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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시대의 기록 (전 3권 세트) - 고문의 한국현대사
박원순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3권을 읽어내면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고통과 환경의 빈곤함으로 얻는 고통들에 대해서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한 분노가 차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정부는 또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분노를 양산할게 될까? 마치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야만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고문의 행적가운데, 조선어학회 사건에 기록된 인용을 길지만 들어본다.
-조선어학회사건-형형색색의 고문방법(1942년 9월-10월) (2권 pp.65-70)
조선어학회사건은 1-4차의 검거 단계를 거친다. 한 여학생의 묵은 일기장에서 발견된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한 줄의 기록 때문에 1942년 9월 5일 관련자들이 검거된 것이 1차 검거이다. 이때 검거된 정태진 씨는 경찰의 추궁과 고문으로 말미암아 “교단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체”라는 진술을 했다.
이런 진술을 바탕으로 함경남도 경찰부와 홍원 경찰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간부와 핵심 분자로 지목된 이중화 장지영 한징 이윤제 김윤경 최현배 이희숭 정인승 등을 2차로 검거했고, 3차로 같은 해 10월 21일에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정열모 김법린 이유식 등을 구속했으며, 4차로 12월에 서승효 이인 김양수 이은상 등 8명을 구속했다. 그후에도 33명이 관련자로 발표되었고, 그중 29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했는데, 이희승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고문의 실상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신의 고문 상황을 직접 경험한 대로 진술하고 있으므로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본다.
::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문 중에서 가장 무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몇 가지 소개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비행기 태우기: 그들은 우리 동지 일행을 홍원경찰서 구내에 있는 무덕전에 모아놓고 문초하였다. 이 무덕전이란 것은 그들이 유도와 격검을 연습하던 장소로서 수백 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는 넓은 방이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사람의 두 팔을 등 뒤로 젖혀서 두 손목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함께 동여놓고 두 팔과 등허리 새로 목총을 가로 질러서 꿰어 놓은 다음, 목총의 양끝에 밧줄을 매어 천장에 달아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짚토매(짚단)같은 것을 발밑에 괴어놓고 사람을 천장에 매어 달아놓는다. 그리하여 발을 저며 드디게 한다. 이렇게 하여 놓으면 비록 발밑이 약간 괴어 있을지라도, 우리의 체중으로 인하여 등 뒤로 젖혀진 겨드랑이 아래 궤어 있는 목총이 위로 바짝 치켜지기 때문에 어깨는 뒤로 뒤틀려서 뻐개질 지경으로 된다. 이러할 때의 그 고통이야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도 저희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불지 않으면 짚토매를 발밑에서 빼어 버린다. 그러면 사람은 아주 공중에 떠서 매어 달리게 되고, 매어 달리는 중력 때문에 어깨는 어스러지는 것과 같이 고통의 도가 심하여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닐수록 고통은 극도로 심하여져서 나중에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모양으로 고개가 쳐지고 눈이 감기며 혀를 빼어 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신까지 혼미하여지고 맥박과 호흡까지 점점 약해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고통이고 무엇이고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사상태에 빠지게 되고 만다. 사람의 건강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마는 이렇게 되는 동안이 불과 10분이나 15분밖에 아니 된다. 만약 좀더 고통을 줄 의사가 있으면 처음에 매어 달아놓고는 그넷줄을 꼬아서 그네 탄 사람을 맴을 돌리듯이 천장에 달려 있는 줄을 꼬아서 맴을 돌리는 일도 있었다. …… 이와 같이 비행기를 태우는 것을 그들의 상투어로는 공중전(空中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② 물먹이기: 무덕전에 붙은 옆방에는 목욕실이 있었다. 이것은 저희들이 격검이나 유도를 한 다음 땀을 씻어 버리려고 마련된 목욕실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피의자를 문초할 때에 고문의 장소로도 이 목욕식을 곧잘 이용하는 것이었다. 욕설이나 따귀나 발길질로 기름을 짜다가 저희들의 비위에 틀리게 될라치면 목욕실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기다마한 걸상에다가 사람을 반듯이 젖혀 눕힌다. 마치 갓 죽은 시체를 칠성판 위에 누이듯이. 그러나 고개만은 걸상 끝에서 아래로 처지도록 하여놓는다. 그러고는 사람을 걸상과 함께 몇 맺기 단단히 묶어서 졸라매고 두 팔은 뒤로 젖혀서 걸상 밑에서 맞잡아 매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 꼼짝달싹 운신을 할 수 없게 된다.
다음으로는 다른 녀석이 주전자나 빠께쓰에 물을 담아가지고 걸상 끝에서 처져서 거꾸로 매어 달린 얼굴에다 물을 붓는다. 물은 저절로 콧구멍을 통하여 기관으로 폐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기관으로 물이 흘러들어가면 자연 숨이 막히게 되니까, 그 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콧구멍으로 삼키려고 애를 쓰게된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물이 숨통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한참을 계속하면 목구멍은 목구멍대로 물을 먹어서 배가 뚱뚱하게 되고, 숨통으로는 역시 물이 들어가서 숨이 막히게 된다. 말하자면 기가 막힌다. 우리가 기막힌다는 말을 흔히 쓰지마는 그러한 기막힐 정도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기가 막혀서 숨을 통할 수가 없게 된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되니, 혈액의 순환도 정지되어 사람은 까무러치고 말게 된다. …… 이것을 다아하는 사람은 삼수갑산을 가게 된다 할지라도 징역이 아니라 사형 집행을 내일 당한다고 할지라도 아니 한 일도 하였다고 하고 없는 죄도 있다고 불어대면서 사람 살리라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고문을 하다가 까무러치면 감방에 끌어다가 치료를 시키는 것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 물 먹이기를 그들의 상투어로는 ‘해전(海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해전을 몇 번 당하고 나면 그 사람의 폐는 아주 버리고 만다.
③ 난장(亂杖)질하기: 이것은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법으로서 저희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답을 하여서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는 주먹질, 발길질은 물론 죽도나 목총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어서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때로는 부서진 걸상이나 탁상의 다리라도 뽑아서 사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일례를 들면, 최현배 씨가 이와 같이 맞을 때에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고문을 그들은 흔히 ‘육전(陸戰)’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공중전, 해전, 육전을 번갈아가며 사용할 때에 그 어느 것이 수월한 것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당할 때보다 남이 당하는 것을 보게 되면, 더욱 몸서리가 쳐지며 소름이 끼쳐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지애와 동정에서도 그러하려니와 자기가 당할 것을 예감하여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자들은 ‘사디즘’에 중독된 놈들인지, 남이 고통하고 기절하는 것을 보고서는 매우 재미있어 하고 웃어대고 지껄떠벌하며 야단들이었다. 도대체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고, 염라부(閻羅府)에서온 우두(牛頭) 나찰(羅刹)이나 야차(夜叉)같은 귀신의 무리였다.
이상 세 가지가 가장 유명한 대표적 고문이요, 소소한 것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엄동설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발가벗겨서 개처럼 팔다리 네 공상으로 엎드려 있게 하고, 이것만으로 5분, 10분이 견디기가 어려운데 회초리로 볼기나 등허리나 넓적다리를 가리지 않고 후려갈기는 위에 주전자로 얼음냉수를 떠다가 등골로부터 내려붓는 것도 곧잘 하였다.(장지영이 당한 경우)
육체적 고통을 주는 외에 정신적 모욕적 고통을 주는 일도 여러 가지를 하였다. 가령 얼굴의 반면을 먹칠을 하고 등에다가 “나는 虛言者입니다”라는 일본어 문구를 써붙이고, 같은 동지들 앞으로 돌아다니며, “나는 허언자니 용서하십시오”하면서 사과를 하라고 시키는 일이라든지, 매를 들고 같은 동지를 두드려가며 문초를 받으라고 시키는 일 등등은 그들이 일쑤 우리에게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허한 일은 피차간에 약약한 노릇이었다. 동지를 때릴 수도 없고, 혹은 욕할 수도 없고, 아니하면 자기가 형사들에게 맞겠고,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한 번은 안재홍 선생에게 김도연 씨의 뺨을 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안 선생이 한동안 생각하여본 후에 “모든 것을 하라는 대로 다하겠지만 동지의 뺨만은 못 때리겠소. 우리가 아무리 중대한 사건의 피의자라 하지마는 동지 간의 우정까지 몰각할 수야 있소. 그 점 양해해주시오”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당연한 말이면서도 매우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안 선생은 그 다음에 올 고문을 각오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고문 중의 뚜렷한 수삼(數三)의 예에 지나지 못하고, 이밖에도 형형색색의 방법을 다하여 고통과 모욕과 분노를 주고 주고 하였다.
애써 가꾸어 온 세상이 그나마 온전해 지도록 조용히 기도할 때, 사회적 발전에 대해서 모두 비중있게 긍정하였으면 좋겠다. 경제적 풍요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회적 발전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