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셔니스트 - The Illusionis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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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 이라는 말이 있다.
잠깐 들여다보면 누군가에게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희망이라는 자체가 고문의 동음이어일진대, 굳이 중복해서 쓸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으니까.

여기, 이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다.
홍보를 위해서든, 일루션을 희망으로 읽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영화를 읽어낸 누군가의 고집때문이든, 실상 보고나면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이 애니메이션이 내 건 카피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줄기차게 들어가 있다.
희망이 희망이기만 한 사람과 희망이 (잡을 수 없고 덧없는) 일루션이라고 믿는 양측이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상반된 감정을 안고 극장을 떠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전제가 제목에 이미 깔려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이리라.

1950년대의 프랑스와 영국에는 락큰롤과 텔레비젼과 럭셔리한 제품을 기가 막히게 광고해서 파는 상업문화가 도래하여 옛 것들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스코티쉬 전통 치마를 입고 춤을 추면서 기뻐하던 작은 마을의 펍 주인은 마술사를 그 누구보다 살갑게 맞이하고 마술사가 선사하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 보여주는 마법에 감탄하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이들처럼 곧 쥬크박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에딘버러 한 구석에서 알콜중독자가 되어 바닥을 긴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무작정 따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마술사만 믿고 도시 에딘버러로 따라 온 가난한 소녀는 새로운 옷이나 새로운 음악, 새로운 삶이나 새로운 연인 - 그게 무엇이건 간에 자신을 매혹시키는 것이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만 하면, 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따르면서 자신이 자신만의 삶을 새로이 개척한다고 착각한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에딘버러의 모든 휘황한 불빛이 꺼질 때, 나는 생각한다.

알콜중독자가 되는 것처럼 흥청망청 아무런 인식없이 시대가 손을 잡아 끄는대로 물결을 따라 망가지는 게 나을까, 소녀처럼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점을 느끼지도 못한 채 언제까지나 일루션을 좇아가는 게 나을까.

원작자 자크 타티의 의도가 무엇이었건간에, 내용은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겠지만, 이를 표현한 방식만큼은 수많은 찬사가 결코 무색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마술사의 구부정한 어깨와 무심하지만 다감한 눈빛, 감정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는 손짓과 발짓, 대사라고는 다 합해도 열 마디나 될까 말까한 이 조용한 2D 애니메이션 속에 그 모든 말하지 않은 언어를 내포하며 살아 숨쉬는 풍경의 스케치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안구 정화'가 된다.
게다가 지난 겨울 내가 가서 걷던 에딘버러의 바로 그 거리와 그 건물과 그 풍경이 고스란히 다시 펼쳐지니 '추억'이라는 이름의 더께가 착시현상까지 일으켜 마음이 온통 무지개색이 되었다.
고마운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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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메이션을 깊이 있게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 치니님은 그렇게 깊이 있게 사색하며 보시다니 감동 -.-
전 이런 순수한 애니매이션 보다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같은 좀 변태적 일본 애니매이션을 보며 살아와 제 소양을 의심하는 중입니다. 허허허 ^^;;

치니 2011-06-27 21:15   좋아요 0 | URL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 호오, 이름에서 풍기는 포스가 심상치 않습니다. ^-^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해도, 이 영화는 쟝르에 대한 호불호와 상관없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점은 분명해요. 다만 극장을 나설 때 어떤 관객은 '뭐야 마술 나오고 신기한 거 많이 나오는 건 줄 알았더니 시시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으니, 그런 기대를 가진 분들에게는 실망하실지도 모른다고 미리 알려드려야 할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