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서재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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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인간실격>을 통해서 다자이 오사무를 접했다.

이후 <사양>과 몇몇 단편을 읽었지만 아마도 후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대다수였던 모양,

<쓰가루>를 몇 장 넘기고는 그 발랄함과 천연덕스러움에 잠시 당황했다.

그렇다고 <인간실격>에 비해 문장이 촌스럽다거나 전체적인 구성 능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다만, <인간실격>에서 자의식 과잉의 지식인이자 천재적인 필력을 갖추었지만 정신적으로 어쩐지 결국 나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면 이번에는 도리어 강인함과 끈기, 심지어 건강하고 성실한 가장이자 글쓰기를 당당히 '직업'으로 삼고 정진하는 다자이를 보았다고나 할까, 과연 여기 모인 세 편의 중편 소설은 모두 어떤 기관으로부터 '의뢰'받아 쓴 글들이고 자퇴나 자살, 이혼 등으로 얼룩진 상처를 나름 딛고 두 번째 부인과 새출발을 한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었다.


서둘러 전체를 읽은 감상의 결론을 말하자면, <인간실격>만 읽고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정말 섣부른 짓이고 (일견 당연하지만 세상은 별로 그렇게 세심하지 못하다) 이런 중후기 작품들이 내게까지 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뻤다.


1 쓰가루


여행기다. 여행기는 아무나 쓰려고 시도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잘 쓰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게 평소 내 생각이었는데, 이 작품은 여행기 본연의 모습 - 그러니까 여행지에 대한 정보랄지 역사랄지 하는 것들 - 에도 충실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아니라 다자이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잘 녹아들면서 문학관이나 당대에 지금처럼 문화인류학이 성행했다면 그에 관한 전문가가 될 수도 있을 통찰력까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감칠맛이 남다른 여행기다. 곳곳에 자신이 의뢰받은 본분을 잃지 않으려 최대한 자료를 열심히 조사하고 비교한 흔적이 역력하며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특히 나같은 외국인에게 그 수많은 지명과 역사의 어지러움이란 몇 장 읽고 덮어도 좋다고 할 정도) 부분에서 예의 다소 엉뚱하지만 솔직하고, 소심하지만 또 거침이 없기도 하며, 풍경의 외적 묘사가 다자이 자신이 감흥이 깃든 내면 묘사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고, 우아, 마지막에는 눈물이 핑 도는 클라이맥스까지 정밀하게 짜 맞춰 놓았다. 한 두 작품이 유명세를 타거나 자살이라는 죽음의 특이성때문에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작가가 아니구나, 끊임없이 노력 또 노력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감동을 받았다.


2 석별


<인간실격>처럼 수기를 형식으로 취하고 있는데, 약간 다른 점은 다자이 오사무가 쓰되 루쉰의 옛 대학동창 친구이자 의사인 '나'를 만들어 루쉰의 젊은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학동창은 제2의 다자이 오사무 역할을 하는 것, 다자이가 본 루쉰 쯤 되겠다.

그 유명한 루쉰의 책은 제대로 읽어본 적 없으나 인품이 매우 훌륭하여 중국 뿐만아니라 전세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니 서두부터 강렬한 호기심이 인다.

당대에는 사실 관계를 논하느라 이런 저런 말들도 많았겠으나, 지금에 와서는 다자이의 필력만 오롯이 빛난다는게 역시 다 읽은 소감. 우어어어, 뭐 이렇게 잘 쓰냐! 루쉰과 화자가 첫 만남에서 밤을 지새우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 묘사에서는 무려 2-3페이지가 넘게 루쉰 혼자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야말로 화면에서 루쉰의 얼굴이 나와 직접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인간실격> 독서의 여파로 생성된 편견 가득한 이미지 - 다자이 오사무 같은 작가는 대학에 다닐 때 이외에는 정치나 세계 정세 따위 개인의 문제보다는 중요치 않았을 거라는 - 는 싸그리 사라졌다. 유약하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세상을 볼 거라는 선입견을 깨뜨리는 대목이 수시로 묘사되었고, 다자이는 심지어, 몹시 일본을 사랑하고 세계와 일본이 맺는 긴장 국면에 대해 날카로운 신경줄을 한시도 놓지 않았던 애국자(!)였던 것 같다. 다자이가 자살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드라면, 지금쯤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갖는 노작가가 되었을까, 궁금해지는 이유다.


3 옛날이야기


아아아, 빌어먹을 기억력. 이 작품은 내가 어려서 읽었던 동화나 우화를 잘 기억만 하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을 작품인 것을. 일본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아주 잘 알려져 있는 혹부리 영감 등의 이야기를 다자이가 각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패러디 정도가 아니라, 동화를 비틀어보고 교훈이라 일컬어지는 결말을 어린이라거나 어른이라거나 여자라거나 남자라거나 하는 이분법이 아닌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서 바꾸어 상상해보는 다자이의 각색 능력은 가히 놀랍다. 역시, 오래 살았드라면, 영화 감독이 되었을지도! 라는 생각마저 드는 이유다.


그리하여, 다시금, 범인인 나는 천재인 한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한다. 글 잘 쓰는 사람만 보면 하게 되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소위 천재가 하는 '노력'과 근면성실성이 범인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도 많이 미쳤다. 짐작컨대, 노력과 연습이 그야말로 죽도록 반복되던 끝에 그 1%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것이리라, 적어도 순서만큼은 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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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2-0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책주문을 하기 전에 이 글을 본 것은 뭐랄까 오늘 뭔가 신나는 일이 연속적으로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
저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굿바이>라는 작품만 읽어보았거든요. <인간실격>은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 말이 갖는 에너지에 한동안 매몰되었었어요. 저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기도 하구요. 물론 지금은 그런 말도 안합니다. 인간실격,이라고 말하는 나 자신에게 거품이 많이 껴있는 것 같아서요.
지금은 그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태어나면 꼭 고래로 살고 싶구요^^

치니 2012-02-01 12:16   좋아요 0 | URL
문학동네의 이 시리즈는 참으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권을 이벤트 선물로 받았는데, 굿바이 님이 주문(!)해주셔도 좋을 강추 작품이어요. :)
그쳐, 인간실격이라는 말 자체의 에너지. ㅠㅠ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의 거품. ㅠㅠ 다자이는, 아니 위대한 소설가들은, 쫌 짱인 거 같아요.
다시 태어나면 고래라, 그럼 저는 바닷속에서도 굿바이 님이랑 같이 놀 수 있는 어떤 생물체가 되고 싶어효 ~ 헤헤.

당고 2012-02-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다자이 오사무 작품 중에 <쓰가루>가 제일 좋더라고요. 히히-

치니 2012-02-03 13:31   좋아요 0 | URL
오오, 당고 님은 역시 읽으셨구나! 다독가답습니다. :)
<쓰가루>가 제일 좋다 하시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