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 - 전3권 - 서남 동양학자료총서 003,004,005 서남동양학자료총서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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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의『음청사』와『속음청사』, 정교의 『대한계년사』가 손꼽히는 저술이다. 이들 모두 한국사료총서로서 『매천야록』과 더불어 정리, 공간된 바 있다. 양적으로만 따지면 『음청사』․『속음청사』와『대한계년사』는 『매천야록』에 비해서 큰 편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증언서로서의 의미와 자료적인 이용도에 있어서는 『매천야록』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기록 주체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 비장한 인간 자세에 관련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12쪽)
   그는 죽음을 결행하면서 유언에 쓰기를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닌가! 나는 위로 하늘의 병이(秉彝 잡을 병, 떳떳할 이)의 아름다움과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의미를 저버릴 수 없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충이란 도리는 군신의 관계를 맺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개념이다. 이씨 왕조에 벼슬한 바 없었기에 이씨 왕조를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고 매천은 분명히 말한 것이다. 이 발언에 대해 당시 고루한 유자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曺兢燮이 지은 「매천집중간서(梅泉集重刊序)」는 “지금 선생에 대해 논하는 자들이 ‘성리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혹은 ‘꼭 죽어야할 의리는 없다’한 것을 들어 말들을 한다.”고 소식의 일단은 전하고 있다. 그가 결행한 살신은 관념적인 충을 지키기 위한 것과는 행위자의 의지가 벌써 달랐다. 「절명시(絶命詩)」에서 이렇게 읊는다.
  鳥獸哀鳴海岳嚬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
  秋燈掩卷懷千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難作人間識字人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요컨대 ‘글 아는 사람(識字人)’의 도리를 생각하며 고뇌한 것이다. 여기서 식자인이란 지식인과 동의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국이 멸망하는 앞에서 죽음을 결행한 그 방식은 근대적인 지식인으로서의 행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기실 매천은 근대 전환기의 시대를 살았음에도 근대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그는 죽음에 임해서까지 놓지 않았던 문필 또한 결코 근대적 양식을 접수해서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식자인’으로서의 자각은 ‘사(士)’의 자각과 통하는바 자신이 처한 시대에 상응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13-14쪽)
- 『매천야록』이 전통적인 ‘사’의 글쓰기 방식의 산물임에도 급변한 시대에서 낙후되지 않고 역사의 증언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 있었을까? 일차적으로는 그 취재원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는 그것이 타자의 경험을 두루 수렴하고 계몽적 성격의 신간 서적과 신문에서 지식 정보를 속속들이 채용함으로써 내용이 풍부해지고 가치 있는 기록이 된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문제점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측면을 언급해 두어야겠다. 먼저 타자의 경험에 의존한 데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자. 하나는 그 자신이 교유한 인물들의 성향에 치우쳐진 점이다. 『매천야록』이 당파적 편견이 있다는 지적을 전부터 받아왔거니와 신분 계급적인 관점에서 따져볼 소지가 없지 않다. 또하나는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걸리기 쉬운 착오와 왜곡이다. 정보의 확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전문에 의존하다 보니 오류가 없을 수 없는데 우리가 『매천야록』을 읽을 때 이런 점들은 감안하고 고려해서 읽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다른 문제점으로 해외 기사는 대부분 단편적인 데 그치고, 국내 사건 소식도 소략하게 취급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취재원-그 때 신문의 보도 방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본다. (20쪽)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정말 많은 분량이기도 하였고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이로서 반드시 읽어야 할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하였기에... 현재의 입장에서 근대의 언저리를 둘러보면서 써야 한다는 것의 한계성이 여실히 드러난 책을 읽기엔 버검움이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해가 지나가기까지 다 읽어내지를 못하고 띠엄띠엄, 거북이의 걸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책을 펴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았음도 또한 고백한다. 책장을 덮고보니, 위대한 영혼을 가진 위대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단점과 결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 시골 변두리에서 신문에 의지해서 남길수 있는 작품으로는 그릇이 너무 크기에...

  역사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의 행위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감사를 한다. 이런 어른이 있었다는 것에. 보수가 잘되어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한다. 정말 보수진영에 있는 분들이 한번씩 읽었음 좋겠다. 좋은 보수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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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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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全泰壹).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을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인간선언. 가난과 잘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아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죽었다.
그는 말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한 것이라고.
그는 고발하였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인간이면서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면서도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고. 이들은 “모든 생활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다”고.
그리하여 그는 맹세하였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 서 -)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친구들에게의 당부도, '어머니는 저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주십시오'라는 말도 내게는 벅찬 눈물로 받아들여졌다. 목숨을 다바쳐서 인간을 사랑한 그가 있었기에 우리의 70년대는 아프지만은 않았다고...

나보다 열두살이 많은 나이이니 헤아려보자면 육십이 넘었을 그임에도 그는 늘 언제나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청년이다. 그가 그렇게도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근로기준법 준수는 이제 지켜지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현재가 아름다운 사회인지는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에 기대어 우리를 돌아보기로 하자. 

대통령 각하.…… (p.208-210)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의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 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서 종업원은 3만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합니다. 한 공장에 평균 30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글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3만여 명이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ㅇ비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를 못합니다. 또한 3만여 명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서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70원 내지 16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5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서는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 못합니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서,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서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가 구두로서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는 실태조사도 왔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 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고 d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회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속히 신체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1969년 11월경에 집필한 것인데 발송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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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박스 세트 - 전2권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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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윤복의 가계를 추리하여 4대째 도화서의 화공으로 머무는 필력있는 집안과 이재에 밝은 부(父) 신한평, 헌신과 희생을 일삼으며, 동생을 위해 사화서로 가서 색을 창조하는 형 영복 그리고 천재화가 신윤복을 설명함

- 김홍도와 신윤복을 천재끼리의 갈등을 넘어선 대결과 사랑의(혹 애증의) 구도로 잡아가면서, 윤복을 위에다 올려놓으려니까 빚어지는 문제, ‘주사거배’에 대한 설명과 한낮의 술타령, 그에 대한 정풍이라? 이건 무슨 현대판 숙정작업인가?

- 도화서의 틀과 정형성은 왜 비판 받아야 하는가? 도화서 출신의 김홍도와 신윤복이 풍속화를 그릴 수 있었음은 도화서가 품고 있는 잠재력과 시대의 반영이다.

- 당파싸움으로 찌든 상황으로 시대적 배경을 삼고 있음. 그런데 영․정시대라니...?

- ‘유곽쟁웅’에 대한 설명 역시 탈역사적임. 사내들이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익숙한 싸움, 마치 명예를 건 싸움이라고 하지만 기생집에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특히 점잖은 문인 양반이 기생집을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 오늘날 요정정치를 하듯 기생정치를 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

- 정조가 신윤복과 김홍도를 데리고 벌인 어진화사와 그림을 찢는 행위, 그리고 출원을 막지 못하면서 거리의 화원이 되라는 당부 등

<2권>
- 사화서 : 신한평과 윤복의 관계(김홍도의 친구 서징의 자식 - 그림자놀이)
시전상인 김조년의 문하에서 (연소답청, 주유청강)
계속되는 화사대결(김홍도의 빨래터, 계변가화)
- 비밀의 그림 : 복초지 기술 - 초지의 결을 바꿔서 2겹을 바르는게 보통이나 얇은 것은 3-4겹 가능
(김홍도의 그림감상), 살인자의 얼굴 합치기, 장헌세자의 초상
- 달빛의 여인 (월하정인-포도군관, 남색끝동(남편이 있음을)과 자주옷고름(자식이 있음)의 흰옷여인, 기녀)
月 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달빛 어스름한 야삼경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알겠지
歡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向後期 보내는 정 아쉽기만 한데 하늘은 밝아오네, 다시금 옷자락 붙잡고 뒷날의 기약묻네 (선조때 김명원)

- 그림의 얼굴(黃猫弄蝶圖-호랑나비, 패랭이꽃 5, 누런고양이) 그림이 글씨를 대신하는 것으로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설명하는 형태를 띠고서.... 그림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근대이건만,
(예)
고양이, 나비|| 묘접은 耄耋(모질)과 음이 비슷 | 고희를 의미, 묘접도→모질도
갈대, 기러기 || 蘆(갈대)雁(기러기)은 老安으로 | 노인의 장수를 축하하는 노안도
포도덩굴(蔓帶) || 만대를 萬代로 해석 | 자손만대
버드나무, 오리 2마리 || 柳를 留로, 鴨의 파자 甲 |장원급제의 행운이 머무르기를...
모란, 목련, 해당화 || 화중지왕, 玉蘭花, 海棠花  | 富貴玉堂
모란, 장닭|| 닭의 共鳴을 功名으로 | 富貴功名
새우(등이 굽어 바다의 늙은이라) || 海老를 偕老로 | 백년해로
소나무, 불로초 || 新年(소나무)如意(불로초) 용 |신년축하용

- 김조년에게 보내는 신윤복의 도전장(月夜密會, 離婦貪春) - 김조년의 죽음을 예감하게 하는...
- 마지막 대결 : 색을 볼 수 없는 청록색맹(김홍도)와 남자의 심리를 모르는 여인(신윤복)이라...
- “……그림은 색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니 선과 면과 그로써 이루어지는 형태와 먹의 농담과 필법과 기세와 운율과 그 안에 담은 뜻이 모두 합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니 내가 색을 보지 못한다 하나 염려하지 않는다.” (p.184)
- 쟁투 : 씨름도와 검무
- 씨름도 : 동심원 구성으로 구경꾼 배치, 중간의 여백에 씨름꾼을 놓아 시선을 집중, 벗어놓은 발막신과 짚신은 동심원 구도를 완성하는 백미, 오른쪽을 비워놓음으로써 화면의 긴장과 역동성을 화면 밖으로까지 확장, 엿장수의 시선만 밖으로 향함으로써 보는이의 시선을 바깥으로 유도하여 화면을 무한대로 확장 - 안정감과 변격이 팽팽하게 싸움 / 화원의 시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구경꾼의 시각 + 위로 올려다본 씨름꾼의 시각, 화원은 앞쪽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씨름판의 전경을 그리며 구경꾼의 입장이 되어 씨름꾼들을 올려다봄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힘찬 느낌을 줌 / 위쪽에 13명의 구경꾼 아래쪽에 6명을 배치 각양각색의 얼굴모습과 표정으로 다양한 느낌을 주어 왁자한 장터 씨름판의 분위기를 훌륭히 살림 / 누가 이겼는가? 그림을 등진 사람(화면 아래쪽의 두구경꾼의 표정에서, 손이 뒤바뀜) (pp.195-201)
- 쌍검대무도 : 가로 3등분(상 7명, 중 2 검녀 배치, 하 7명), 두 여인이 보여주는 약동성과 색채의 현란함 / 누가? 푸른 치마를 입은 여인이 진 것(몸의 중심이 흐트러짐) / 정중동을 묘파하였으며 여성적이면서도 강렬한 시각적 긴장감을 제공(pp.202-209)

- 무동 신명을 표현하기 위한 힘찬 거침없는 형세, 관절이 꺾이느 srht에서는 머물러 가한 힘을 드러냄. 소년의 곧추세운 발 끝에 모인 힘은 이 그림의 중심이자 시발점이며 모든 힘이 모이는 자리, 소년은 힘껏 하늘로 솟구쳐오를 수 있는 완결성을 보여줌 (pp.244-249)

- 여자인 신윤복의 미인도 살짝 정면에서 방향을 틀어선 앳된 얼굴 둥글고 반듯한 이마, 단정한 실눈썹과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는 맑고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과 작지만 그래서 더 매혹적인 입술을 지닌 단아한 미인, 살짝 들린 얼굴은 수심에 잠긴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복잡한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남긴 윤기나는 머리카락 위의 탐스런 가채는 여인의 당당함을 말해주었다. 보송거리는 왼쪽 귀멑머리는 앳된 순수함을, 귓전의 자줏빛 댕기는 발랄한 젊음을 보여주었다. 옷자락이 짧고 소매가 좁은 삼회장 저고리는 단아한 어깨를 감쌌고,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 치맛자락은 풍성함을 더해주었다. 주름진 치맛자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외씨버선은 금방 돌아설 듯 아슬아슬했다. (pp.244-251)

  재미를 더하는 플롯과 풍부한 풍속화의 내용이 더없는 눈요기 거리이기는 하나 역사성과는 상치되는 곳곳의 소설적 구상에서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형상화된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틀기는 왜곡의 정도를 벗어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 느낌이 들고 신윤복을 여자로 상정하는 작가의 상상력을 놀랍다고 해야 할지 개념이 없다고 해야할지 판단이 안서는 작품이었다. 혹여 사실과 상상을 독자들이 맘대로 넘나들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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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시대의 기록 (전 3권 세트) - 고문의 한국현대사
박원순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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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을 읽어내면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고통과 환경의 빈곤함으로 얻는 고통들에 대해서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한 분노가 차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정부는 또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분노를 양산할게 될까? 마치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야만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고문의 행적가운데, 조선어학회 사건에 기록된 인용을 길지만 들어본다.

-조선어학회사건-형형색색의 고문방법(1942년 9월-10월) (2권 pp.65-70)
조선어학회사건은 1-4차의 검거 단계를 거친다. 한 여학생의 묵은 일기장에서 발견된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한 줄의 기록 때문에 1942년 9월 5일 관련자들이 검거된 것이 1차 검거이다. 이때 검거된 정태진 씨는 경찰의 추궁과 고문으로 말미암아 “교단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체”라는 진술을 했다.
이런 진술을 바탕으로 함경남도 경찰부와 홍원 경찰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간부와 핵심 분자로 지목된 이중화 장지영 한징 이윤제 김윤경 최현배 이희숭 정인승 등을 2차로 검거했고, 3차로 같은 해 10월 21일에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정열모 김법린 이유식 등을 구속했으며, 4차로 12월에 서승효 이인 김양수 이은상 등 8명을 구속했다. 그후에도 33명이 관련자로 발표되었고, 그중 29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했는데, 이희승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고문의 실상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신의 고문 상황을 직접 경험한 대로 진술하고 있으므로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본다.
::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문 중에서 가장 무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몇 가지 소개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비행기 태우기: 그들은 우리 동지 일행을 홍원경찰서 구내에 있는 무덕전에 모아놓고 문초하였다. 이 무덕전이란 것은 그들이 유도와 격검을 연습하던 장소로서 수백 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는 넓은 방이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사람의 두 팔을 등 뒤로 젖혀서 두 손목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함께 동여놓고 두 팔과 등허리 새로 목총을 가로 질러서 꿰어 놓은 다음, 목총의 양끝에 밧줄을 매어 천장에 달아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짚토매(짚단)같은 것을 발밑에 괴어놓고 사람을 천장에 매어 달아놓는다. 그리하여 발을 저며 드디게 한다. 이렇게 하여 놓으면 비록 발밑이 약간 괴어 있을지라도, 우리의 체중으로 인하여 등 뒤로 젖혀진 겨드랑이 아래 궤어 있는 목총이 위로 바짝 치켜지기 때문에 어깨는 뒤로 뒤틀려서 뻐개질 지경으로 된다. 이러할 때의 그 고통이야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도 저희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불지 않으면 짚토매를 발밑에서 빼어 버린다. 그러면 사람은 아주 공중에 떠서 매어 달리게 되고, 매어 달리는 중력 때문에 어깨는 어스러지는 것과 같이 고통의 도가 심하여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닐수록 고통은 극도로 심하여져서 나중에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모양으로 고개가 쳐지고 눈이 감기며 혀를 빼어 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신까지 혼미하여지고 맥박과 호흡까지 점점 약해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고통이고 무엇이고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사상태에 빠지게 되고 만다. 사람의 건강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마는 이렇게 되는 동안이 불과 10분이나 15분밖에 아니 된다. 만약 좀더 고통을 줄 의사가 있으면 처음에 매어 달아놓고는 그넷줄을 꼬아서 그네 탄 사람을 맴을 돌리듯이 천장에 달려 있는 줄을 꼬아서 맴을 돌리는 일도 있었다. …… 이와 같이 비행기를 태우는 것을 그들의 상투어로는 공중전(空中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② 물먹이기: 무덕전에 붙은 옆방에는 목욕실이 있었다. 이것은 저희들이 격검이나 유도를 한 다음 땀을 씻어 버리려고 마련된 목욕실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피의자를 문초할 때에 고문의 장소로도 이 목욕식을 곧잘 이용하는 것이었다. 욕설이나 따귀나 발길질로 기름을 짜다가 저희들의 비위에 틀리게 될라치면 목욕실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기다마한 걸상에다가 사람을 반듯이 젖혀 눕힌다. 마치 갓 죽은 시체를 칠성판 위에 누이듯이. 그러나 고개만은 걸상 끝에서 아래로 처지도록 하여놓는다. 그러고는 사람을 걸상과 함께 몇 맺기 단단히 묶어서 졸라매고 두 팔은 뒤로 젖혀서 걸상 밑에서 맞잡아 매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 꼼짝달싹 운신을 할 수 없게 된다.
다음으로는 다른 녀석이 주전자나 빠께쓰에 물을 담아가지고 걸상 끝에서 처져서 거꾸로 매어 달린 얼굴에다 물을 붓는다. 물은 저절로 콧구멍을 통하여 기관으로 폐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기관으로 물이 흘러들어가면 자연 숨이 막히게 되니까, 그 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콧구멍으로 삼키려고 애를 쓰게된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물이 숨통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한참을 계속하면 목구멍은 목구멍대로 물을 먹어서 배가 뚱뚱하게 되고, 숨통으로는 역시 물이 들어가서 숨이 막히게 된다. 말하자면 기가 막힌다. 우리가 기막힌다는 말을 흔히 쓰지마는 그러한 기막힐 정도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기가 막혀서 숨을 통할 수가 없게 된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되니, 혈액의 순환도 정지되어 사람은 까무러치고 말게 된다. …… 이것을 다아하는 사람은 삼수갑산을 가게 된다 할지라도 징역이 아니라 사형 집행을 내일 당한다고 할지라도 아니 한 일도 하였다고 하고 없는 죄도 있다고 불어대면서 사람 살리라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고문을 하다가 까무러치면 감방에 끌어다가 치료를 시키는 것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 물 먹이기를 그들의 상투어로는 ‘해전(海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해전을 몇 번 당하고 나면 그 사람의 폐는 아주 버리고 만다.
③ 난장(亂杖)질하기: 이것은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법으로서 저희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답을 하여서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는 주먹질, 발길질은 물론 죽도나 목총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어서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때로는 부서진 걸상이나 탁상의 다리라도 뽑아서 사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일례를 들면, 최현배 씨가 이와 같이 맞을 때에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고문을 그들은 흔히 ‘육전(陸戰)’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공중전, 해전, 육전을 번갈아가며 사용할 때에 그 어느 것이 수월한 것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당할 때보다 남이 당하는 것을 보게 되면, 더욱 몸서리가 쳐지며 소름이 끼쳐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지애와 동정에서도 그러하려니와 자기가 당할 것을 예감하여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자들은 ‘사디즘’에 중독된 놈들인지, 남이 고통하고 기절하는 것을 보고서는 매우 재미있어 하고 웃어대고 지껄떠벌하며 야단들이었다. 도대체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고, 염라부(閻羅府)에서온 우두(牛頭) 나찰(羅刹)이나 야차(夜叉)같은 귀신의 무리였다.
이상 세 가지가 가장 유명한 대표적 고문이요, 소소한 것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엄동설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발가벗겨서 개처럼 팔다리 네 공상으로 엎드려 있게 하고, 이것만으로 5분, 10분이 견디기가 어려운데 회초리로 볼기나 등허리나 넓적다리를 가리지 않고 후려갈기는 위에 주전자로 얼음냉수를 떠다가 등골로부터 내려붓는 것도 곧잘 하였다.(장지영이 당한 경우)
육체적 고통을 주는 외에 정신적 모욕적 고통을 주는 일도 여러 가지를 하였다. 가령 얼굴의 반면을 먹칠을 하고 등에다가 “나는 虛言者입니다”라는 일본어 문구를 써붙이고, 같은 동지들 앞으로 돌아다니며, “나는 허언자니 용서하십시오”하면서 사과를 하라고 시키는 일이라든지, 매를 들고 같은 동지를 두드려가며 문초를 받으라고 시키는 일 등등은 그들이 일쑤 우리에게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허한 일은 피차간에 약약한 노릇이었다. 동지를 때릴 수도 없고, 혹은 욕할 수도 없고, 아니하면 자기가 형사들에게 맞겠고,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한 번은 안재홍 선생에게 김도연 씨의 뺨을 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안 선생이 한동안 생각하여본 후에 “모든 것을 하라는 대로 다하겠지만 동지의 뺨만은 못 때리겠소. 우리가 아무리 중대한 사건의 피의자라 하지마는 동지 간의 우정까지 몰각할 수야 있소. 그 점 양해해주시오”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당연한 말이면서도 매우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안 선생은 그 다음에 올 고문을 각오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고문 중의 뚜렷한 수삼(數三)의 예에 지나지 못하고, 이밖에도 형형색색의 방법을 다하여 고통과 모욕과 분노를 주고 주고 하였다.

애써 가꾸어 온 세상이 그나마 온전해 지도록 조용히 기도할 때, 사회적 발전에 대해서 모두 비중있게 긍정하였으면 좋겠다. 경제적 풍요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회적 발전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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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3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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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그니의 작품을 좀 읽었었는데, "새들은..."이라든지 하는 것을, 그런데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걸 보면 흡족한 글읽기에 실패했던 것 아닌가 모르겠다.

사실 세월을 1권 빌려놓고도 두주 이상이나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했다. 첫장이 끌어당기는 힘이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쪽수를 더해갈수록 삶을 바라보는 열기-재미라고하면 작가한테 미안한 맘이 들어서 - 가 더해졌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의 직업도 비슷한, 그러고 보면 가난한 정도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단지 엄마의 모습은 아픈것을 비슷해도 다른 경제적 여유와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아버지한테 의존적이었던 것만 다르다 - 작가의 모습과 다분히 도덕적이며 이론으로조차 페미니즘을 배워도 감정적인, 혹은 관습의 남성우월적 삶에 휘어지고 마는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자질과 성실성은 작품속에서도 많이 보여졌지만, 삶의 아픔들에 대해 가슴이 콕콕 찔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삼일동안 울며지냈다. 동시대를 산 여성들이 직접경험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공감할 모습들이다. 그리도 서른이 지나면서 극복했다는 편안한 삶의 모습이 행운같기도 하다.

민주화의 여정과 성실한 참여의식도 그리고 그길로 열심히 간 친구들-경이와 푸른 잠바-에 대한 채무감도 귀감이 될 만하다. 적극적인 민주인사의 범주에는 전혀 속하질 않을 듯 하나, 성실하게 역사를 바라볼 줄 아는 모습과 직장일을 하면서 6.10항쟁에 꼬박꼬박 참여했던 기억들은 빛나게 보였다. 쉬운 일은 아니다. 겨우 하루쯤 가는 것조차 어찌나 부대꼈던지....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작가에게, 그리고 같은 꿈을 꾸는 우리 사회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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