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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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 말이(276).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면 좋을 그런 소설입니다. 화창하지만 쓸쓸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 말입니다. "일본 근현대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는 <금각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 때문입니다. 무혐의로 일단락 된 일을 다시 거론해서 미안하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신경숙 작가가 표절했다고 논란이 일었던 그 작품(우국)의 작가입니다. 표절 논란이 일었던 그 대 여섯 줄만으로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터라 기회가 되면 한 번 꼭 그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세 차례나 거론되었고,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탐미주의' 작가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미시마의 작품만이 아니라 일본 근현대 문학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377)이라는 <금각사>는 자꾸만 소리내어 읽게 되는 소설입니다. 주제의식이나 스토리와 상관 없이 문장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자꾸만 소리내어 읽어보았던 몇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잘된 번역된 한몫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그가 말년에 급작스럽게 극단적 천황주의자가 되어 충격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작가에 대한 신비감과 흥미를 다소 감소시키고 말았습니다. 마치 <금각사>라는 작품처럼, 그의 작품이 아름다울수록 그에 대비되는 그의 인생이 더욱 추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아버지의 고향은 햇빛이 유별나게 눈부신 곳이었다. 하지만 1년 중 11월이나 12월 무렵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보이는 쾌청한 날씨에도 하루에 네뎃 차례나 소나기가 지나갔다. 변하기 쉬운 내 성격은 그 땅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월의 저녁 무렵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숙부 집 2층에 있는 공부방에서 건너편의 산을 바라보곤 했다. 산록으로 덮인 산 중턱이 석양을 받아서 벌판 한복판에 금병품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금각을 상상했다(8-9).

- 하여튼 나는 두 종류의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아직 이토록 젊지만 보기 흉하고 완고하게 생긴 이미 속에서, 아버지가 관장하는 죽음의 세계와 젊은이들이 속한 삶의 세계가 전쟁을 매개로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이름새가 되리라(35-36).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갔다. 마치 돼지처럼(16-17).

<금각사>는 한 청춘의 비극적 성장소설 같은 책입니다. 주인공은 말더듬이로 태어나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자기혐오에 빠져 사는 '미조구치'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말더듬 증세는 나와 외부 세계 사이에 하나의 장애로 작용했다. 첫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첫 발음이 나의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를 가로막는 문의 자물쇠 같은 것이었으나 자물쇠는 순순히 열린 적이 없었다"(10-11).

작은 절의 주지인 아버지로부터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34)는 말을 듣고 미(美)와 금각에 집착하지만, 끝내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이루어내지 못한 미조구치는 금각을 불태우는 극단적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금각사>는 국보를 불태운 "실제 방화 사건을 약 5년에 걸쳐서 면밀히 취재하여 쓴"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사 소설의 외형을 갖춘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미시마의 의도는 사찰의 도제승이 방화를 하게 된 심리 상태의 규명이 아니라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하는 데 있었"(395)다는 것이 역자의 해설입니다.



어째서 노출된 창자는 처참한 것일까? 어째서 인간의 내부를 보면 끔찍해서 눈을 가려야만 하는가? 어째서 흐르는 피는 남들에게 충격을 줄까? 어째서 인간의 내장이 추한 것일까?(86)

<금각사>는 아름다운 언어로 그려내는 추한 현실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아름다워서 더 추하고, 추해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소설이라고나 할까요.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이 책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왜 유명한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품 해설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주인공의 친구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를 주인공의 화신으로 인식하고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티 없이 맑으면서도 연약한 쓰루카와는 소년 시절의 미시마 자신을 대변하며, 인식의 세계를 대표하는 가시와기는 20대의 미시마와 흡사하다. 그리고 인식의 세계에서 행위의 세계로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는 미조구치에게서는, 30대에 들어서 육체미 운도에 열중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미시마의 자기 개조 노력을 엿볼 수 있다"(396).

실속 없이 바쁜 우리가 가볍게 읽어내기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정서이고 기묘한 집념이지만, 우리 내면에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존재의 불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천박한 연극과 파멸에 놀라며 음미해볼 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작품 해설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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