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회의를 마치고 서둘러 인쇄한 것을 잡느라 종이에 손을 베었다.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쓰라림도 잊은 채 찰칵 하고 플래쉬가 터지는 것처럼 이 장면이 떠올라서 잠시 망연히 영화 <봄날은 간다>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손을 위로 들고 앉아 있었다.
내 기억으로 당시에 은수는 남자들 대부분에게 욕을 참 많이 먹었다. 이런 몹쓸 여자가 있나! 실컷 꼬셔놓고 상우가 구속하려하자(영화 속에서 정확히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상우는 연애의 끝은 당연히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남자였으니), 불에 데인 듯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목에 매달려 애정을 갈구하는 듯 하더니 그예 또 다른 남자에게 상우랑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똑같은 자리에서 태연하게 하고 있는 은수는, 확실히 얄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랑이 더욱 더 계산적으로 되어가면서, 은수는 별로 욕을 먹지 않는 이해되는 삼십대 초반 이혼녀의 캐릭터가 되고 상우는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캐릭터로 이해되어 가는 듯 하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두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고 편을 드는 대상이야 달라지겠지만, 나는 영화를 보았던 그 당시에 비해 지금 그런 것을 별로 따지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종이에 손을 벤 그 순간, 이 영화의 이 장면이 떠올랐다는 것에서, 이미지의 각인이 그 어느 영화보다도 강했던, 그만큼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영화구나 싶다.
그리고 많은 남자들에게 묻고싶어진다. 은수같은 여자가 당신에게 다가온다면, 뿌리칠 수 있나요?
눈에 확 들어올만큼 예쁜 외모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자가, 그런 외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수수하게 걸친 스웨터와 빨간 목도리의 자연스러움, 옆에 누가 있건 말건 아무데서고 쿨쿨 잠을 자버리는 무심함, 외롭다고 징징 대지 않지만 차분하게 스며드는 커피처럼 깊고 웅숭한 고독을 아주 살짝만 내보이면서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묻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대범함, 남자가 충분히 다가올 만한 용기를 갖는 순간을 대번에 알아채고 활짝 마음과 몸을 열고 열정을 다해 사랑하는 천진함, 을 가졌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자기만의 계산이 가득차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해놓고도 나몰라라 하는 당당함, 소화전을 두고 상우와 했던 멘트를 똑같이 하면서 같은 장소에서 다른 남자를 꼬시는 뻔뻔함과 그런 자신에게 혀를 찰 줄 아는 어른스러움, 그리고 이런 모든 일련의 연애 속에서도 묵묵히 '생활'하는 독립성까지 지녔다면? 이 모든 것에서, 은수를 마다할 만한 치명적인 하자가 보이냐고 묻고싶다. 쉽사리 회복되기 어려운 상처를 받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다고 대답할 남자들이여, (노희경의 말을 빌려)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라고 했지 않은가. 혹시라도 이런 여인을 만난다면 그저 사랑하시라,고 말하고싶다. 상우가 그랬던 것처럼.
사족: 손 베이고 나서 이미지 검색하느라 수많은 은수 - 이영애 - 의 사진들을 보다보니, 이 분의 미모에 다시 한번 감탄 또 감탄, 그리고 허진호 감독님은 이렇게 섬세한 영화를 또 한번 만들어주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요즘은 볼 만한 한국형 연애 영화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