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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크라이스트 - Antichri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보러 간 어제는 비가 내렸다.
개봉하자마자 보려 가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며칠을 미루다가 안되겠다 싶어 나선 날, 하필이면 비도 내리고 그 때문인지 봄은 급 샐쭉해져 찬란한 빛이나 초록을 다시 감춘 채, 차갑고 스산해져 있었다.
설령 보고나서 굉장한 불쾌감이나 우울감에 빠지더라도 날씨 탓을 하기에 좋은 영화일 지도 모르겠다, 고 우선 자위했지만 보고나서 이 날씨 덕분에 더 주체할 수 없어질까봐서 걱정이기도 했다.
극장의 창구에는 영화 소개와 더불어 빨간 글씨로 특정 장면의 가학성과 잔인성이 담긴 내용을 친히 소개해두고 있었고, 창구 직원은 혼자 온 여성인 나를 주의깊게 살핀 후, "이 영화는 매우 잔인한데요, 그래도 보시겠습니까?" 미리 교육한 흔적이 역력하게 재차 확인을 한 뒤에서야 표를 내주었다. 내 뒤의 남성은 푹 하고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을 정도로 겁을 먹고 말았다. (관람 후 돌이켜보건대 극장 측의 이러한 자기방어는 영리하면서도 예의 바른 배려의 일환으로 둔갑될 만큼, 괜찮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래서 어땠느냐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의 완성도는 - 정작 라스폰트리에 감독은 '완성도는 높지 않더라도' 자신의 우울병을 치유하는 기간에 쓴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칭했지만 - 내게는 놀라웠다. '도그빌'에서 놀랐던 그때처럼 가슴 한 쪽이 불쾌하지만 기이하게 뻥 뚫린달까, 묘한 여운을 가장 오래 간직하게 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그 표현 방법이 찝찝하다. 어쩔 수 없다. 각오는 했지만 몇 몇 장면에서는 눈을 꾹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감자 안 보이는데 소리만 들릴 때의 공포감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눈을 뜨고 화면 가장자리만을 봤다. 엉엉, 씨네21에서 이름 지었듯 이 영화는 '고문 포르노'이다.
포르노를 호기심에서 보고야 말지만 포르노에서 그 어떤 교훈을 얻기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럼에도 그 망할 놈의 호기심이 고문까지 예술적이라는 허명 하에 받아들이도록 억제하기 힘든 '보는' 욕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고문 후에도 잔존감은 내상으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두루두루 그러하다.
사실 밤잠을 설칠까봐 두려웠다. 까불거리는 상업영화 한 편을 더 보고 상쇄하거나 편안한 친구를 만나 영화에 대해 실컷 뒷담화를 하면 나아질 것도 같았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고 괜한 대비였다. 친구를 만나면서도, 술을 마시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영화 속 샬롯 갱스부르의 표정이 어른거렸지만 그것은 두렵지 않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친근하기까지 했다. 이 친근감은 무엇?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단지 내가 여성이기 때문? 어쩌면 원래 내가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 어쩌면 ... 이 영화에 매혹되었기 때문? 아직은 모르겠다.
현재로서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내'가 이 영화를 (두려움을 무릅쓰고) 보기는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지만 '남'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기란 무시무시하게 어렵다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