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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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압축 파일이라면 서문은 그것을 푸는 암호다"(12). 

이 책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 책의 '서문'(서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유익은 위대한 서문을 만났다는 기쁨보다 서문의 위대함을 깨달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문"은 "저자가 자신의 책 첫 부분에 붙이는 간략한 글"(6)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문이 무에 그리 중요해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까지 사용했을까요? 이 책을 엮은이는 서문을 읽지 않고 곧바로 본문 독서에 들어가는 독자들을 "수영장에서 아무 준비 없이 곧바로 물속에 뛰어들어가는 사람", "아무 목표도 정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자"에 비유합니다. 엮은이의 표현대로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13) 읽지 않고 독서를 시작한다는 것은 책 속에서 길을 잃기 쉽고, 심하면 책을 오독할 위험에도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서문은 간략한 글이지만, 그 간략한 그 글 안에는 "집필 동기와 목적, 체계와 방법론, 주제와 내용 요약"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 대한 변호와 경쟁자에 대한 반박"(10)이 다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문은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참고서처럼 곁에 두고 매번 펼쳐 보아야 한다"(13)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위대한 서문>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제목과 서문과 목차와 심지어 앞표지, 뒷표지까지 충분히 음미한 후에 책을 읽는 독자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서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이 책을 읽었고, 그렇다면 분명 서문도 읽었을 텐데 서문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읽었어도 읽은 것이 아니고 더구나 "참고서처럼 곁에 두고 매번 펄쳐 보아야 한다"는 견지에서 보면, 더욱 읽어도 읽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서문>은 "서른 권의 책에서 뽑은 서른 편의 서문"을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기억에 남는 첫 문장은 있어도 기억에 남는 서문은 없었던지라, 위대한 첫 문장과의 만남이 던져주는 강렬한 울림을 <위대한 서문>에서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서문>만 모아놓은 서문을 읽고 가장 놀랐던 것은, 서문의 다양한 색깔이었습니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의 <격언집>의 서문 같은 경우에는, 서문을 그저 책에 덧붙인 작가의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격언집>의 서문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었고, 격언에 관한 모든 것을 정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격언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헛소리나 늘어놓는 부실한 서문치고 뛰어난 명저는 없다"(13)는 엮은이의 단언처럼, <위대한 서문>을 읽으니 <위대한 서문> 30편을 읽으니, <위대한 서문>은 위대한 명저 30권을 소개하는 또다른 작업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서문을 읽고 그 책이 가장 궁금해진 책은 르네상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라는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입니다. <바보배>는 "세상의 바보들을 싣고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로 항해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110가지가 넘는 유형의 바보를 소개하며 종교개혁 이전이 타락한 사회상을 꼬집는다"고 합니다(25).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서른 권의 책에서 뽑은 서른 편의 서문을 소개하며 서문 앞에 붙인 엮은이의 '제목'에 더 주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엮은이는 서문의 위대함을 논하며, "제목이 압축파일이라면, 서문은 그것을 푸는 암호다"라고 했는데, 이 책에서 엮은이가 붙인 '제목'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엮은이가 붙인 제목 자체가 서문을 읽는 지도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그렇게 제목을 뽑을 수 있는 엮은이의 탁월함이 독서를 할 때마다 '서문'을 되새김하는 버릇에서 길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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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신앙 - 기독교인을 시의성 없고 극단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기독교인답게 사는 길
데이비드 키네먼 & 게이브 라이언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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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시의성이 없고 극단적이다"(33).
교회 안에서만 주로 생활하는 사람이라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이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교인도 있고 천주교인도 있지만, 특히 '기독교인'을 시대에 완전히 어긋나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적인 친구들이 '유독' 기독교인을 별종 취급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념에 '유독' 기독교인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신앙>은 이 시대를 진단하면서 "기독교계가 완전히 시대에 어긋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29) 현상에 우려를 표합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세상은 다원화와 관용을 부르짖으면서도 그것에 '해'가 된다는 믿는 기독교인들의 공적인 표현을 극단주의로 취급하고 공적인 표현 자체를 제한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화의 밑바닥에 깔린 도덕과 윤리 기준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네 마음대로 하라"(48)인데, 종교의 공적인 표현이 불쾌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소리를 높여 피해를 주지 말고 믿으려면 혼자 조용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공인들이 감사의 말이나 인터뷰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고백을 하는 것도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공인으로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고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이고, 어떻게 그런 신념에 일치되게 살아갈 것이며,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62)
<좋은 신앙>은 이렇게 기독교인을 시의성 없고 극단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책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신앙"에 답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역설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신앙은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나옵니다. 저자들이 정의하는 '실천하는 기독교인'이란, "기독교가 단지 문화적 꼬리표가 아니라 생활방식인 사람들"을 말합니다(39). <좋은 신앙>은 안락한 생활대신 복음으로 변화되는 삶을 택한 사람들에게 '좋은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지어진 책입니다.

"좋은 신앙의 실천이란 세상과 그 속의 사람들을 도와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질서 있고 바르며, 풍성하고 후하며, 아름답고 생명과 관계로 번성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게 선이다"(92). 이것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좋은 신앙 = 얼마나 잘 사랑하는가 + 무엇을 믿는가 +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좋은 신앙'이란 상대에게 다가가 성경적 개념의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이를 위해 세상이 복음에 적대적이라고 느낄수록 더 열심히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완수하려면 견해가 다른 이웃들과의 '대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은 "까다로운 대화에 참여하는 데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60)고 말합니다. 

<좋은 신앙>은 신빙성 있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대를 진단(분석)하는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성격을 띠면서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는 뜨거운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현대판 제자도를 가르치는 신개념 교육 교재처럼 읽힙니다. 이 책을 통해 '반문화로 살아간다'는 개념을 모든 교회가 꼭 배웠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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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셀프 트래블 - 2018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32
박정은.장은주 지음 / 상상출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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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봐! 코피나잖아, 나!
내가 여기 오려고
사흘을 엄마랑 싸우고 일하고 잠도 못 자고
비행기 타고 비행기 타고 택시 타고 버스 타고 이렇게 왔는데!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완(고현정)이가 슬로베니아에 있는 연하(조인성)를 찾아가서 한 말입니다. 그렇게 제 머릿속의 동유럽은 "비행기 타고 비행기 타고 택시 타고 버스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입니다. 드라마를 보며, 완이는 3년 만에 18시간이나 걸려 다시 그곳을 찾았는데, '내가 저 슬로베니아 피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려면 앞으로 몇 년이, 몇 시간이 더 걸릴까' 혼자 까마득한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완이는 그곳에 가기 위해 엄마랑 싸워야 했고 밤 새워 일도 해야 했는데, 저는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하며 살아야 갈 수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동유럽 셀프트래블>은 제가 어떻게 살아야 그곳에 갈 수 있는지 가르쳐 주지는 못하지만,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그곳에 갈 수 있는지는 가르쳐주는 고마운 가이드북입니다. 




 


동유럽으로 떠나는 여행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TV 프로그램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드라마 촬영지였던 프라하나 슬로베니아의 피란이 그렇고, 여행예능 꽃보다 누나 촬영지였던 코로아티아가 그렇고, 현재는 둥지탈출 시즌2에서 폴란드를 여행하고 있다), 세계관(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영향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일단 서유럽의 1/2 정도의 물가로 저렴"하다는 것도 한몫하는 듯합니다. 저와 같은 소시민이 해외여행에서 느끼는 가장 큰 장벽은 여행 경비니까요. 

체코의 우울한 회색빛 하늘에 끌렸고, 크로아티아에서 바라보는 눈부신 코발트빛 지중해가 궁금했고, 중세의 건축물이 막연하게 좋았던 동유럽인데, <동유럽 셀프트래블>은 그곳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요, 역사의 도시요, 자연의 도시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까지도 동유럽화, 그러니까 예술과 역사와 자연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전에는 <셀프트래블> 시리즈를 볼 때면, 가장 먼저 살펴보고, 가장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는 것이 바로 '추천 일정'(여행 루트)이었습니다. 몇 박 며칠을 어느 경로로 이동을 하며 여행을 해야, 중요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알뜰살뜰하게 하나라도 더 볼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가 가장 제 여행의 가장 큰 이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유럽 셀프트래블>에서 제가 집중적으로 살펴 본 것은 머물고 싶은 곳 찾기였습니다. 저자가 "꼭 가보기를 바라는, 애정 가득한 여행지"라고 드러내놓고 편애를 하는 '슬로베니아'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강렬한 비극을 남긴 현장"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에 가보아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여행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곳인데,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그곳의 의미를 잊은 채 여행을 하는 것은 야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유럽 셀프트래블>에서 추천하는 루트, 추천하는 여행지는 동유럽을 관통합니다. 소개되는 여행지가 많은 만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세심하게 챙기면서도, 동유럽을 굵직하게 훑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소개하고 추천하는 숙소나 식당이 다른 가이드북이나 다른 <셀프트래블> 시리즈에 비해 숫자가 적은 편입니다. 때로 너무 많은 선택지가 오히려 결정장애를 불러온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거품을 쫙 빼고 꼭 필요한 정보만 챙겨주는 가이드북이 오히려 저와 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훨씬 전략적이고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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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푸른 봄 1
지늉 지음 / 책들의정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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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푸른 봄, 그럼 가까이에서 보면?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은 배우 서강준 씨가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어 화제를 모은 드라마의 원작 웹툰(다음)입니다. 1권은 20대 청춘들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답게 통통 튀는 캐리터들의 향연이었습니다. "명일대학교 경영학부 경영학과 1학년" 여준은 학교에서 5분 거리의 20평 고급 원룸에서 꽤 호화스럽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금수저로, 작은 키에 상냥한 매력이 귀여운 새내기입니다. 이에 반해 군필 복학생 남수현은 모든 점에서 여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큰 키에, 까칠하다 못해 무례해보이기까지 하는 안하무인에,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어 살며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소화하느라 늘 피곤에 쩔어 있는 흙수저 복학생입니다.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은 이렇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어찌하다 보니 여준의 고급 원룸에서 '룸메'로 함께 살아가게 되면서 벌이지는 이야기를 담은 듯 합니다. 1권에서는 여준과 남수현이 '팀플'로 엮이게 된 사연까지만 나오고, 룸메가 되는 이야기까지는 '아직'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까칠하고 차갑기만 한 남수현과 여린 풀잎처럼 싱그럽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여준이 룸메로써 어떤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줄까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1권에서 살짝 드러나는 여준의 숨겨진 아픔과 아직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남수현의 상처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통해 어떻게 치유될지, 두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이 무척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1권밖에 보지 못한 상황에서 작품을 평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청춘들이라면 더 깊이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그림도 스토리도 예쁜 웹툰입니다. 나의 그 시절을 돌아보니, 그때에는 왜 그렇게 세상이 불만이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춘들이라고 몰아부치는 세상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정작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으니까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데, 캐릭터를 확실히 살릴 수 있는 직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인생 '경험'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무엇이든 도전해야 한다는 초조함 속에 하루하루가 흘러갔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으로 머리도 식히고 느긋하게 시간을 즐겨볼까 하는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싱거울 정도로 너무 빨리 읽어버려 1권만 먼저 읽으려 했던 저 자신을 책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웹툰을 마지막 권까지 탑처럼 쌓아놓고 읽어야 제맛인데 말입니다. 전 권을 탑처럼 쌓아놓고 읽을 수 있기를 꿈꾸며,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인 청춘들, 가까이에서 보면 실상은 전혀 다를지도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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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의학자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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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의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의사인 제게 있어 그림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즉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기록'입니다"(6).

성경 공부를 할 때, 학습자료 '명화'를 자주 사용합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카라바조의 <참수 당하는 세례 요한(세례 요한의 목 베임)>과 <성 마태의 소명> 등이 그런 그림입니다. 한 점의 그림 속에는 말로는 다 전달할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또 백 마디의 설명 보다 그림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더 오래, 길고 긴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문자적인 내용뿐 아니라 신앙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사람들만이 더 진하고,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그림의 목소리입니다. 

"한 점의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는데 의사의 시각에서 보는 명화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쏟아낼까요?<미술관에 간 의학자>는 의학과 미술의 공통점으로, "생로병사를 겪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꼽습니다(6). 이 책을 읽으니 신화와 종교가 노골적인 미술의 소재였다면, 질병과 의학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소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끼 안에 손을 집어넣어 배를 만지는 듯한 일명 '나폴레옹 포즈'가 사실은 위장병의 증거라는 것, 고흐의 그림(노랗게 빛나는 별 등)은 압생트 중독의 영향일지 모른다는 것, <커피포트>라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은 커피포트를 그린 정물화가 아니라, "유전병으로 성장을 멈춘 짧은 다리와 그에 걸맞지 않게 큰 머리와 통통한 몸을 그린 화가 자신의 자화상"(183)이라는 것 등이 더욱 그러합니다. 

의사의 시각에서 그림을 보니 역사도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외과는 치루에서 나왔다"는 말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페스트가 어떻게 봉건제도를 붕괴시켰는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는 스페인 독감이 무오년에 어떻게 조선을 강타했는지 등 그림과 의학과 역사가 이 한 권의 책 안에 흥미롭게 녹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염병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을 발발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45)은 처음 알게 된 흥미로운 역사적 해석입니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의 눈으로 그림을 보니 질병에 대한 이해도 새롭지도 깊어집니다. 주변에 갑상샘암으로 평생 호르몬 약을 먹어야 하는 후배가 있는데, 그림을 통해
국내 발병률 1위라는 갑상샘암에 대해 더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학습에 있어서 그림이 무엇보다 좋은 시청각 자료인 것을 다시 한 번 새삼 느끼며 말입니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는 죽음이 일상 가까이 도사리고 있었던 시대가 그리 오래전이 아니라는 것, 달리 말해 지금은 알약 한 알이면 치료될 병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것, 또 무지에서 비롯된 우리 안의 편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비극과 고통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말없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당연시 누리고 있는 '평균 수명'의 축복이 우리가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놀랍고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 덕분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화가도 있습니다. 푸젤리라는 화가입니다. "푸젤리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개념이 거의 전무했던 시대에, '꿈과 악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최초의 화가"(116)라고 하는데, 환상적인 분위기에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이 그 누구의 그림보다 강렬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또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낭만주의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화풍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과 계몽주의 같은 철저한 이성에 반하면서 대신 인간의 복잡한 감정, 환상, 무의식적 충동, 비합리적 행동 등에 주목하는 화풍"(116)이라는 것입니다. 

"한 점의 그림은 수만 갈래의 삶을 보듬고 위로합니다. 때로는 한 점의 그림에서 오랜 상처를 치유할 처방전을 얻기도 합니다"(5).

그림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롭지만, <미술관에 간 의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특히 더 흥미로웠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림이 의학자를 더욱 해박하게 한 것인지, 해박한 의학자가 그림을 더 풍성하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림에 대한 깊은 조예만큼이나 이야기를 참 잘 하는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백 년마다 한번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62)라고 했다는데, 이런 심성을 가진 의사 선생님이 지역마다 한 분씩 계신다면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은 보장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보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는 "다 아는 이야기"도 재밌게 들려줄 수 있는 분입니다. 명화 속 의학 이야기, 지루할 틈이 없을 거라고 살짝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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