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 - 국경없는 의사회 이야기
댄 보르토로티 지음, 고은영 그림 / 한스컨텐츠(Hantz)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03년으로 기억한다.

하루 하루 고삐 매인 짐승처럼 꾸역꾸역 회사에 출근하는 것에 염증을 있는대로 느끼던 어느날, 무조건 사표를 제출하고싶다는 열망에 휩싸인 어느날, 하릴없이 구직 싸이트를 훑다가, '국경없는 의사회'의 구직 광고를 보았다.

영어를 할 수 있으면 되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자기소개서를 적고 이메일을 보냈으며 다음날에는 인터뷰를 하러 녹사평 어딘가에 허름하게 자리잡은 사무실에 가 있었다.

간단한 영어 독해 시험을 치루고, 마르고 차분해보이는 프랑스 여성과 마주 앉아 구두 인터뷰를 했고, 월급은 120만원이되 여행은 아무 때나 가능해야 하며 오래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했던 질문은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와 의료에 대한 배경 지식이 조금이나마 있는지 정도였던 거 같은데 제대로 된 답변은 거의 못했지 싶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작은 사무실에 직원들이 한 명 한 명 들어올 때마다 파안대소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 무엇이 그리들 재미난지, 연신 하하 호호 자유롭고 행복해보였다. 단순한 내게는 그 모습만이 유난히 부각되어 기억에 새겨졌다.

그날 이후 나는 꿈을 꾸고 싶을 때마다, 일탈을 하고 싶을 때마다, 사는게 이게 아니다 싶을 때마다, 국경없는 의사회로 가는 상상을 했다. 그때 떨어진 이유도 모른 채, 언젠가는 다시 지원해 볼 수 있다고 생각도 했다.

이제 고백한다.

나는 안된다. 아직 멀었다. 나를 떨어뜨린 그분들은 참 잘 떨어뜨렸다. 내 몸 구석구석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이토록 편안함을 갈구하는데, 그리고 그 편안함 중에서도 가장 안이한 정신적 도피를 위해 거기에 찾아갔던 내가 덜컥 뽑혔다면 그쪽도 나도 완전 잘못 가는거였다.

이런 처절한 깨달음을 준 이 책에 감사한다. 내가 그 때 충동적으로 해볼까 하고 마음 먹은 것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나의 시행착오는 둘째 치고 그간 이 단체가 해 온 일들에도 얼마나 큰 누가 되었을 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너무 화끈해지면서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거창한 세상에의 변혁을 이룰 수 있는 대인이어야만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고 나보다 한발짝 더 절망 쪽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러나 바로 끊어지는 삭은 줄이 아니라 튼튼한 줄을 내미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거나, 인도주의를 가장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전쟁의 이득을 챙기려는 무리에게 잘못 이용당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적어도 자신의 생에서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알려줄 뿐이다.

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가도 두렵지 않냐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반문한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도시의 길 위에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모는 차가 미친듯이 질주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어느날 뉴욕 거리 한복판에서 영문 모르고 총을 맞을 수도 있는데, 그럼 이 도시의 삶은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냐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만, 그래도 나는 두렵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예전 멋도 모르고 면접을 보러갔던 그때보다 백만배 더 두려워져버렸다. 다시 고백하건대, 지금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떠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뎌가며 아이들이 턱에 총을 맞아 그자리에서 죽는 모습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다녀와서 그런 세상은 나 몰라라 하고 오늘 새로 산 냉장고를 보여주는 가족들을 아무 저항감 없이 대할 자신은 더더욱 없다.

이렇게 자신이 없어지는 나는,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보이고 서글프고 한심하다. 이제 그나마 은밀했던 꿈 하나를 접어야만 하는 것인가 싶어서.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3-20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08-03-2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그릇을 알아간다는 게 참담할 때가 많아요.
먼저 남에게 실망하고 그 다음엔 자신에게 실망하는데
전 후자의 경우가 더 비참하더군요.^^

구석구석 편안함을 갈구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타고난 나같은 중생들이
최소한의 품위는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다가

인간이란 것들이 지구에서 가장 악한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주 휩싸이기도 합니다.

치니 2008-03-20 13:56   좋아요 0 | URL
네, 실은 면접을 보러 갈 당시만 해도, 으쓱하는 마음이 아주 없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생각 외로 경쟁율이 꽤 높았던 것에 놀라기도 했구요.
이 책을 읽고나니 그런 제가 얼마나 한심했는지가 자꾸만 되새겨졌어요.
요즘 여러가지면에서 자신감이 자꾸 추락합니다요. 에효.

이게다예요 2008-03-20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백하자면, 낯선 것들에 대한 거부감도 많고 두려움도 많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뼛속까지 안전지향적인 마인드가 뿌리내리고 있어서 아마 저런 건 시도조차 안 했을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안전, 보호 이런 것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내 가정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는데, 어느 삶이 안전하겠어요, 정말.

치니 2008-03-21 08:45   좋아요 0 | URL
나는 인도주의자라고 생각해왔는데, 나 편할 때만 인도주의고 보통 때는 그저 안분지족형일 뿐이었죠.
내가 보고 싶을 때만 보고 잠시 걱정 비슷한 마음을 갖는 정도.
어떻게 하면 세상이 조금은 평화로워질까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걸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기란 참 어렵고요.

chaire 2008-03-2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마 저는 꿈조차 꾸지 못했을 거 같아요(영어가 안 돼서 ㅋㅋ).
그래도 님은 꿈을 꾸셨잖아요.
그것만 해도 근사해 보이는데요?
그리고 사람의 내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굉장히 대단한 결심이 실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이뤄지기도 하잖아요.
그 비밀스런 꿈, 그 귀퉁이를 아주 많이 접지는 않아도 되지 않을랑가요..^^

치니 2008-03-24 17:37   좋아요 0 | URL
chaire님 말씀을 들으니까 막 힘이 나네요.
오늘 아침 들은 노래 가사 중,
"너의 어설픈 위로가 내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라는게 와닿더니만. 헤헤.
맞아요, 내일은 정말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니까...
완전히 접지는 않겠습니당.

누에 2008-03-2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시도도 못해볼 일이네요. 치니님이 그때 뽑혔다면 아마 또 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리고 전 주제파악을 잘 하는 분들 참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고백하자면 전 주제파악이 덜 된 인간이걸랑요. ^^;
카이레 님이 꿈에 대해 말씀하셔서 어떤 말이 떠오르네요.
현명함이란 꿈을 쫓아 갈 때 그것을 시야에서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큰 꿈을 갖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말인데 한국어로 옮기려니 말이 좀 꼬여버렸네요. ㅠ.ㅠ

치니 2008-03-27 08:45   좋아요 0 | URL
저도 주제파악이 제일 어려워요. 잘 하기도 어렵거니와, 해야 한다는 것조차 잘 까먹으니 원...^-^;;
오스카 와일드, 멋진 말을 했군요, 역시...
그나저나 이 양반 책을 내가 읽어본 적 있던가? 덕분에 생각해보는 중. ^-^

토니 2008-03-2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국경없는" 곳에 지원했었어요. 언니 바로 전 해에. 물론 안 됐죠. 그땐 좀 서운했는데. (나처럼 준비된 자 없건만, 사람 보는 눈 없네 없어, 분명 내가 모르는 인사 비리가 있을 거야, 뭐 이딴 소리하면서요.) 물론 지금은 전화위복으로 더 좋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요.
사람을 돕는다는 거, 또 그것을 업으로 삼고 한다는 거 무지 어렵죠. 자신을 뒤로한 채 늘 남을 우선으로 한다는 거, 사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잖아요. 내가 돕고 싶을 때, 내가 돕고 싶은 사람만 취사 선택해서 돕고 싶은데 업으로 삼는 순간 그런 결정권이 사라지니. 그래서 어려운 것 같아요. 자신을 죽여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치니 2008-03-28 08:46   좋아요 0 | URL
현장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저보다는 훨씬 더 많고 깊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이 못난 고백 투의 리뷰가 새삼 창피하네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안되어 있는 지, 아니면 태어날 때에는 인도주의 적인 마음이 다 있었는데 커가면서 이기적인 인자가 자꾸 자라나는지...그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로서는 취사 선택해서 돕는 것, 그것만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은 하죠.

누에 2008-03-2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도 대체로 토니님이 괄호 안에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하고 다니죠. ^^; 그나저나 고양이들이랑 살기 시작하니까 여행도 제대로 못가고 국경없는 단체에도 지원못하고.. 휴

치니 2008-03-28 08:48   좋아요 0 | URL
누에님의 그런 당당함이 매력인걸요. :)
뵌 적은 없지만, 정말로 그들에게 '당신들이 사람 보는 눈이 없어'라고 말할만큼 멋진 분이시리라 생각 되어요.
고양이들과 사시는군요! 몇 마리나? 어떤 종? 궁금해집니다, 나중에 포스팅 해주세요(사진 등등). 여행 못가시는건 아쉽네요, 누군가를 키운다는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참 많은 걸 희생하는 일이에요. 그쵸? ^-^

2008-04-02 0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2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2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