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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공중파밖에 안 나오는 우리집 TV... 늦은 시각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드라마를 TV에서 종종 보여주곤 했는데 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시즌별로 대충 처음부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어서 즐겨보지는 못했다. 주변에서 다들 재미있다고 하고, 몇 에피소드 안 되지만 가끔 TV 앞에서 앉아서 보고 있으면 모르는 내용은 추측도 하면서 보는 순간만큼은 꽤 스릴(?)있게 봤던 것도 같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우선 온라인 서점 나들이 때마다 예쁜 표지 때문에 궁금했던 책이다. 나는 주로 인터넷으로 신간구경을 하는데, 오프라인 서점보다는 못하지만 몇 장 정도는 ‘미리보기’ 서비스를 이용해서 꼭 읽어본다. 책의 뒤표지를 보니 대상 독자가 주로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기의 주부’에 빗대어 놓았다던가 ‘마놀로블라닉(Sex and the city 의 여주인공이 홀랑 빠진 명품 구두 브랜드)도 스타벅스(된장녀...라고 하면 너무 부정적이고 칙릿이라고 하면 조금 긍정적이려나?)’를 들먹인 소개글이 그랬다. 둘 다 소설로 읽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야라서 망설이긴 했지만 미리보기로 읽어본 결과 그렇게 가벼운 내용이 아닌 것 같아서 읽어보기로 했다.
영국의 런던 근교에 자리잡은 알링턴파크라는 가상의 마을에 사는 주부들이 주인공이다. 하루 동안 그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상과 그녀들이 느끼는 감정, 그녀들 주변과의 조화, 관계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책 소개에 나와 있듯이 그 묘사가 아주 탁월했다.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을 30대 후반의 여자로서의 변해가는 자신과 아직도 젊은이 같고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 정말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나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아이들... 주부 우울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미 우리 주변에서 주부들이 호소하는 애로사항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쉬웠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여자가 더 피곤한 점은 여자에겐 아내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더라. 그 말을 듣고 아직 결혼도 안 한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매일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윗연배의 여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졌는데, 그 때마다 예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여자로서의 애로사항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고민이 여자로 하여금 온전히 나 자신과 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가사일과 가족 뒷바라지, 집안대소사 챙기기, 아이 돌보기 등등 아줌마로서의 삶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이중, 삼중고를 겪게 되는 것도 같다. 지혜로운(?) 여자들은 집과 일, 가족과 나 사이에서 어느 정도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자신에게 오는 일부 비난도 쿨하게 받아들이지만 대부분은 ‘슈퍼맘’이나 ‘원더우먼’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남자들의 하루 또한 무척 고되다.)
어쩌다보니 사회생활하는 기혼 여성의 예만 들었는데, 이 책 안에는 그냥 누구나 ‘주부’라면, 혹은 여자라면 겪었음직한 에피소드들이 들어있다. 남자든 여자든 일단 결혼을 하면 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게 되고, 희로애락을 털어놓고 슬픔을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가 아닐까 싶다. 믿고 사랑하는 만큼 실망도 크고... 원래 가까운 사람일수록 작은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쉬우니까...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도 ‘바깥일만 알고 집안일은 모르는 남편’과 ‘집안일만 알고 바깥일은 모르는 나’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골이 벌어졌을 때 삐걱거림이 드러나곤 한다.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그냥 무시해버리기도 하고, 서로를 탓하기도 하고, 서로의 가족(남편의 부모형제와 아내의 부모형제)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마지막에는 굳이 왜 다투었는지, 뭐가 불만인지 조목조목 말하지 않아도 손을 꼭 잡거나 다정한 한마디, 눈빛에 서로 마음을 풀게 되는 것도 부부인 듯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외국사람들은 부부관계도 쿨할것 같고 이혼은 밥 먹듯이 하고 매일 섹시한 표정을 짓고 살 것도 같았는데 어느 나라나 TV에는 개그 빼곤 대체로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서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들이 느꼈을 헛헛함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책을 읽는 동안 감정이입을 해서인지 내 마음도 허해지곤 해서 결말에서는 시원하게 뻥! 뚫어줬으면 했었다. 사람 사는 게 영화처럼 극적인 해피앤딩일수는 없을 터. 오히려 이 책에서처럼 일상은 일상으로 남되 소소하게 느껴지는 작은 행복들을 누리면서, 서로를 보듬어주며 위로 아래로 곡선을 그리듯이 사는 것이 진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