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광고 중에 하루에 1분만 타인을 위해 쓴다면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란 카피를 보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하루에 1분도 남을 위해 사용치 않으려는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오직 나만이 중요한  존재이고 남은 나를 경계짓기 위한 구분점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최소한의 배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기저에는 공동체 의식이 쌓여있는 것인가? 아주 사소한 친절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따뜻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또 사소한 친절로도 우리는 매우 다사롭게 관계맺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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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2
김종록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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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내게로 다가온다. 하늘의 의미를 알고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샤먼들이 하늘과 인간을 연결한 이후로 하늘은 신앙으로 혹은 삶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것 같다.

  장영실이 세종과 더불어 바라본 하늘은 15세기의 하늘이다. 역사를 통해 배운바로는, 중국에서 오는 역법을 받아들이기까지 비어있는 기간들을 계산하고 정립하기 위해 역법을 발전시키고 칠정산 내외편과 같은 역작들이 생겼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작가는 독자적인 하늘을 바라보는 과학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것도 장영실과 장영실을 품을 줄 알았던 세종의 천문학의 하늘로서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문학의 대상으로 그려내며 별자리는 그림이며 또 다른 의미망을 지닌 문자로, 상상력의 화려한 역사로 설명한다.

  장영실을 수용할 수 없었던 세종과의 관계를 비밀스런 친서 한장으로 종결시킨 것은 그동안의 밀착관계로 보건대 너무 허약한 결말이다. 그리고 치열하게 과학도로 살면 고구하고 의심했던 장영실이 불교의 원융의 품으로 들어가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것도 연약해 보인다. 우주관이 바뀔 수는 있겠으나 그의 노력이 후학의 양성이라든가 혹은 다른 기술의 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뿌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점에서도 오히려 논리적인 상상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15세기의 과학의 16세기의 성리학에 몰입되었고 우리는 역법의 과학세계라는 성리학의 범주로부터 놓여나지 못하는 세상을 지나왔음을 알고있다.  그것은 근대적인 관점에서는 비판되고 애석하게 여겨지는 법이나 16세기가 꿈꾸던 세상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6세기라고 장영실같은 천재가 어찌 없었으랴? 단지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것은 그 시대가 안고 있던 한계성이며 품지못한 주변인이었을 것을....

  전적으로 동의하고 감동하지는 않았으나 생각을 한번쯤 하게 만든 책이었다. 아울러 잘 보이지도 않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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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민강좌 제37집
일조각 편집부 지음 / 일조각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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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 선생의 추모 일주기가 되었다는 앞 뒷장의 소식을 들으면서 세월이 무상함을 느껴본다. 아울러 십여년전에 올랐던 책에 관한 특집을 책의 문화사로 엮게 되었다는 소식은 감회로왔다. 고대의 문자세계로 부터 고려시대의 불경 교육과 구결, 고려시대 불교자료의 서지학적 개관, 조선시대 문집 간행과 성리학, 조선시대 필사의 주체와 필사본 제작,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서학서 읽기, 조선후기의 한글소설 바람, 서민들의 상업출판, 방각본, 근대적 앎의 형성과 잡지의 역할, 일제시대 출판계의 변화와 성장 등 열단원에 이르는 각각의 글 가운데 조선후기에 치중하여 다섯개의 글을 읽으면서도 성리학적 사고와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인해 서양의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 그리고 서민문화가 성장하면서 이루어지는 방각본의 인쇄물 등이 흥미로왔다.

  조선 중종때만 하더라도 서점이랄 수 있는 書肆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선비들이 필요한 책을 가질 수 없어 빌려서라도 보려 하였으나 그마저 구하지 못하면 학업을 그만두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19세기로 오면 세책점이 서울에 생길 정도였고 특히 여성들이 한글소설을 즐겨 읽으며 방각본이 많이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책의 문화를 말할 수 있게 한다. 특히 필사본과 인쇄본이 서로 자리를 대신 메워주기도 하면서 상호 작용을 해온 것은 서로 상대적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넘게 해 주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또한 실학자들이 서학서를 필독서로 인식하고 열독하면서 실학적 사고를 확장하는 동안, 성리학의 과학적 이론은 수학적 합리론으로 무장된 서양의 과학이론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성리학은 심성론 내지 윤리학 분야에 한정되면서 축소됨으로써 오히려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었음은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운용하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시대 한글, 소설, 여성은 모두 소외된 것이란 사실이 눈에 띈다. 소설은 많이 읽혔으면서도 읽어서 좋을 것이 없는 물건으로 대접을 받았던 시절, 지금의 만화와 비슷한 대접이었을까? 풍속사범에 해당했던 설공찬전의 저자인 중종반정의 공신 채수의 탄핵에 얽힌 이유도 결국 한글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는 점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요구까지 했다니... 허망한 내용보다는 엄청난 영향력을 문제 삼은 셈이니 오늘날의 인터넷의 위력만큼 요란했던 것일까?

  나머지의 글들은 야금야금 조금씩 맛볼 생각이다. 즐겁다. 책의 문화사를 뒤집어 본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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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날개 - 압둘 칼람 인도 대통령 자서전
APJ 압둘 카람.아룬 티와리 지음, 이정옥 옮김, 채연석 감수 / 세상사람들의책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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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만에 전율이 이는 책을 보았어요. 사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교과서적인 지식 외에는 아는 게 없고 더구나 이슬람 신앙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은 내가 읽어본 적도 없어요. 선물로 얻은 이 책은 더 귀한 선물로 아름다운 사람을 곁에 두고 가네요.

  낙후된 인도 과학의 비전과 꿈을 품고 자신을 끝까지 쳐서 복종시키면서 선배들의 가르침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가는 압둘 칼람의 모습은 성자의 모습이고 현실 속에 구현된 신의 모습조차 보이네요. 곳곳에 보이는 시구와 경구들은 가슴에 가득 닿아왔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열림의 세계와 상호 신뢰의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고 부러웠어요. 나를 둘러싼 세상에서도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이 한껏 부풀어 오르네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 아름다운 일입니다. 나의 작은 사랑을 통해서도 공기가 맑아지고 호흡하는 순간순간마다 사랑의 씨앗들이 퍼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인도의 대통령이 노력하고 실현했던 꿈들이 세상 곳곳에서 모국을 사랑하는 열정과 자신을 헌신하는 신실함으로 자리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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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문의 비밀 - 하 - 백탑파白塔派 그 두 번째 이야기, 개정판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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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의 글 읽기를 계속하는 것은 쉽게 식상해질 수 있는 요인이다.  좀 띄엄띄엄 읽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깔끔하긴 하지만,  많은 연구와 문헌들을 참고하면서 글쓰기를 빠르게 계속하는 작가의 이 글은 식상한 부분이 쉬이 눈에 띄었다.

  백탑파(원각사지 10층탑 주변에 모여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지식과 토론을 즐김)의 젊은이들이 당시 열녀를 내겠다는 가문에서 정려를 청하는 글을 올린 것들을 엄찰하라는 정조의 명을 받고, 외관직의 적성현감(종육품)으로  나가는 이덕무의 적성에서 그의 파격적인 통치방식과 향청의 거부, 사상들의 활동, 질청의 아전들의 관습 등을 타파하고자 애쓰는 모습들, 그리고 야소교의 전파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 분명 야소교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책이 나올 것 같다 - 너무 앞서 나가고 있다. 죽은자의 말을 파헤쳐보는 김진의 추리는 셜록 홈즈를 저리가라 할 만큼 논리와 과학적인 수사를 연상케하고, 김아영이란 인물은 오늘날의 시대에서도 이상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갖고 있다. 일 잘하고 현명하고 아랫사람을 위할 줄 알고 근대과학과 실용적인 선진 기술들을 이용하여 치부함으로써 2년만에 무너진 집안의 경제를 회복하고,  그림을 분별할 줄 알고 소설을 즐기고 소설을 쓰고자 애쓰고 신분을 타파하고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면서 몸바쳐 사랑할 줄 알고 또 다가오는 사랑에 대하여 당당하게 맞서는 아닌 말로 못하는 것 하나없는 이 여성을 도대체 어떤 가치와 상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 18세기의 문화가 이렇게 찬란하였고, 또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가 이토록 다양할 수 있었을까 의심이 갈만큼.... 완벽한 모습이다.

  영 정조시대를 서민문화의 발달과 정치적 안정으로 인해 조선의 중흥기란 표현은 하지만, 초정 박제가가 고을 현감으로 나아가 둘러본 실정을 표현한 다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속에서 드러나게 표현하는 18세기의 번영은 그리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었다. 정조 임금과 정약용이 꿈꾸던 이상은 현실속에서 투영되기 매우 힘든 구조였음을 문학은 너무 쉽게 잊는 것 같다. 실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에 쓰던 용어 몇개 그리고 사자성어 몇가지를 건져본 게 이 소설에서 얻은 바다. 상공업의 발달과 백성을 위한 정치(수령권의 강화), 서얼허통 그리고 야소교에 관한 굵직한 관심들은 천천히 펼쳐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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