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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눈뜰 때마다 잃어버린 뜨거운 '기대'의 감각을 찾아 헤맨다. 결여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적극적이 실체인 뜨거운 '기대'의 감각. 그것을 찾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나면 또다시 수면의 비탈길로 자신을 유도하려 한다. 잠들어라, 잠들어라,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8-9).
타고난 추한 외모, 초등학생 한 무리가 던진 돌에 맞아 실명된 한 쪽 눈, 그리고 주정뱅이 아내, 혹이 달린 채 태어나 보호시설에 맡겨놓은 아이, 게다가 기묘한 모습의 시체로 발견된 친구의 자살까지, 스물일곱 살의 기혼자 미쓰사부로를 채우고 있는 것은 무기력뿐이다. "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고 지금 내가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13). 전향한 학생운동가인 동생 다카시는 그들의 고향인 '골짜기 마을'로 돌아가 새 생활을 시작하자고 설득한다. "새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돼, 형." ...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하지만 풀로 된 나의 집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지"(79).
"업루티드(uprooted)라는 말을 미국에서 종종 들었어. 그래서 나 자신의 뿌리를 확인해보려고 골짜가에 돌아왔는데, 결국 내 뿌리는 이미 오래 전에 완전히 뽑혀 나가 나는 뿌리 없는 풀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어. 나야말로 업루티드야. 나는 이제 여기서 새로운 뿌리를 만들어야 하고, 당연히 그에 걸맞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껴. 어떤 행동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저 행동이 필요하다는 예감만이 강해지거든"(123-124).
골짜기 마을로 돌아온 미쓰사부로와 다카시 형제는 만엔 원년(1860년)에 일어났던 농민 봉기와 그들의 가문에 관한 100여 년 전 추문에 얽혀들며, 두 형제를 중심으로 1860년(만엔 원년의 농민 봉기)과 1960년(안보 투쟁)이 조우한다. 다카시는 20년 전에 강제로 끌려와 숲으로 벌채 노동을 나갔던 조선인들이 전쟁이 끝나고 부락의 토지를 불하받아 정착하며, 골짜기 마을의 경제권까지 장악한 조선계 사람 '슈퍼마켓 천황'에게 악의를 느낀다. 만엔 원년의 사건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기를 원하는 다카시는 "슈퍼마켓 천황"에 대항하기 위해 골짜기 청년들을 모아 풋볼 팀을 만든다. 형 미쓰사부로는 "증조부님의 동생에게 영웅적인 저항자의 후광을 씌우고 싶어 하는 동생에게 반발"하며 형제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벌거벗고 달리는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이며, 나의 동생이다. 100년 동안의 모든 순간이 이 한순간에 응축되어 있다. ... 침묵하는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처마 등불이 비추는 앞뜰에는 한순간에 100년을 가둬놓은 눈의 정지된 운동만이 남았다"(298).
제목 <만엔 원년의 풋볼>은 농민 봉기가 일어난 1860년과 안보 투쟁(일미안전보장조약에 대한 반대 운동, 학생, 시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최대 규모이 반전 평화운동이다-옮긴이, 29)이 일어난 1960년이 조우하는 자리이며, 1860년에서 1960년으로 이어지는 그 100년의 세월에는 골짜기 마을로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왔던 1945년 태평양전쟁이 교차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각기 다른 세 개의 역사적 사건은 하나의 삶의 마당이 되어 마쓰사부로와 다카시 형제의 삶을 관통한다.
해작해설에 따르면, <만엔 원년의 풋볼>은 "패전 직후 일본인들이 겪은 정신적 공황 상태를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 문학으로 평가받"으며, "저마다 지닌 내밀한 상처와 수치심을 구조적 차원에서 조명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이니, 이제 겨우 내용을 읽어내기에도 벅찼던 독자가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할테지만 확실한 건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지만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이 '가 다른 유명한 작가들에 비해 한국 독자들에게 덜 알려진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가 싶기도 하다. 여러 모로 워낙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이기 때문에 해설에 의존하지 않고는 작품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킬링타임 소설로 일본문학을 찾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