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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물에 비친 그림자의 기억
찰스 디킨스 지음, 김희정 옮김 / B612 / 2017년 11월
평점 :
노파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바깥세상의 모든 기억(아내, 친구, 아이, 형제)을 간직한 채
잊혀간 존재들이 머물렀던 지하 감옥을 바라보던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신음을 토해내며 굶주린 채 죽어가던 곳.
하지만 나는 온통 깨지고 썩어서 저주 받은 벽과
군데군데 갈라진 틈 사이로 새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승리감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기쁨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41).
당신의 여행은 어떤 스타일인가요? 요즘 외국인들이 한국을 여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관찰예능을 보면, 여행에도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엄마와 함께 첫 제주 여행을 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딸과 함께 좋은 풍경을 보고, 맛난 것도 먹고, 이런 저런 체험도 하면 엄마도 신나시겠지 했는데 이상하게 엄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울적해지셨습니다. 알고 보니 엄마는 함께 여행을 다니시면서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추억하고 계셨고, 과거를 추억하는 여행은 다시 딸과 함께 이곳을 와볼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엄마는 그렇게 지나가 버린 시간과 오지 않는 시간 속을 여행하느라 내내 울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알았습니다. 현재에 오롯이 집중하는 여행자도 있고, 시간 속을 걷는 여행자도 있고, 낯선 땅에서도 마음 깊은 곳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여행자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탈리아, 물에 비친 그림자의 기억>은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이탈리아 여행에세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찰스 디킨스의 여행은 한 편의 현란한 꿈 같습니다. 쇠락한 건물은 한 편의 꿈처럼 과거의 영광으로 되살아나고, 교황청의 추락한 지위는 억울한 죽음과 뒤엉키며 우울한 전율에 떨게 하고,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 번영의 뒷골목은 찰스 디킨스의 마음을 아주 혼란스럽게 헤집고 다니는 사물들의 환영을 만들어냅니다. 잊혀져간 사람들이 아름다운 예술로 남은 이탈리아는 얼마 전,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처럼, 우울하고 찬란한 땅이었습니다.
전쟁의 명멸하는 불꽃이 꺼지고
가정의 불꽃이 세대를 거치면서 쇠락하는 때에도
하늘이 준 빛으로 밝힌 근엄한 거리와 거대한 궁전들과 탑 속의 불꽃은
지금도 밝게 타오른다.
수천수만 명의 얼굴들이 늘 다니던 장소와 낡은 광장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지만,
어느 이름 없는 피렌체의 여인은 화가의 손에 의해 영원히 잊히지 않는
우아함과 젊음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284).
화려한 제국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간직한 땅이여서일까요. 그의 기억 속에 새겨진 학대와 억압이 번영의 이면을 또렷하게 각인시켰기 때문일까요. 그에게 이탈리아는 무너진 신전, 버려진 궁전, 굴러다니는 감옥의 돌덩이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그리하여 그의 여행은 찬란하지만 참으로 음울하고, 빛으로 가득할 때조차 쓸쓸합니다.
사실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명작 에세이라 하여 매우 큰 기대를 품었던 것에 비하면, 그리 집중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곳'이 그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함께 스며들 수 없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와 함께 풍경 속으로, 시간 속으로, 그의 꿈(내면) 속으로 빠져 들지 못하고, 냉냉하게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원한다면 하루에도 스무 번씩 길을 잃을 수도 있"(65)다는 그 환상적인 제노바 골목에서도 찰스 디킨스가 느낀 것과 같은 묘한 대비는 쉽게 제 마음 안으로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여행 스타일이 저와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어쩌면 저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어쩌면 번역의 간극이 큰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