 신명을 표현하기 위한 힘찬 거침없는 형세, 관절이 꺾이느 srht에서는 머물러 가한 힘을 드러냄. 소년의 곧추세운 발 끝에 모인 힘은 이 그림의 중심이자 시발점이며 모든 힘이 모이는 자리, 소년은 힘껏 하늘로 솟구쳐오를 수 있는 완결성을 보여줌 (pp.244-249)

- 여자인 신윤복의 미인도 살짝 정면에서 방향을 틀어선 앳된 얼굴 둥글고 반듯한 이마, 단정한 실눈썹과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는 맑고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과 작지만 그래서 더 매혹적인 입술을 지닌 단아한 미인, 살짝 들린 얼굴은 수심에 잠긴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복잡한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남긴 윤기나는 머리카락 위의 탐스런 가채는 여인의 당당함을 말해주었다. 보송거리는 왼쪽 귀멑머리는 앳된 순수함을, 귓전의 자줏빛 댕기는 발랄한 젊음을 보여주었다. 옷자락이 짧고 소매가 좁은 삼회장 저고리는 단아한 어깨를 감쌌고,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 치맛자락은 풍성함을 더해주었다. 주름진 치맛자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외씨버선은 금방 돌아설 듯 아슬아슬했다. (pp.244-251)

  재미를 더하는 플롯과 풍부한 풍속화의 내용이 더없는 눈요기 거리이기는 하나 역사성과는 상치되는 곳곳의 소설적 구상에서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형상화된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틀기는 왜곡의 정도를 벗어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 느낌이 들고 신윤복을 여자로 상정하는 작가의 상상력을 놀랍다고 해야 할지 개념이 없다고 해야할지 판단이 안서는 작품이었다. 혹여 사실과 상상을 독자들이 맘대로 넘나들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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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시대의 기록 (전 3권 세트) - 고문의 한국현대사
박원순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3권을 읽어내면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고통과 환경의 빈곤함으로 얻는 고통들에 대해서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한 분노가 차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정부는 또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분노를 양산할게 될까? 마치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야만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고문의 행적가운데, 조선어학회 사건에 기록된 인용을 길지만 들어본다.

-조선어학회사건-형형색색의 고문방법(1942년 9월-10월) (2권 pp.65-70)
조선어학회사건은 1-4차의 검거 단계를 거친다. 한 여학생의 묵은 일기장에서 발견된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한 줄의 기록 때문에 1942년 9월 5일 관련자들이 검거된 것이 1차 검거이다. 이때 검거된 정태진 씨는 경찰의 추궁과 고문으로 말미암아 “교단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체”라는 진술을 했다.
이런 진술을 바탕으로 함경남도 경찰부와 홍원 경찰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간부와 핵심 분자로 지목된 이중화 장지영 한징 이윤제 김윤경 최현배 이희숭 정인승 등을 2차로 검거했고, 3차로 같은 해 10월 21일에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정열모 김법린 이유식 등을 구속했으며, 4차로 12월에 서승효 이인 김양수 이은상 등 8명을 구속했다. 그후에도 33명이 관련자로 발표되었고, 그중 29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했는데, 이희승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고문의 실상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신의 고문 상황을 직접 경험한 대로 진술하고 있으므로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본다.
::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문 중에서 가장 무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몇 가지 소개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비행기 태우기: 그들은 우리 동지 일행을 홍원경찰서 구내에 있는 무덕전에 모아놓고 문초하였다. 이 무덕전이란 것은 그들이 유도와 격검을 연습하던 장소로서 수백 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는 넓은 방이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사람의 두 팔을 등 뒤로 젖혀서 두 손목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함께 동여놓고 두 팔과 등허리 새로 목총을 가로 질러서 꿰어 놓은 다음, 목총의 양끝에 밧줄을 매어 천장에 달아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짚토매(짚단)같은 것을 발밑에 괴어놓고 사람을 천장에 매어 달아놓는다. 그리하여 발을 저며 드디게 한다. 이렇게 하여 놓으면 비록 발밑이 약간 괴어 있을지라도, 우리의 체중으로 인하여 등 뒤로 젖혀진 겨드랑이 아래 궤어 있는 목총이 위로 바짝 치켜지기 때문에 어깨는 뒤로 뒤틀려서 뻐개질 지경으로 된다. 이러할 때의 그 고통이야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도 저희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불지 않으면 짚토매를 발밑에서 빼어 버린다. 그러면 사람은 아주 공중에 떠서 매어 달리게 되고, 매어 달리는 중력 때문에 어깨는 어스러지는 것과 같이 고통의 도가 심하여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닐수록 고통은 극도로 심하여져서 나중에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모양으로 고개가 쳐지고 눈이 감기며 혀를 빼어 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신까지 혼미하여지고 맥박과 호흡까지 점점 약해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고통이고 무엇이고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사상태에 빠지게 되고 만다. 사람의 건강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마는 이렇게 되는 동안이 불과 10분이나 15분밖에 아니 된다. 만약 좀더 고통을 줄 의사가 있으면 처음에 매어 달아놓고는 그넷줄을 꼬아서 그네 탄 사람을 맴을 돌리듯이 천장에 달려 있는 줄을 꼬아서 맴을 돌리는 일도 있었다. …… 이와 같이 비행기를 태우는 것을 그들의 상투어로는 공중전(空中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② 물먹이기: 무덕전에 붙은 옆방에는 목욕실이 있었다. 이것은 저희들이 격검이나 유도를 한 다음 땀을 씻어 버리려고 마련된 목욕실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피의자를 문초할 때에 고문의 장소로도 이 목욕식을 곧잘 이용하는 것이었다. 욕설이나 따귀나 발길질로 기름을 짜다가 저희들의 비위에 틀리게 될라치면 목욕실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기다마한 걸상에다가 사람을 반듯이 젖혀 눕힌다. 마치 갓 죽은 시체를 칠성판 위에 누이듯이. 그러나 고개만은 걸상 끝에서 아래로 처지도록 하여놓는다. 그러고는 사람을 걸상과 함께 몇 맺기 단단히 묶어서 졸라매고 두 팔은 뒤로 젖혀서 걸상 밑에서 맞잡아 매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 꼼짝달싹 운신을 할 수 없게 된다.
다음으로는 다른 녀석이 주전자나 빠께쓰에 물을 담아가지고 걸상 끝에서 처져서 거꾸로 매어 달린 얼굴에다 물을 붓는다. 물은 저절로 콧구멍을 통하여 기관으로 폐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기관으로 물이 흘러들어가면 자연 숨이 막히게 되니까, 그 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콧구멍으로 삼키려고 애를 쓰게된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물이 숨통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한참을 계속하면 목구멍은 목구멍대로 물을 먹어서 배가 뚱뚱하게 되고, 숨통으로는 역시 물이 들어가서 숨이 막히게 된다. 말하자면 기가 막힌다. 우리가 기막힌다는 말을 흔히 쓰지마는 그러한 기막힐 정도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기가 막혀서 숨을 통할 수가 없게 된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되니, 혈액의 순환도 정지되어 사람은 까무러치고 말게 된다. …… 이것을 다아하는 사람은 삼수갑산을 가게 된다 할지라도 징역이 아니라 사형 집행을 내일 당한다고 할지라도 아니 한 일도 하였다고 하고 없는 죄도 있다고 불어대면서 사람 살리라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고문을 하다가 까무러치면 감방에 끌어다가 치료를 시키는 것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 물 먹이기를 그들의 상투어로는 ‘해전(海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해전을 몇 번 당하고 나면 그 사람의 폐는 아주 버리고 만다.
③ 난장(亂杖)질하기: 이것은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법으로서 저희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답을 하여서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는 주먹질, 발길질은 물론 죽도나 목총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어서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때로는 부서진 걸상이나 탁상의 다리라도 뽑아서 사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일례를 들면, 최현배 씨가 이와 같이 맞을 때에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고문을 그들은 흔히 ‘육전(陸戰)’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공중전, 해전, 육전을 번갈아가며 사용할 때에 그 어느 것이 수월한 것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당할 때보다 남이 당하는 것을 보게 되면, 더욱 몸서리가 쳐지며 소름이 끼쳐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지애와 동정에서도 그러하려니와 자기가 당할 것을 예감하여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자들은 ‘사디즘’에 중독된 놈들인지, 남이 고통하고 기절하는 것을 보고서는 매우 재미있어 하고 웃어대고 지껄떠벌하며 야단들이었다. 도대체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고, 염라부(閻羅府)에서온 우두(牛頭) 나찰(羅刹)이나 야차(夜叉)같은 귀신의 무리였다.
이상 세 가지가 가장 유명한 대표적 고문이요, 소소한 것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엄동설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발가벗겨서 개처럼 팔다리 네 공상으로 엎드려 있게 하고, 이것만으로 5분, 10분이 견디기가 어려운데 회초리로 볼기나 등허리나 넓적다리를 가리지 않고 후려갈기는 위에 주전자로 얼음냉수를 떠다가 등골로부터 내려붓는 것도 곧잘 하였다.(장지영이 당한 경우)
육체적 고통을 주는 외에 정신적 모욕적 고통을 주는 일도 여러 가지를 하였다. 가령 얼굴의 반면을 먹칠을 하고 등에다가 “나는 虛言者입니다”라는 일본어 문구를 써붙이고, 같은 동지들 앞으로 돌아다니며, “나는 허언자니 용서하십시오”하면서 사과를 하라고 시키는 일이라든지, 매를 들고 같은 동지를 두드려가며 문초를 받으라고 시키는 일 등등은 그들이 일쑤 우리에게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허한 일은 피차간에 약약한 노릇이었다. 동지를 때릴 수도 없고, 혹은 욕할 수도 없고, 아니하면 자기가 형사들에게 맞겠고,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한 번은 안재홍 선생에게 김도연 씨의 뺨을 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안 선생이 한동안 생각하여본 후에 “모든 것을 하라는 대로 다하겠지만 동지의 뺨만은 못 때리겠소. 우리가 아무리 중대한 사건의 피의자라 하지마는 동지 간의 우정까지 몰각할 수야 있소. 그 점 양해해주시오”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당연한 말이면서도 매우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안 선생은 그 다음에 올 고문을 각오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고문 중의 뚜렷한 수삼(數三)의 예에 지나지 못하고, 이밖에도 형형색색의 방법을 다하여 고통과 모욕과 분노를 주고 주고 하였다.

애써 가꾸어 온 세상이 그나마 온전해 지도록 조용히 기도할 때, 사회적 발전에 대해서 모두 비중있게 긍정하였으면 좋겠다. 경제적 풍요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회적 발전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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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3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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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그니의 작품을 좀 읽었었는데, "새들은..."이라든지 하는 것을, 그런데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걸 보면 흡족한 글읽기에 실패했던 것 아닌가 모르겠다.

사실 세월을 1권 빌려놓고도 두주 이상이나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했다. 첫장이 끌어당기는 힘이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쪽수를 더해갈수록 삶을 바라보는 열기-재미라고하면 작가한테 미안한 맘이 들어서 - 가 더해졌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의 직업도 비슷한, 그러고 보면 가난한 정도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단지 엄마의 모습은 아픈것을 비슷해도 다른 경제적 여유와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아버지한테 의존적이었던 것만 다르다 - 작가의 모습과 다분히 도덕적이며 이론으로조차 페미니즘을 배워도 감정적인, 혹은 관습의 남성우월적 삶에 휘어지고 마는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자질과 성실성은 작품속에서도 많이 보여졌지만, 삶의 아픔들에 대해 가슴이 콕콕 찔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삼일동안 울며지냈다. 동시대를 산 여성들이 직접경험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공감할 모습들이다. 그리도 서른이 지나면서 극복했다는 편안한 삶의 모습이 행운같기도 하다.

민주화의 여정과 성실한 참여의식도 그리고 그길로 열심히 간 친구들-경이와 푸른 잠바-에 대한 채무감도 귀감이 될 만하다. 적극적인 민주인사의 범주에는 전혀 속하질 않을 듯 하나, 성실하게 역사를 바라볼 줄 아는 모습과 직장일을 하면서 6.10항쟁에 꼬박꼬박 참여했던 기억들은 빛나게 보였다. 쉬운 일은 아니다. 겨우 하루쯤 가는 것조차 어찌나 부대꼈던지....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작가에게, 그리고 같은 꿈을 꾸는 우리 사회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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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 바다 건너 왜국에서 보낸 환란의 세월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9
강항 지음, 이을호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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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당시 포로로 잡혀가는 불운속에서도 왜국의 사정을 정탐하고 왕에게 전하는 굵직한 충성과 학자로서의 꼿꼿한 삶이 눈에 뜨인 책이다. 죄인이란 뜻으로 '건차록'이라 강항은 이름 붙였지만, 제자들이 그의 절개를 널리 알리고자 '간양록'이라 이름한 뜻이 아름답고 역자인 이을호 선생의 뜻이 또한 행간속에서 읽혀졌다. 꽤 오래전에 쓰여진 고전이고 또 일본의 사정을 밝히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는 없었으나, 선비정신과 겸손함을 읽어내는 데는 좋은 책이었다.

  책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대마 하2군을 주관한다.(상현, 하현) 사방이 하루 거리이다. 일본을 떠나 있는 지방이므로 색다르게 불린다. ‘勸淸神隨唐’이다. 그러므로 ‘被置探題職’ 소 하국이다.(弱柴對馬守義智의 차지다.)
羽柴秀吉(우시는 수길이의 본성이다.)이는 의지義智가 우리나라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 고마워서 제 성을 주어 그의 공을 치하하였다. 平調信은 의지의 家老다.
왜인들은 의지를 楊川下野守라 부르니 이 섬 일을 맡아서 혼자 다스리고 있다. 玄蘇는 의지의 謀主僧인데, 왜인들은 그를 安國寺西堂이라 부른다. 그는 주로 우리나라와의 서신 왕래를 맡아 보고 있다.
이곳의 읍은 芳津이라 부른다. 형세는 비록 좋으나 본 고장 성곽과는 아주 딴판이어서 큰 산 밑이요, 큰 바다의 어구에 위치하여 있고, 높은 성이나 깊은 연못이 없어서 막아냄 직한 모습은 전혀 없다. 모두 우거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수자면 겨우 쥐구멍 찾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동으로 일기도까지 하루 바람을 꼬박 받아야 건널 수 있고, 남으로 平戶島는 일기도보다는 가까우나 풍랑이 아주 거세다. 서로 豐崎를 가자면 육로로 이틀이요, 배로는 순풍에 하룻길, 노 저어서 이틀 길이다. 풍기에서 우리나라 갯가까지는 겨우 한나절 폭이면 된다. 이곳 산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다. 토지는 자갈밭이요, 논이란 한 뙈기도 없다. 채소나 보리씨도 죄다 모래자갈 위에다 뿌리니 컸댔자 몇 치 자라지 못한다. 평상시에는 우리나라와의 무역을 통해서 겨우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흑각이며 호초(후추) 같은 것은 남양 등지에서 오고, 수달피며 여우 가죽 같은 것은 제 나라에 있기는 하나 쓸데가 없으므로 싸게 사서 우리나라에 비싸게 팔아먹는다. 나사 능단 닻줄 금 은 같은 것은 저희들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팔지 못한다. 이곳 여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치마저고리를 입고 지내며, 남자들은 거의 우리말에 익숙하다.
그들은 왜국을 가리켜 언제나 ‘일본’이라 부르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언제나 ‘조선’이라 부르며 그들 스스로는 일본으로 자처하지 않는다.
평소에 우리나라에서 받는 이익이 일본에서보다 많은 까닭에 장군에서 졸막동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떠받드는 마음이 일본에 붙자는 마음보다 더 많았다. 그러기에 길이 멀고 풍알이 거세다는 핑계로 우리나라는 건드릴 수 없다고 일러 오더니, 수길이가 66주를 온통 삼켜 버리자 의지는 큰 죄나 진 것처럼 벌벌 떨면서 우리나라를 팔아 수길이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침략의 선봉이 되니 수길이는 축전筑前과 박다博多 등지를 떼어 상으로 주고 대마도 놈들은 쌀법을 얻어먹게 된 것이다.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주는 사미(賜米)를 받아먹고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서울에는 집 한 채가 없고, 의지는 제 장인인 행장의 집 근처에 여관을 얻어 잠시 유숙하고 지낼 따름이다. 다른 장군들과 동등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지낸다.
대개 본국 깊숙이 들어 있는 왜놈들은 악착스럽기는 하나 간사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정은 아무것도 모른다. 8년이나 싸웠지만 우리나라 변장의 이름 하나 똑똑이 아는 놈이 없다. 그러나 대마도 놈들은 악착스럽기는 덜 하나 간사스런 꾀는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우리 내정을 모르는 것이 없다. 평소에 섬 중에서 아주 영리한 아이를 골라 우리말과 우리나라 서계나 편지투의 이모저모를 가르치는데 아무리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도 하눈ㄴ에 그것이 왜놈의 글인지 어떤지를 알아낼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와의 사이에 틈이 나지않으면 꼭 달라붙고 왜놈들이 강해지면 우리나라를 팔고 농락하여 침략의 앞잡이가 되니, 그 흉측망측한 꾀부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변장들의 시책이 조금이라도 비뚤어지면 또다시 이놈들에게 속아 넘어가고야 말 것이다.
(기미(羈靡)지책을 실시하자면, 北道野人宴亨의 예를 따라야 할 것이다. 監兵들은 그로 하여금 언제 올 것을 미리 알리게 하고, 오면 부산과 동래에 모여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옳다. 많은 비용을 들여 서울까지 데려올 것은 없고, 또한 서울 장안의 허실을 그들에게 보여 줄 필요도 없다. 또 북도야인상사의 예를 따라야 할 것이니, 우리나라 토산으로 그들의 방물에 대한 대접을 하여 주면 좋을 것이다. 영남 세곡을 실어다가 그들의 양을 채워 줄 것까지는 없다. 그들이 가지고 온 흑각(검은 물소의 뿔), 달피(수달 가죽), 단목 호초 유황 호피 등 물건은 감병이 부산 태수에게 엄명을 내려 상중하로 나누어 가격을 결정하게 하되, 부산에서 팔고 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 서울까지 실어 올려 많은 노력을 허비하고 또 서울 장사치들이 가격이 이러니 저러니 하여 괜히 놈들의 비위에 거슬리도록 하지 않는 다. 물건을 가져오는 시기는 한 달 중 언제 언제라는 것을 미리 결정하여 무시로 내왕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며, 가져오는 배의 척수도 일정한 수를 지정하도록 해서 수많은 배를 늘어 세워 무슨 배인지 구별하기 어렵도록 하는 폐단을 미리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일정한 사관을 정하여 외부와의 자유로운 접촉을 못하게 하여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철모르는 우리나라 백성들이 그들에게 우리나라 방비가 잘되고 못된 것을 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과 통상에 관한 이러한 엄격한 약속이 성립된 후에 예의와 신의로서 접대하여 주면, 그나마도 고맙게 여겨 감지덕지할 것이므로 서울로 안 데리고 간다는 둥, 세미를 안준다는 등의 불평을 차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국 깊숙이 들어 있는 왜놈들이 또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때면 언제나 무시로 쫓아와서 일러 달라고 하여야 한다. 그러면 섬 놈들은 전일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서든 우리나라의 신용을 얻기기 위하여서든 반드시 쫓아와서 알려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미리 예비책을 강구하도록 할 것이다. 왜놈들과 접촉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마도와의 접촉을 꾀하여야 하고 대마도와의 접촉은 위에서 말한 방책 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다. 뒷날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칠 때에는 반드시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라 믿는다.) (pp.1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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