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1세기의 전도자는 선포자는 넘어 변증가여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긴박한 사명이 있다"(11).
전 세계를 통일했던 가장 강력했던 제국, 가장 막강한 문화, 가장 풍요로운 지성이 꽃 피었던 로마 제국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해야 했던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3). 인간 지성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공격적인 모욕의 대상이 되고, 진리에 대한 주장은 더 적극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에 대한 합리적 탐구의 과정도 없이 신앙은 연약한 사람들이나 관심 갖는 거라 폄하하고, 진리에 대한 주장은 독선으로 치부하고,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고루하다 비난하고, 소비와 쾌락에 밀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관심 속에 버려두는 사람들 앞에 서고, 점점 더 가상세계로 빠져드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마치 복음 들고 철벽을 마주한 듯한 절망감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세속 사상들에 대한" 비교 변증으로 <오직 예수>만이 절대 진리임을 명쾌하게 변론하고 있는 <오직 예수 2>를 읽으며, 지금이야말로 진리로 승부할 때라는 깨달음에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습니다. "과학의 진보가 신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가설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지난 세기에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전진 중 두 가지, 즉 우주에 시작점이 있다는 사실과 우주는 생명체를 위해 미세 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 강력하게 신을 가리키고 있다"(과학주의, 140)는 지적은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전도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오직 예수 2>는 "세상을 이끌고 있는 세속적 사상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도 독특한 답변이 될 수 있는지를 밝힙니다. 이것은 "논쟁이 아닌 변증"이며 "설득이 아닌 사랑"입니다(19). 전도자들은 사람들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지적인 장벽들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장벽들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책 외에도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책은 많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 2>는 진리(복음)를 맡은 자로서 세속적 사상들의 공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리를 진지하게 붙들면서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배타적 진리를 지키면서도 타인을 수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실습해야 한다"(325).
<오직 예수 2>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책의 'Part 3' 부분만이라도 꼭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진리를 '이해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더 깊이 깨달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성애와 같이 민감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 여기에 들어 있다고 봅니다. "진리의 소통을 탈환해야 한다"는 외침이 비장하게 가슴에 부딪혀 옵니다.
"지금 우리가 진리에 대해 가장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바는 진리의 오용이다. 교회는 희생적 사랑의 표현이기도 한 진리의 소통을 탈환해야 한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다"(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