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파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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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모르고 있지만 넌 늦어도 3분 후에 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련을 맞게 될 거야"(9).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심드렁하기만 한 우리. 그런 우리를 이 단순한 진리 앞에 불러세워놓고 이처럼 단숨에, 이처럼 강렬하게 전율시킬 수 있는 것이 문학말고 또 있을까. 아니 기욤 뮈소말고 또 있을까.


흡입력 있는 스토리로 유명한 기욤 뮈소가 첫 문장부터 미친 흡입력을 보여주며 본격 스릴러로 독자들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기욤 뮈소라고 하면 아름답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신작을 몇 권 놓친 사이 그는 어느새 '스릴러' 작가로 거듭나고 있었나 봅니다. (소리내 공개적으로 고백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혼자서 <파리의 아파트>를 자꾸 <파리의 연인>으로 읽는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기욤 뮈소의 신작 <파리의 아파트>는 본격 스릴러로 분류되는 작품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크리스마스에 전산 오류로 같은 집을 임대하다니? 연극의 도입부 같은 장면이야"(50).


될수록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전산 오류로 파리의 한 아파트에 함께 기거하게 된 극작가 가스파르와 전직 형사 매들린이 그 아파트의 원래 소유주였던 천재 화가 숀 로렌츠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알게 된 후, 의기투합하여 사라진 마지막 그림 석 점의 행방을 쫓는 중에, 납치되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숀 로렌츠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다시 줄리안의 행방을 쫓기 시작하면서 숨겨진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비극의 뿌리를 파헤치기, 한 사람의 삶이 기우뚱한 순간을 포착하기란 언제나 지난한 일이었다"(349). 400페이지에 달하는 <파리의 아파트>는 비극의 뿌리를 파헤치는 '지난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독자들에게는 심리묘사에도 공을 들이는 그 과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기욤 뮈소는 그 지난한 과정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넌 아빠의 매질을 어떻게 감당해내고 있을까?

"어쩌다가 아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아버지가 되었을까?"(376)

 

비극 속에서도 남녀 간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던 기욤 뮈소가 <파리의 아파트>에서 집중 조명하고 있는 것은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지탱하는 뿌리와도 같아서, 평생 살아갈 힘을 공급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곪아터져 끝내 전체를 썩게 만드는 제일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버지와의 기억이 상처로 남아 가스파르의 현재(술주정뱅이 작가)를 지배하고, 아이를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상처가 매들린의 현재(자주 자살충동에 휩싸이는 여형사)를 지배하는 것을 보면, 부모-자녀라는 끈은 인간의 것으로는 결코 끊을 수 없는 '절대 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어째서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부모와 자식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부모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폭력과 증오심과 복수와 비극으로 점철된 <파리의 아파트>는 우리에게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던져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술과 경제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우리에게 가하는 야만성을 극복할 무기는 예술, 아름다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404).


<파리의 아파트>는 '결국 사랑인가?' '결국 사랑이지!'라는 감상을 남깁니다. <파리의 아파트>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부모에게 갚을 수없어 자녀에게 흘려보내는 게 내리사랑이라면, 부모에게 받은 상처도 부모를 통해서는 치유할 수 없을지라도 자녀를 통해 치유할 수 있다고, 그것도 내리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줄리안을 얻은 숀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줄리안을 얻게 된 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주 줄리안 덕분에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말했죠"(63).


우리는 부모에게 큰 상처를 받으면 그 사람 역시 상처를 주는 부모가 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파리의 아파트>를 읽으며 이제 그 믿음을 버릴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받은 자녀도 무한한 사랑을 주는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의 마음이고, 신이 준 선물이라고. "그날 아침, 너를 어둠에서 꺼내준 건 나였지만 실제로 나를 구해준 건 바로 너였어"(402). 심지어 매들린의 믿음이 배반 당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매들린은 눈을 감고 이제 곧 아기를 갖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삶에 단단히 닻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98).



<파리의 아파트>는 특별히 번역자를 칭찬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기욤 뮈소의 필력이, 문장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생생할 수 있는 것은 번역자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포감보다는 예술과 아름다움과 사랑의 힘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는 '기욤 뮈소스러운' 스릴러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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