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 - 이상은 in Berlin
이상은 지음 / 북노마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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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 한번쯤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이상은의 책.

2007년에 나온 'Art & Play' 라는 책이 나왔을 때 왠지 모를 호기심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선듯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즘도 아주 가끔 그녀가 TV에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담다디!' 하고 외친다. '담다디'보다 아주 약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럴때마다 '이제 그녀는 예술가야.' 하고 말한다.

 

 꼬맹이였을 때 얼마간 동생과 외가댁에서 지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의 손을 덜어드리고자 그랬던 것인데 골목이 아주 비좁고 회색 콘크리트를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벽이 많았던 높은 곳에 있던 외가댁에 있을 때면 동네 아이들과 밤 늦게까지 노란 가로등 빛을 햇살 삼아 뛰어놀다가 각자의 엄마와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면 치지직-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TV 앞에서 떠날줄 몰랐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지냈더라면 당시에는 어린 아이가 가요무대와 가요톱텐을 모두 애청하고 아침 드라마와 TV 유치원 뽀뽀뽀를 동시에 보지는 못했으리라. 그때는 가요톱텐에서도 나이 많은 가수들이 많이 나왔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부르는 언니, 박남정, 현철, 주현미, 설운도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노래방에 가면 트롯을 부르곤 한다ㅋ) 그 당시 서태지 정도..는 아니었나? 아무튼 그정도로 센세이션 했던 가수가 이상은이다. 이들(서태지 빼고)이 모두 같은 시기에 나온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어린시절 기억속에는 함께 존재하니까 뭐... 특히 담다디 춤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는데 그정도로 다리 관절을 흔들어재끼는 건 정말 새로웠었다. 여자 가수는 청초하고 아름답다는 게 대세였던 그 때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키가 멀대만해서 삐쩍 마른 이상은의 모습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담다디 이후 비교적 조용했던 그녀의 행보를 어깨너머로 주워듣던 나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신선했다. 우선 그녀는 여느 연예인과는 다른 삶을 사는 듯 했다. 예술가라는 말이 딱 어울린달까. 그녀는 그동안 대중에게 잊혀졌던것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자기의 삶에 충실하다 보니 대중에게 '나 이렇게 살아요' 라고 들어내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은의 음악을 '담다디' 정도로만 기억했던 나는 친구가 선물해 준 어떤 책 때문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책 말미에 등장 한 그녀의 노랫말을 보고 호기심 반으로 곡을 찾아서 들었는데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게 인연이 되어 가끔 TV에 그녀가 나올때 마다 반가운 마음에 눈길을 떼지 못했었고, 작년에 책이 나왔을 때에도 눈여겨 봐두었지만 읽지는 못했었다. 나는 무엇이든 잊지 않고 있으면 꼭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친구에게 책 선물을 하려고 여행서를 골랐는데 몇달 전에 나온 이상은의 베를린 여행기가 있어서 먼저 읽어보려고 구입했다. 이렇게 나에게 온 책 두 권. 생각보다 작고 손에 쏙 들어온다. 이상은이 썼다는 것 말고는 베를린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굳이 캐내어 보자면 어릴때부터 외국 중에 가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다들 '영국, 프랑스, 미국'을 말할 때 나는 '독일'을 고르곤 했다. 그래서 첫 외국 여행은 꼭 독일로 가고 싶었고,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독일어도 꼭 배우리라 다짐했었다. 인연이 되지 않았는지 첫 외국 여행은 일본에서였고, 영어를 빼고는 중국어를 먼저 배우게 되었었고, 유럽 여행에서도 여행 루트가 맞지 않아 독일은 쏙 뺐었지만 이렇게 다시 인연이 되어 여행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여행서로조차 독일에 관한 것은 처음이다. 오오- 두근.

 

 이 여행서는 참 독특하다. 글 중의 90%는 이상은의 일기 형식을 빌린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그 것의 대부분은 본인이 베를린을 보고 느낀 감상,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예술가 답게 예술에 관해서 보고 느낀 점들이다. 나머지 10% 중 8%는 사진으로 채워있고, 2%는 베를린 여행을 위한 팁이다. 요즘 유행하는 여행서는 주로 에세이 형식으로 개인의 신변잡기가 대부분이고 SATC 스러운 가벼움이 미덕이며, 사진은 한 '된장'하여 본인이 먹은 음식, 지냈던 숙소 등을 고가의 카메라로 멋지게 찍어 미화시키는 것이 유행이다. 이런 여행서는 보는 때엔 한 없이 부러움을 느끼지만 지나고 나면 '내 것이 아닌 사치스러운 무엇'만 남곤 했다. 게다가 요새는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자랑질 여행기'는 볼 수 있다. 더 멋있는 사진도 얼마든지 있고.

 

 이 책 <삶은 여행>은 철저하리만큼 이상은이 본 베를린의 모습이 가려져 있다. 사진들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베를린의 건물이 조금 다른 각도로 찍혀있거나 붉고 푸른 빛으로 물들인 베를린 사람이나 풍경이 몇 장 양념처럼 끼워 있을 뿐 베를린의 모습은 이상은의 글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으로 가려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상은이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여행지에서의 그녀의 셀카도 없다. 베를린에서 뭘 했고, 보았으며, 느꼈는지는 그녀의 독백으로만 알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어떤 잘 찍은 사진을 보는 것보다도 그 여정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특히 내가 짧게나마 여행했던 유럽에서 느낀 것들, 다시 느끼고 싶은 그곳의 공기 같은 것을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유럽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사진을 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여행지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은 섭섭해할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깨알만한 글씨로 베를린의 건물 소개, 간단한 역사 설명, 가격 따위의 여행 팁이 있는데 이런 것에 페이지를 따로 할애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구체적인 여행 팁이라면 '베를린 백배 즐기기' 같은 전문적인 여행길잡이를 이용하면 되니까.

 

 책의 뒤표지에는 이상은이 본인의 곡 중에 여행 노래라는 주제로 5곡을 골라둔 것이 있는데 그 중 '삶은 여행'이라는 책과 같은 제목의 노래는 한번씩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자랑샷으로 가득한 여행서, 그럴싸하게 꾸며진 글로 '나 이렇게 멋지게 여행했다'는 자랑글에 지쳐서 좀처럼 가만가만 읽을만한 여행서가 없다고 느낄 때 이렇게 우연처럼 멋진 책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요즘엔 절실하게 짐을 싸서 지구를 떠나고 싶은 욕구에 부르르 떨곤 하는데, 그런 열망을 억지로 식혀야 하는 아쉬움을 달래주어서 참 고맙다. 실은 열흘 전 쯤에 작정한김에 여행 짐을 싸려고 어디로 갈지 생각해보니 어이없게도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는데, 정말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면 베를린으로 가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다음 여행은 꼭 여행자로서 떠나서 현지인처럼 생활해보고 싶었는데 베를린이라면 나를 이방인+현지인으로서 맞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내일이면 같은 책을 받아 읽을 나의 친구에게도 나와 같은 바이러스가 전해지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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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도 오랫동안 읽은 책들에게 배신 당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여간해서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도 믿지 않는다. 일단 '별로일거야'라고 의심을 하고 읽어야 정말 그랬을 때 실망이 덜 하니까. 특히 일본 소설에 대한 실망은 상당히 컸다. 가벼움이 무기인 일본 소설. 그게 너무 심해지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된다. 읽긴 읽는데 읽는 중에도, 읽고 나서도 허망하고 종이를 넘긴 시간이 아깝기 까지 하니 말이다. 게다가 나처럼 읽고 싶은 책은 산더미인데 읽는 속도가 안따라주는 사람은 한 권의 책이라도 알뜰살뜰하게 참기름 한 방울처럼 쥐어짜내며 알참을 요구할수밖에 없다. 실망이 거듭되니 아예 기대를 하지 말자는 쪽이 되어버려서 이번에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통통튀는 제목의 책을 쥐고도 '흥-' 으로 일관했다. 책장에 꽂은지 며칠이 지나서도 의무적으로 '저걸 읽어야하는데' 했을 뿐 일부러 훨씬 최근에 내게 온 책부터 읽곤 했던 것이다.

 

 요즘 이 책을 많이 읽는듯 해서 나도 이 때 읽지 않으면 영영 읽지 못할것 같아 어제 밤에 펼쳐들었다. 책 띠지에는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오가는 지브리 애니메이션풍 초특급 청춘소설'이라도 으쓱으쓱 하는 문구가 있다. 절대 안 믿는다 이런 문구 따위! 한번 더 흥! 하고는 내 멋대로 읽기 시작.

 

 같은 클럽의 대학 1년 후배 여학생을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은 확실하게 들이대는 것도 아니고 멀뚱멀뚱하니 여자 주변을 맴돌면서 우연을 가장해 필연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한다. 딴에는 남자답게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고, 그 여자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멋지게 구해주고 싶지만 여자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는 그. 말하자면 자기 마음을 고백하고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면 좋고, 하는 식으로 여자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남들이 자기 손을 귀엽다고 하면 '단연코 풀빵 쪽이 훨씬 귀엽지요'라는 여주인공은 내가 봐도 사랑스럽다. 곧이어 이 여학생을 좋아하는 남자주인공 조차도 그녀가 살짝 주먹 쥔 '친구펀치'를 보고 '찹살떡 같은 주먹'이라 표현한걸 보면 그 손 모양이 어떨지 짐작 간다. 조근조근하는 그녀의 말투는 띠지에서 말했듯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속 꼬마 주인공 처럼 귀엽기만 하다. 그런 순진무구함이 소설의 판타지적 요소를 더 부각시킬 수 있었던 듯하다.

 

 소설에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뒤를 졸졸 따라 밟으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사소한 것에서 엮이는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신기한가를 보여준다. 밤 동안에 본토초 거리를 걷는 동안 이상야릇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남은 남자와 여자 각각 다르지만 그것이 나중에 두 사람이 함께 돌이켜보면 묘하게 일치되는 경험이 될거라는 생각에 소설 밖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도 두근거렸다.

(본토초 거리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난기 많은 요괴 소굴 같은 곳이랄까.)

 

 순간순간 등장하는 작가의 재치있는 설정이나, 동화속 이야기를 보듯 한 판타지적 요소, 그리고 주인공의 순진함 때문에 빨려들어가듯 책을 읽었다. 특히 작가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앞서 말한 풀빵같은 손이라거나 찹살떡이라거나 친구펀치(엄지가 안으로 가도록 쥔 주먹은 밖으로 가게 쥔 주먹보다 약하게 쥐어져서 친구의 마음으로 때릴때 유용하다는 ㅋ) 같은 것들은 다 자란 나의 가슴이 막 간질거릴 정도로 귀엽다. 설탕 바른 사과 사탕이나 어떤 것보다 단 맛이 나는 꿀 감기약도 그렇다. 주인공 외에 등장하는 인물은 요상하지만 매력있고 친근해서 한 편의 발랄한 뮤지컬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 처럼 경쾌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아멜리에에서 아멜리에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것을 이 책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허세 부리지 말고 일기일회(일생 한번의 인연)를 즐겨'라고 쿨하게 던지는 문장들을 읽으면 소설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싶다. 술 취한 아저씨가 여주인공에게 은근히 기대며 주무른다거나, 변태 아저씨들이 모여서 춘화를 보고 므흣해 하는 것(이 마저도 개그 요소로 변해버려 전혀 변태스럽게 느껴지지 않지만)만 순화시키면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흥겹게 책을 읽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린아이 같은 면은 늘 지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도 그렇고 지금도 월트디즈니 만화라거나 스파이더맨 시리즈 같은 걸 좋아한다. 그런 어른들의 허한 동심을 쏙쏙 채워줄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책이 나타났다. 아- 기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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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꾸물 2008-09-24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재밌게 읽은 책인데...서평 잘 봤습니다~~!!^^ (추천도 했어요...생색..ㅎㅎ)

길고양이 2008-09-25 12:22   좋아요 0 | URL
꾸물꾸물 님 반갑습니다^^
평이 좋은 책인데 저는 기대를 안하고 읽어서 더 좋았던것 같아요^^
추천 감사합니다 ㅎ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철도원, 프리즌 호텔 등으로 유명한 작가 아사다 지로의 최근 번역작품이다. 그의 책은 한 권도 읽어본적이 없었지만 도서관에 가면 꼭 일본문학 쪽으로 가서 한번쯤 만지작거리다가 나오곤 했다. 영화로 만들어진 <철도원>은 영화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는데, <프리즌 호텔> 만큼은 독자들의 평이 좋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지만 여직 기회가 없었다.

 

 일본 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걸로 알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한 학급에 몇몇은 일본 가수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인터넷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그 때에는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서 일대일로 불법 파일을 받아보는 것 같았다. 애니매이션이나 코믹 같은 것이야 만화방이 생기기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읽곤 했지만 영화나 소설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일본 영화를 본 것은 <러브레터>였다. 물론 그 전에도 일본영화를 본적이 있겠지만 정식 수입이 되지 못하거나 수입되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패션 디자인에 취미가 있던 친구는 일본의 매체를 자주 접하고, 원서 코너에서 잡지를 사서 읽거나 J-POP을 듣는 등 일본문화에도 빨리 익숙해졌다. 그 친구를 통해 <러브레터>가 정식 수입되기 전 비디오 녹화본으로 받아서 볼 수 있었다. 그닥 좋지 않은 화질의 비디오였지만 내 주변에선 대중적이지 않았던 일본 영화를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에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 만화를 보면 꼭 등장하는 감초 연기자의 유머에 웃으면서 뿌옇게 처리된 특유의 화면과 배경에 등장한 하얀 눈에 반했었다.

 

 영화 <철도원>의 장면을 보았을 때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잔잔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비슷한 분위기라고 기억하는듯 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철도원의 원작자가 아사다 지로 라는 것을 기억해두었다. 그렇게 알게 된 그의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된 것이다.

 

 7가지의 단편들을 모은 이 책을 받아들고는 등골이 오싹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일전에 읽은 일본 소설 가운데에는 잔잔하지만 정곡을 찔러 은근히 사람을 놀래키거나 공포에 질리게 하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사다 지로의 스타일을 마스터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조금 갸우뚱 하기도 했다. 요즘은 하도 잔혹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많아서 왠만해서는 꿈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공포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심심한 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사다 지로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떻게 '오싹'함을 그만의 이야기 꾸러미로 만들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작은 방에 온식구가 누워 잠을 청할 때 팔베개를 해주시며 옛날 이야기를 해주던 아빠가 생각났다. 그리고 때가 되면 큰댁에 모여 늦게까지 뛰어 놀다가 밤이 되면 전깃불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시던 할머니도 생각났다. 이 책의 일곱 이야기들은 그런 것들이다. 하나같이 죽은 사람이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슬프고, 유령들 덕분에 무섭고, 옛날 이야기 같이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인물 한명, 한명 애정을 가지고 심정이나 사연을 애틋하게 그려낸 부분에서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작가의 시선 또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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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후르츠 캔디
이근미 지음 / 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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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인공 조안나는 지방 캠퍼스 대학을 나와 별 볼 일 없는 스펙에 몸매도 평범, 얼굴도 평범, 집안도 평범한 사회 초년생이다.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늘 그렇듯 '달콤한 캔디'를 입에 물 평범한 주인공 되시겠다. 안나는 광고계의 초일류 대기업 '자이언트 기획사'에 못먹는 감 찔러나보자는 심정으로 원서를 내보는데 마침 그 회사에서 신입사원 채용시 '학벌을 보지 않고 뽑아보자'는 새로운 방침으로 모집을 해서 합격을 한다. 늘 일등을 놓치지 않고 야무진 친구 수희의 조언으로 짝퉁 명품을 둘둘 휘감고 출근 하는 안나. 그런데 회사의 전무(회장 아들)의 성이 조씨인데 이런 저런 농담섞인 얘기 끝에 전무의 사촌 동생이름도 조안나라는 걸 알게 된다. 일이 점점 요상하게 풀리기 시작해서 급기야 사내에 '조안나가 조전무의 그 사촌동생'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안나는 팔자에 없는 공주 연기를 하게 된다. 때를 봐서 '나는 그 조안나가 아니'라고 털어놓으려 했지만 번번히 기회를 놓치면서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잘 생기고 잘 난 '나빈우'라는 남자와 얽히면서 싹트는 애정라인.

 

 이 소설을 '칙릿 류'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정황이 칙릿스럽다. 예전의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 평범녀가 초반엔 자기주도형으로 밀고나가다가 왕자님과 사랑에 빠지고 결말에는 유순한 사랑의 여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피앤딩 하는 것과 달리 요즘 칙릿은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거나 사랑보다 일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리 만족이라고 해야하나. 조안나가 회사 일을 하면서 겪는 사건들, 인간관계의 어려움, 진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끊임없이 자기를 비교하게 되는 것에는 공감을 할 수 있었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딘 것이 자기 스펙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대기업이었고, 그 안에서 재벌 가족이라는 오해 때문에 공주로 둔갑해서 고초를 겪은 것, 백마 탄 왕자를 만나서 짝사랑을 하며 그를 포기하려다가 마지막엔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결말을 맺는 것은 조금 진부하지 않나 싶다. 본래 드라마를 보더라도 주인공이 병에 걸린다거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앓이 하는 절절한 스토리 보다는 차라리 극악한 주인공이 나오거나 사랑을 하더라도 좀 더 현실적으로 지지고 볶는 내용을 선호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닥 이성적인 편은 아닌데도 소설이나 영화 등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을 대할 때는 '이상'보다는 '이성'을 택하게 되더란 말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얌채가 되었던지.

 

 당신은 어떤 오해를 받고 있습니까?

이근미 작가는 지인들에게 위의 질문을 해 보았다는데 '자신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답변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후르츠 캔디> 라는 제목을 보고 '어쩌면'이라고 토를 달아놓은 것이 마냥 달콤한 사탕은 아니겠구나 싶긴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내용과 상당히 닮아있어서 더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에 놀라는 재미가 쏠쏠한데 말이다. 난 판타지물이나 읽어야되나봐.)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힘든 것들 중에 하나는 조안나가 겪은 것처럼 남들이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 때문이었다. 수 년도 아니고 겨우 얼마 알아가는 것 뿐인데도 서로간에 관계를 맺고 함께 일을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저 사람을 알아'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지레짐작으로 '이런 사람이겠거니' 하는게 오해가 되어서 나는 나대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다리가 찢어지는 줄도 모르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작가는 20대라면 누구나 겪는 것이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하긴 이제 막 젖살이 완전히 빠지는 20대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판에 남을 오해하지 않는게 더 이상한걸지도.

 

 절반 이하의 공감과 나머지의 실망을 가지고 읽었던 책이다. 칙릿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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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로드 - 길 없는 길 따라간 세계대학일주
박정범.권용태.김성탄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해외여행이란걸 해본 것은 배를 타고 일본에 갔을 때이다. 푹푹 찌는 섬나라의 폭염에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하루는 기차에서, 하루는 숙소에서 머물기를 반복하면서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끊임없이 걷고 도 걸었다. 집에 돌아오니 훈장처럼 양 발바닥에 커다란 물집이 잡혀있었지만 보호자 없이 떠난 여행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여행 중엔 발이 아프다는 투정한번 없이 잘도 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 후유증을 겪듯이 나 또한 집에 돌아온 후에 여행지에 대한 향수를 더 깊이 느끼곤 한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볼걸, 하고 아쉬운 점도 한둘이 아니다. 엄청난 더위에도 음료수 한 병 사 먹기가 겁이나서 식수 시설을 믿고 병에 물을 받아 마셨고, 아이스크림도 딱 한번 그것도 엄청 고심해서 도라애몽 모양의 쭈쭈바를 사먹었을 뿐이다. 맵고 짠 음식을 즐기는 나에겐 입에 맞지 않는 일본 음식 때문에 맥도날드가 차라리 편했고, 돈이 없을때는 가져온 라면을 봉지에 끓여먹곤 했다. 그것도 하나의 추억이지만 그래도 다음에 일본에 갈 일이 있으면 먹고 토하는 일이 생겨도 현지 음식만을 먹으리라. 그리고 꼭 대학 탐방을 해보리라는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캠브리지를 들렀다. 차비와 약간의 기념품 사는 돈을 빼면 캠퍼스 구경은 돈도 안들고 참 좋다. (근데 캠브리지에 있는 대학들은 마음대로 못들어가게 하더라 ㅠㅠ) 막연하게나마 나처럼 외국 대학 구경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거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캠퍼스로드>를 읽는데 적잖이 놀랐다. 바로 '최초의 세계대학 일주' 라는 문구 때문이다. '대학일주'라는 주제로 여행을 했던 사람들이나, 나처럼 잠깐 구경하는 정도로 시도한 사람은 있어도 본격적으로 '세계대학일주'를 목표로 대안여행을 하고 그것을 책으로 펼친 것은 아마 처음인가보다. 관광이나 유학, 연수가 아닌 '대안여행'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세 명의 청년은 유학열풍, 철학이 없는 관광만 쫓는 것보다는 의미있는 여행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학일주인데, 세계를 범위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심가질만한 대학을 방문하여 현지의 학생들과 교류하고 한국을 알리자는 목표로 여행을 계획한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경비 등은 본인들의 학교와 몇 군데의 기업에 협조를 얻었다고 한다. (여행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나름 명문대생들이라 기업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학교의 스펙도 작용한듯.)

 

 그들이 방문한 대학은

중국 / 홍콩 / 베트남 / 태국 / 말레이시아 / 싱가포르 / 인도

오스트리아 / 그리스 / 터키 / 폴란드 / 체코 / 스페인 / 포르투갈

브라질 / 칠레 / 아르헨티나 / 남아공 / 짐바브웨

이렇게나 다양하다.

 

 중국에서 한국 유학생은 몇배나 비싼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듣는데 그 돈이 모여서 학교 건물 하나를 새로 세웠다는 것, 베트남에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 많다는 것,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교묘하게 그 자유를 막는 나라의 모순된 모습 등을 보고 한국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학교 탐방의 최대 장점은 현지학생과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나도 현지인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지만 간단한 실용회화 말고는 할 말이 없었고, 그나마 숙소에서 만난 사람이나 숙소 주인, 가게 주인, 현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과의 대화 말고는 특별히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힘들어서 많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생 끼리는 각자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장단점과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솔직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을것이기에 그런 그들의 여행이 몹시 부러웠다. 일반적인 여행서는 에세이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듯 이상적인 여행기가 될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이렇게 현지인과 만나서 비교적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는 것 까지 질문하고 대답하는 경험을 적었기에 더욱 현실감이 있다. '개인의 일기' '개인만의 여행'을 주제로 한 여행서가 유행인 요즘, 어찌보면 <여행=사치> <여행자=이상주의자>라는 공식을 깨버리는 책이 아닌가 한다.

세 청년은 같은 대륙 안에서 이동할 때에는 자동차를 렌트(리스)해서 다니고 숙박은 캠핑장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좋은 팁이 될듯 하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두루 거치는 여행이기에 각 대륙마다의 문화적 특징이나 각 나라의 시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 한국학생이 한국을 알리겠다고 시작한 여행과 이벤트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흥미롭다.

 

 이미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버거운 미션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여행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밋밋한 여행기가 될것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대학을 탐방해서 한국을 알린다는 목적을 가지고 현지의 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대학생만의 특권일지도^^ 학생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볼만 한 여행 주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여행을 해볼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몇 남지 않았지만 펜팔 친구들을 만나러 떠나보면 어떨까. 펜팔을 처음 시작한 중학생 때 부터 꿈꿔오던 여행이 아니던가. 여태까지는 내가 나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어 느끼는 일방적인 여행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좀 더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의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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