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개정판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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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통해서 많이 알려졌던 한비야의 오지탐험기들을 한권씩 읽다가 어느새 그녀의 글을 거진 읽게되었다.

내가 그녀를 좋게 본것은 세계여행의 꿈을 실현하기위해 모든 것을 던진 용기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준비과정에서 우리 산하를 더듬는 부지런한 몸놀림이 맘에 들어서였다. 나 개인적으로도 산행을 좋아하고 틈만 나면 가까이 있는 주변의 산들을 여렃려 이길 저길 더듬으면서 다녀보는 편이다. 또 시간이 되는 대로 한강의 합주점인 양수리부터 서해로 들어가는 곳까지 도보여행의 계획을 세우고 아주 천천히 시도하고 있는중이다. 생활인의 틀을 깨기가 쉽지않기때문이다. 이번에 국토여행종단기가 나왔다고 해서 사실 어떤 책보다도 기대감을 가지고 사서 읽었는데....' 흐음.....'

그녀의 글냄새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게 있다면 빠른 일정으로 진행되어 만나는 사람들과 생활을 나누기가 힘들었다는 점일테고, 내 땅이요, 우리가 사는 익숙한 곳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자세한 설명이나 느낌보다는 뭐랄까? 자신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 좀....' 사실 그녀의 생각 대부분에 대해서 나도 수긍하거나 긍정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직설적으로 쏟아붓는 생각들은 느낌과는 달리 거슬리는 감을 안겨 주었다.

제목도 좀.... '바람의 딸 우리땅에 서다'라는 광고카피같은 것보다는 한비야의 국토종단기 정도로 붙였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이미 그렇게 광고를 하지않아도 그녀의 이름은 충분히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너무 큰 기대를 하다가 그냥 그렇다 혹은 국토종단기로는 좀... 이런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저으기 걱정스럽다. 후기에 밝혔듯이 개인사적으로도 큰 산들을 많이 넘기었으며 많은 고민을 한끝에 써진 책인데 그만큼 깊이 들여다 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함께 생각하고 나누어야 할 내용들을 슬쩍 미뤄놓게 되는 석연찮음을 나는 많이 갖게 되었다. 단순히 기대가 많았던 나의 느낌에 불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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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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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을 하자면 인문학을 전공한 자로서 또 인문학을 사랑하는 자로서 나는 아웃사이더의 시점 밖에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균형된 감각을 길러주기 위해서 과학에 투자를 좀 했던 편이다. 아동도서에 불과했지만, 그거라도 읽으면서 질문에 대답을 해줄 양으로 '과학자의 길', '엔트로피', '코스모스'등의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하게 배어있는 과학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이런 과학에 대한 관심은 거의 10년 전쯤에 사라진 듯.... 이미 나의 아이들은 성장하여 자신의 길들로 어엿하게 접어들었고 더이상 나의 추천도서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느낌표의 선정도서들은 대개가 읽었던 책들이 많아서 시청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는 제목에서 인문학적 느낌이 확 풍겨오면서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든 책이라서 인상적인 느낌은 더하였고 복잡한 세상에 대한 명쾌한 과학이 과연 있을까 의심도 해가면서 콘서트에 들어섰다.

매우 빠르고 경쾌하게 시작되는 비바체 몰토의 1악장은 시작의 설레임을 갖게하였지만 그 내용은 결코 명랑하고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지구촌시대의 너무도 넓고 또 좁은 공간과 시간, 과학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거짓 - 아인슈타인의 뇌, 좀 생각과 집중을 요하는 시작이었다. 네개의 동기로 1악장은 끝이나고 느리게, 안단테로 여는 2악장은 카오스와 프랙탈로 가득 차있다. 어쩌면 빠르게 정신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눈을 지그시 감은채로 릴랙스한 느낌을 가져보면서 맛보라는 것일까? 현재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모든 부분들을 카오스로 설명하고 있는 인상, 혼돈의 세계는 결코 느릴 수없는 것인데....

3악장의 느리고 장중하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Grave non tanto)는 통합되는 세계에서 물리학과 예기치못했던 타 학문이 만나는 모습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왜 느리고 장중하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연주를 하는지 모르겠다. 경제학과 물리학의 만남, 낯설기는 하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문외한인 내게는,

4악장은 점차 빠르게 오히려 갈수록 더 빠르게란 말이 맞는 것 아닐까? 속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소음이나 공해 등은 부수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임을 누구나 느끼고 있는데 그것들이 과학적인 소용이 된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산타클로스가 하루에 돌기엔 너무 큰 별인 지구에서 한 점을 차지하고 사는 우리들은 여섯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인 좁은 세상에서 또한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그렇다. 한 점도 안되는 나의 존재이지만 박수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대로 동기화된 존재로서 나는 사회화되어 이웃과 나누며 살줄을 안다. 우리는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빠르게 시작해서 느리게 - 느리고 장중하게 너무 지나치지 않게 - 점차 빠르게로 끝이난 콘서트를 보면서 나는 판이나 CD를 구매하지 않았다. 저자가 친절을 베풀어 각장마다 부기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은 분들께'를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너무 무거워보여서 자연과학도들에게 혹은 그쪽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귀동냥이나 해볼 생각으로 말이다.너무 얌체같은 생각인가?

좋은 콘서트를 다녀온 것은 사실인데, 글쎄......? 나중에 앙콜 콘서트를 한번 더 가볼 것인지를 아직은 결정하지 못했다만, 다 커버린 내 아이들에게도 권해주고 많은 감상과 비평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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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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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책을 나오는 대로 거의 읽는 편이다. 한참 밥벌이를 한다는 사실이 지겨워서 몸을 비틀어 대고 있을 때쯤에 구입했던 이책을 읽게 되었다. 어찌나 ....하던지, 무척 오랫동안 읽어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독후감을 지속적으로 쓰는 편이다. 따라서 읽었던 책들의 기억들이 여러 권의 노트 중 어느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독후감 노트의 리스트에 올려진 제목과 읽었던 기억때문에 참고하려고 넘겨보았다. 아뿔싸, 리스트만 작성되고 단 한자도 없이 완벽하게 빠져있었다. 실실 웃음이 나올 수 밖에. 한편으론 지겹고, 또 한편으론 울먹이는 내용도 참 많이 있었던 김훈다운 글들이 많이 있었던 세평이라고 기억된다. 고집스레 컴퓨터를 배우지 않고 원고지에 지우개를 들고 글을 써도 밥벌이가 되는 그는 매우 섬세한, 혹은 유연한 생각을 막 해도 좋을 듯 하다.

그에 반해 나는 소위 좋은 직종이라 평가받는 직업에 몸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나오는 매체나 컴퓨터와 친해지려는 작업들을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해야 하는데....' 그리고는 등이 아프고 허리가 결려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야하고, 이렇게 반복되는 나의 증세는 우리나라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공통의 증세가 아닐까 싶다. 나는 정말 그만 다니고 싶을 때가 많다. 힘도 들고 너무 매너리즘에 빠져서 재미도 없고 창조성이라고는 입으로 밖에 담지 못하고, 그러노라면, 지겹다는 생각이 슬며시 가슴속으로 숨어 들어와 어느새 입밖으로도 지겹다는 소릴 습관처럼 해대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것의 치료책이라고는 너무 배부른 소릴 한다는 반성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에 순종하면서 꾸역꾸역 집어 넣는다. 내가 키워야 할 자식들과 나로 인해 걱정을 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내가 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지...' 하고 애써 관점을 돌려본다.

좀더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지는 세상이 오길 기대하면서, 동남아의 많은 나라사람들이 선망하는 대한민국이 기회의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찌 이리 지겨움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밥벌이를 하기 힘든 지겨움, 밥벌이를 할 직장을 구하기 힘든데서 오는 막막한 지겨움, 그리고 평생을 근무하고 떠나는 마당에 느끼는 아쉬운 지겨움.....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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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 정치사회사연구 이기백 한국사학논집 5
이기백 / 일조각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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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편의 논문(1950-90's)이 수록된 이 책은 각 시대마다 우리 역사학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70년대는 무령왕릉의 발굴과 비문의 발견으로 금석학, 고고학 등 인접과학을 활용하는 한편 백제사와 국가형성시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80년대 이후로는 고조선 논쟁과 대중과 가까워지기 위한 역사학계의 노력이 저자의 논문 속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저자는 ‘한국사의 흐름을 처음부터 차례로 살피려는 의도로 시작하였으나 고대사의 천착에 머무르고 말았음’을 고백하며 ‘고구려사, 백제사 연구를 독립된 저서로 정리하고 국가형성문제에도 손을 대고 싶었음’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 또한 고대사 연구의 애로에 대해 '비록 지극히 간단한 기록에서 일지라도 이를 앞뒤와 전후좌우로 연결지어 살피고, 또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하며 더듬어 가면, 결국 그 역사적 진실을 알아낼 수 있게 마련이다’라며 사료가 풍부한 시대를 연구하는 데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의 글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매우 논리정연하여 간결하다. 특히 의문과 의문으로 이어서 설명하는 서술 방식은 참 매력적이다. 이를테면 고조선에 대한 글에서 '고조선에 대한 높은 관심이 올바른 이해의 방향으로 이끌리어 왔는가', ' 먼저 중국 측 기록인 위서의 기록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언제였던 것일까?', '건국 초기의 고조선은 어떠한 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을까?' 등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상술하고 또 그 설명에서 파생되는 질문으로 다음 장을 설명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는 서술방법이 참 인상적이다. 특히 '부여의 시기죄'에 대한 논문은 마치 한편의 추리 소설이나 심리전을 연상시킬 만큼 풍부한 상상력과 이미지가 결합되었으면서도 품격을 잃지않는 아름다운 논문이다. 간편하게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 扶餘의 시기죄(사학지, 1970)
-근거 : 『三國志』東夷傳 扶餘條(p.32)
-접근방법 : 비교 및 당시 사회상태에 비추어 고찰
투기죄의 예〔왜(p.34), 고구려(pp.34-35)〕 → 처벌의 예(pp.36-38)
-어째서 시기죄는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을까
일부다처제 사회와 축첩(p.40)의 비교

보통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아주 사소한 실마리 하나를 통해 사건을 다 드러내고 일반화 시켜 주옥같은 논문 한편을 완성하는 탁월성은 외길로 흔들림없이 간 학자의 혜안에서 생길 수 있는 안목이 아닐른지...?

한편 한편 읽어가면서 정리를 할때마다 느끼는 감탄이지만, 학문을 하는 자의 자세와 태도는 물론이고 지녀야 할 열정과 덕목까지도 행간을 통해 배워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어떤 문제를 살펴보건 그의 안목을 빗대보면서 바라보는 즐거움은 학문을 하려는 자의 기쁨이다.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쏟는 그의 애정과 역사학자로서의 겸허한 의무감은 또한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와 그의 저서들은 역사를 공부하는 자로서 어떻게 역사를 공부해야 할는지는 물론, 역사를 통하여 현재에 어떤 봉사를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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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를 거닐다
이윤기 외 지음 / 옹기장이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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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가슴으로 만나는 스물네편의 아름다운 지적 산문'이란 부제를 붙인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해인사를 보고 싶은 단순한 이유였다. 나를 정리하면서 자연 속에 잠겨들고 싶을 때 생각난 장소의 하나가 해인사였다. 이 책을 통해 소위 한몫을 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건드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삶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여유와 멋을 부리게도 하였다.

많은 수필 중에서도 눈길을 끌었던 내용은 윤구병님의 '부처됨의 어려움'이었다. 성불을 해서 열반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저자거리로 나온 것은 중생구제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었기에라는 뼈에 붙인 살과 같은 직설적이고 비어화된 말들이 오히려 부처의 고행과 자비를 깊이 각인시켜주었다. 이런 깊은 인상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작은 마음을 내가 지속해서 지녀야 할 이유의 근거이기도 하였다.

전우익 님의 '홀로 정영상 형을 생각하며'도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각이 솔직하여 남의 이야기같지않게 긴 여운을 남겼다. '정성스럽게 묻어 오래오래 가는' 관계를 맺으면서 '몸이 떠난 자리를 정으로 메꾸어주는' 만남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자기화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합일되는 시점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살다보니 망자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게 잊혀져 버리고 삶이 그 흔적을 악착같이 달라붙여 놓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보관하고 있던 사진첩을 꺼내보면 빛바랜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처럼 가슴속에도 그렇게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게 산넘어 산과 같아서 특별한 동기도 없이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추억하노라면 서운한 맘만 그지 없이 드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을까?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 불과 십년도 채 안되었는데 말이다. 그는 어떻게 망자를 그리도 자신처럼 기억하고 살려놓을 수 있을까 나는 심히 부럽고, 또 부끄러워졌다.

조용히 심금을 울리는 이런 수필가와 이야기를 읽는 기쁨 속에서도 내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나의 속사정인지 아닌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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