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와 결혼한 순간부터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진정으로 자신을 '아내'라고 불러줄 사람, 자유와 독립을 반납하고 진정으로 '종속'되고 싶은 단 한 사람을 진정 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와 삼 년을 살았지만 난 늘 혼자였기에 그녀가 떠난 지금도 결락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그녀의 의도된 배려였을까.

 

'전은진-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中'

-------------------------------------------------------------

 물론 하루하루가 똑같다고 여기면서도 진이 그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행복도 없고 커다란 불행도 없이, 작은 것들에 만족하거나 실망하면서, 그저 예측할 수 있는 일들만을 겪으며 고요히 늙어가는 것이 삶이라고 오래전부터 믿어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혁명도 없고 재앙도 없고 축제나 드라마도 없고 따라서 무용담도 없을 그 삶에 스스로 기대할 것 또한 없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고 미래를 꿈꾸지도 않았다.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닌 것 같은 의구심.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 하지만 어차피 되돌릴 수는 없을 거라는 체념.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그렇게 느낄 만한 데에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

 

'김미월-여름 팬터마임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얼마나 어줍고 공소한 것인지. 소유에의 욕망-그러나 과연 어디에 잡아둘 것인가. 움켜쥔 손아귀에? 질긴 주머니에? 수갑을 채우고 밧줄로 동여매 견고한 금고 안에 넣은 뒤 창살을 두른 감옥에 가둔다. 그러는 즉시 우리 자신도 상대로부터 차단된다. 사랑에 있어 소유는 무엇보다 우선, '불가능'하다.

 사랑은 소유할 수도, 강탈할 수도, 점령할 수도 없다. 어쩌면 온전히 욕망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도 쉽게, 힘없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나는 반죽처럼 묽게 풀어진다. 어딘가에 담기지 않고서는 형체조차 유지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옅어졌음을 안다. 세상 모든 연인처럼 발을 땅에 딛지 못한 채 낮은 공중을 걷는다. 가볍지 않다. 질척이는 공중이다. 몽롱함, 취기, 현기증.....더불어, 이성과 의지에 반(反)하는 그것들에의 몰입.

 사실 사랑은, 불편하다. 쾌적하지도 산뜻하지도 않다. 몸뚱어리는 무겁게 늘어지고, 두근거림은 진정되지 않고, 허열과 소양감에 시달리고, 익숙했던 시공간은 기이하게 뒤틀려 어지럽게 일렁인다. 걷잡을 수 없는 환시와 환청과 환취와 환미와 환촉의 습격. 긴장과 초조로 경직되면서도 마구잡이로 끈적이며 물크러진다. 제때 거두지 못한 과일처럼 너무 익은 채로 떨어져 속수무책 바닥을 뒹군다. 존재의 무력한 분해. 목마름, 말 더듬, 울먹임과 뒤척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쩔 줄 모름. 결코 부릅뜰 수 없는 눈이 자꾸만 감긴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괴로운 그리움의 밤.

 녹아내려, 원하는 것은(어쩌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그(그녀)를 손아귀에 넣는 것이 아니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접근. 그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다. 단지, 접촉. 그에게 닿는 것이다. 그저, 단지, 가까이.

 그리하여 스며듦의 차례다. 스며든다, 딴은 서럽기도 하지만 짐짓 침착하고 차분하게. 스며든다. 쑤욱 빨려 들어가지 말고, 꿀꺽 삼키거나 삼켜지는 대신, 그저, 단지, 스며드는 것이다. 습기처럼 조용히. 염료처럼 단호히, 단풍처럼 거스를 수 없이, 연인에게 스며드는 것. 돌이킬 수 없이, 사랑으로 물이 드는 것이다.

 스며듦으로 나는 이제 그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나도, 그도, 우리도,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되어 있다.

-------------------------------------------------------------------------------------

그에게 다가갈 수는 있지만, 가 닿지는 못한다. 그를 향해 낙하할 수는 있지만, 착지하지는 못한다. 무사히 지상에 닿지 못하고 그만 나뭇가지에 낙하산이 걸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병사처럼, 나는 외로워진다. 깊고 어두운 숲 속으로 영원히 삼켜진 새끼 짐승처럼, 나는 두려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년에 한 번 정도 날 찾아와요.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매년 이맘때 이 도시를 방문해서 이 집의 문앞에 적힌 내 이름을 읽어줘요. 내 이름이 있으면, 나는 여기 살고 있는 거니깐. 그러면 망설일 필요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여기서 한두 주일 지내요. 내게는 낡은 타이프라이터가 한 대 더 있으니 그걸 사용해서 내 방에서 번역 일을 해도 좋아요. 이 집 부엌은 비좁긴 하지만 간단한 아침식사나 수프 정도는 만들어 먹을 수 있죠. 그리고 바로 아래 골목에는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많고 상점에서는 언제든지 과일과 빵과 만두, 맛있는 커피를 살 수 있답니다. 이곳은 일 년 내내 창문을 열어둘 수 있어요. 저녁때는 폐허로 산책을 가요. 원한다면 이 방에서 당신의 난초나 새를 길러도 좋아요. 당신의 난초나 새에게 당신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고 아침마다 말을 걸어도 난 조금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나도 몇시간이고 난초와 새와 나란히 앉아 당신이 모국어로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당신은 난초에게 물을, 새에게 모이를, 그리고 내게는 당신의 언어를 주는 거죠. 내게 그것은 가사 없는 사랑의 노래처럼 들릴 거예요. 당신의 가방을 일년 내내 이곳에 놓아두어도 괜찮아요. 그런 유항가를 알고 있나요? 가방을 놓아두면 이듬해에도 다시 찾아오게 된다는......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하겠만, 당신이 놀랄 만큼 많은 일을 함께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밤에는 나란히 앉아 레몬차를 마시면서 내가 쓴 글을 당신에게 읽어주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나의 첫번째 독자가 되는 거죠. 그건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에요. 그렇게 일년에 한 번 정도 날 방문해요. 이 도시에서 휴가를 보내요. 이 도시에서 당신이 가보지 못한 다른 도시를 꿈꿔요. 가보지 못한 도시들에 관한 글을 써요. 함께 꿈으로 여행해요. 그러다 어느해 이 집의 문앞에 내 이름이 없으며, 그때는 내가 더이상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하고, 그리고 더이상 당신을 기억도 할 수 없게 된 걸로 생각해요. 당신에게 읽어줄 것도 없고, 당신의 말을 들을 수도 없어요. 그때부터는 해가 바뀌어도 날 찾아올 필요가 없어요.

 

 

                                                                     '배수아-올빼미의 없음(올빼미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칠 수 있겠니, 이 삶에.

대답이, 아직도 어렵다. 그래도 어떻든, 결국에는 한꺼번에 다 타올라 소멸해버릴 삶이니, 많은 부분 용서가 되거나 위로가 된다.

완전한 매혹은 미칠 듯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터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흔들리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 흔들리지 못해, 나는 여전히 묻고 있다.

언젠가는 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미칠 수 있게니 작가의 말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편이 체중을 실어 업히자 예상하지 못한 무게 때문에 그만 무릎을 바닥에 찧고 말았다. 무릎이 젖었다. 눈발이 굵어졌다. 다시 업혀봐. 이를 악물고 허리에 힘을 줬다. 나도 모르게 끙, 소리가 났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첫 한 발짝 떼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처음 한 발짝이 다음 한 발짝을, 다시 한 발짝을 디딜 수 있게 했다. 대여섯 걸음을 가고 멈추어 섰다. 남편은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허리에 힘을 줘 업고, 부들거리는 다리로 몇 발짝 걷다 멈췄다. 숨을 가눌때마다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학, 학, 학, 학. 골목에 내 숨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송이가 더 굵어진 눈이 펑펑 쏟아졌다. 진창이 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집까지의 거리가 내 일생의 모든 밤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멈췄다 움직이기를 몇 번을 더 해야 끝이 날까. 끝이, 있기는 할까. 나는 남편의 허벅지를 세게 붙잡아 내 등에 바짝 붙였다.

 

'김이설-환영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