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니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연히 너를 만나서 11년이란 세월 동안 함께 하면서도 너의 특별함을 알아준 것도 아니고, 그 세월 동안에 너에게 잘해준 적도 없고,
누구나 초반에는 그래도 아껴주거나 보살펴준다는데, 나는 그래본 적도 없고.
걸핏하면 아무데나 부딪히게 하고, 더럽게 하고 다니는데 씻겨주지도 못하고, 이쁘게 꾸며주는 건 더더욱 안해주고.
몸이 아픈 거 같은데도 강력한 신호를 보내올 때 까지는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고, 발바닥이 거의 닳아 헤어질 때까지 제대로 된 새 신발도 사주지 않고.
하지만 나는 니가 내 곁에 있는 게 좋았다.
너를 데리고 있을 동안에 이유도 없이 버릴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었어.
그리고 이제 너는 안녕이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누구에게 가는 지도 알 수 없이, 내 곁을 떠났지.
지금쯤 새 주인은 너에게 잘 대해줄까? 갑자기 애처로운 생각이 드는 건 왠 주책이라니.
이제라도 너의 남은 노후가 편안하고 즐겁기를 바래, 1996년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태어난 세피아야…
물건에 대한 집착이 도를 지나치는 것도 문제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 반대라서 문제일 때가 있다.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정이나 감정 투영이 잘 안되고, 고이고이 간직하는 것도 잘 안되고, 더구나 그게 누군가가 준 선물일 경우엔 상대를 섭섭하게 할 뿐 더러, 새 물건이 생겼을 때에도 너무 덤덤해서 자잘한 행복의 순간을 놓치고 사는 거 같은 떨떠름함이 있다.
도저히 더는 못 견딜 상황이 되어 무리해서 새 차를 장만했고, 그걸 위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준비한 게 꽤 오래인데 엊그제 내게 나타난 새 차에 대한 설렘과 반가움은 몇 시간을 채 못 가 쉬이 사그라들었다.
대신, 오늘이 되니, 그래도 폐차를 안하고 가격을 쳐서 받을 수 있다는 기쁨에 오래된 세피아에 대해 너무 홀대가 심했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 감상이 든다.
이건, 순전히 감상을 위한 감상이겠지만, 그래도 생전 처음 무형의 물건에게 애정을 가지고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써보고 싶게 하는, 그런 싱숭생숭 마음은 분명 갑자기 차가와진 가을바람에서 나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