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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 - 이상은 in Berlin
이상은 지음 / 북노마드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아- 한번쯤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이상은의 책.
2007년에 나온 'Art & Play' 라는 책이 나왔을 때 왠지 모를 호기심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선듯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즘도 아주 가끔 그녀가 TV에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담다디!' 하고 외친다. '담다디'보다 아주 약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럴때마다 '이제 그녀는 예술가야.' 하고 말한다.
꼬맹이였을 때 얼마간 동생과 외가댁에서 지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의 손을 덜어드리고자 그랬던 것인데 골목이 아주 비좁고 회색 콘크리트를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벽이 많았던 높은 곳에 있던 외가댁에 있을 때면 동네 아이들과 밤 늦게까지 노란 가로등 빛을 햇살 삼아 뛰어놀다가 각자의 엄마와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면 치지직-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TV 앞에서 떠날줄 몰랐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지냈더라면 당시에는 어린 아이가 가요무대와 가요톱텐을 모두 애청하고 아침 드라마와 TV 유치원 뽀뽀뽀를 동시에 보지는 못했으리라. 그때는 가요톱텐에서도 나이 많은 가수들이 많이 나왔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부르는 언니, 박남정, 현철, 주현미, 설운도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노래방에 가면 트롯을 부르곤 한다ㅋ) 그 당시 서태지 정도..는 아니었나? 아무튼 그정도로 센세이션 했던 가수가 이상은이다. 이들(서태지 빼고)이 모두 같은 시기에 나온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어린시절 기억속에는 함께 존재하니까 뭐... 특히 담다디 춤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는데 그정도로 다리 관절을 흔들어재끼는 건 정말 새로웠었다. 여자 가수는 청초하고 아름답다는 게 대세였던 그 때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키가 멀대만해서 삐쩍 마른 이상은의 모습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담다디 이후 비교적 조용했던 그녀의 행보를 어깨너머로 주워듣던 나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신선했다. 우선 그녀는 여느 연예인과는 다른 삶을 사는 듯 했다. 예술가라는 말이 딱 어울린달까. 그녀는 그동안 대중에게 잊혀졌던것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자기의 삶에 충실하다 보니 대중에게 '나 이렇게 살아요' 라고 들어내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은의 음악을 '담다디' 정도로만 기억했던 나는 친구가 선물해 준 어떤 책 때문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책 말미에 등장 한 그녀의 노랫말을 보고 호기심 반으로 곡을 찾아서 들었는데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게 인연이 되어 가끔 TV에 그녀가 나올때 마다 반가운 마음에 눈길을 떼지 못했었고, 작년에 책이 나왔을 때에도 눈여겨 봐두었지만 읽지는 못했었다. 나는 무엇이든 잊지 않고 있으면 꼭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친구에게 책 선물을 하려고 여행서를 골랐는데 몇달 전에 나온 이상은의 베를린 여행기가 있어서 먼저 읽어보려고 구입했다. 이렇게 나에게 온 책 두 권. 생각보다 작고 손에 쏙 들어온다. 이상은이 썼다는 것 말고는 베를린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굳이 캐내어 보자면 어릴때부터 외국 중에 가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다들 '영국, 프랑스, 미국'을 말할 때 나는 '독일'을 고르곤 했다. 그래서 첫 외국 여행은 꼭 독일로 가고 싶었고,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독일어도 꼭 배우리라 다짐했었다. 인연이 되지 않았는지 첫 외국 여행은 일본에서였고, 영어를 빼고는 중국어를 먼저 배우게 되었었고, 유럽 여행에서도 여행 루트가 맞지 않아 독일은 쏙 뺐었지만 이렇게 다시 인연이 되어 여행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여행서로조차 독일에 관한 것은 처음이다. 오오- 두근.
이 여행서는 참 독특하다. 글 중의 90%는 이상은의 일기 형식을 빌린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그 것의 대부분은 본인이 베를린을 보고 느낀 감상,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예술가 답게 예술에 관해서 보고 느낀 점들이다. 나머지 10% 중 8%는 사진으로 채워있고, 2%는 베를린 여행을 위한 팁이다. 요즘 유행하는 여행서는 주로 에세이 형식으로 개인의 신변잡기가 대부분이고 SATC 스러운 가벼움이 미덕이며, 사진은 한 '된장'하여 본인이 먹은 음식, 지냈던 숙소 등을 고가의 카메라로 멋지게 찍어 미화시키는 것이 유행이다. 이런 여행서는 보는 때엔 한 없이 부러움을 느끼지만 지나고 나면 '내 것이 아닌 사치스러운 무엇'만 남곤 했다. 게다가 요새는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자랑질 여행기'는 볼 수 있다. 더 멋있는 사진도 얼마든지 있고.
이 책 <삶은 여행>은 철저하리만큼 이상은이 본 베를린의 모습이 가려져 있다. 사진들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베를린의 건물이 조금 다른 각도로 찍혀있거나 붉고 푸른 빛으로 물들인 베를린 사람이나 풍경이 몇 장 양념처럼 끼워 있을 뿐 베를린의 모습은 이상은의 글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으로 가려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상은이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여행지에서의 그녀의 셀카도 없다. 베를린에서 뭘 했고, 보았으며, 느꼈는지는 그녀의 독백으로만 알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어떤 잘 찍은 사진을 보는 것보다도 그 여정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특히 내가 짧게나마 여행했던 유럽에서 느낀 것들, 다시 느끼고 싶은 그곳의 공기 같은 것을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유럽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사진을 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여행지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은 섭섭해할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깨알만한 글씨로 베를린의 건물 소개, 간단한 역사 설명, 가격 따위의 여행 팁이 있는데 이런 것에 페이지를 따로 할애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구체적인 여행 팁이라면 '베를린 백배 즐기기' 같은 전문적인 여행길잡이를 이용하면 되니까.
책의 뒤표지에는 이상은이 본인의 곡 중에 여행 노래라는 주제로 5곡을 골라둔 것이 있는데 그 중 '삶은 여행'이라는 책과 같은 제목의 노래는 한번씩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자랑샷으로 가득한 여행서, 그럴싸하게 꾸며진 글로 '나 이렇게 멋지게 여행했다'는 자랑글에 지쳐서 좀처럼 가만가만 읽을만한 여행서가 없다고 느낄 때 이렇게 우연처럼 멋진 책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요즘엔 절실하게 짐을 싸서 지구를 떠나고 싶은 욕구에 부르르 떨곤 하는데, 그런 열망을 억지로 식혀야 하는 아쉬움을 달래주어서 참 고맙다. 실은 열흘 전 쯤에 작정한김에 여행 짐을 싸려고 어디로 갈지 생각해보니 어이없게도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는데, 정말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면 베를린으로 가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다음 여행은 꼭 여행자로서 떠나서 현지인처럼 생활해보고 싶었는데 베를린이라면 나를 이방인+현지인으로서 맞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내일이면 같은 책을 받아 읽을 나의 친구에게도 나와 같은 바이러스가 전해지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