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키에르케고어의 스스로 판단하라 ㅣ Bridge Book 시리즈 1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이창우 옮김 / 샘솟는기쁨 / 2017년 1월
평점 :
스스로 판단하라!
기독교는 자신들이 전하는 소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복음"(Good News)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믿어보겠다고 결심하며 믿음의 도를 배우다 보면, 이것이 정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역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얻기 위해 보이는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형통과 부요가 아니라 가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기독교적 역설에 부딪혀 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늬만 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키에르케고어(저에게는 키에르케고르라는 발음이 더 익숙하나 이 책에서는 "한국 키에르케고어 학회의 추천에 따라 '쇠얀 키에르케고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235)는 이 책을 통해 독자를 이 기독교적 역설 앞에 불러 세웁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스스로 판단하라>는 베드로전서 4장 7절과 마태복음 6장 24절을 근거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 술 깨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면, 영과 진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15)
먼저 , 베드로전서 4장 7절(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에 관한 변증의 주제는 "그러므로 술 깨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였을 때 이를 본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 "그러므로 술 깨라"고 훈계합니다. 이 책의 각주 11번에 보면, "정신을 차리고"는 헬라어 원어로 "술 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는 세속주의가 술 취했다고 생각한다"(16)는 것입니다. 세상과 기독교가 술 취한 것과 술 깬 것에 관해 정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술에 취한 것과 비슷한 '광기'일 수 있습니다. 확률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험에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내던지고, 믿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는 바를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포기를 감수하는 신앙인들이야말로 술에 취한 것처럼 종교에 취해 있는 사람들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키에르케고어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포기 없이 여전히 세상에 취해 있는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의 술 취함입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성령이 사람에게 미치는 첫 번째 영향은 '술 깨기'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우리가 술 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술을 깰 수는 없지만)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깨어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물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셨던 것은 결정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의 삶은 본질적으로 세속주의와 이 세상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거의 듣지도 않고 거의 읽지도 않고 기독교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잠시 동안 종교적인 기분을 느낄 뿐이다"(176-177).
두 번째로 마태복음 6장 24절(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을 통한 변증의 주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은 술 깨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만을 따르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 혹은 교리를 위해 고난 당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본받음"이라고 부른다. 슬프다! 이 기독교의 본질은 기독교 세계에서 완전히 망각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165).
성령으로 술 깨지 않은 사람이 볼 때, 기독교가 요구하는 것은 '끔찍한 소식'일 수 있습니다. 세상과 정반대의 목표, 즉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 부요가 아니라 가난, 성공이 아니라 나눔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역설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다면, 인내로써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하며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불가능한 것, 추상적인 무엇으로 바꾸어놓은 것에 있습니다. 철학하는 키에르케고어가 그것을 다시 선명한 현실로 바꾸어놓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판단하라>는 쉽게 읽히지 않는 책입니다. 몇 번이나 읽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난해합니다. 곱씹을수록 심오한 진리, 날카로운 통찰에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역시 소화하기 쉽지 않은 책입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저는 읽었지만 읽었다고 말할 수 없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이 책은 믿는 자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진짜로 따르고 있는지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가도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겠지만, 반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똑같이 취해 있다면 또 그 신앙은 가짜라고 조롱하며 손가락질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