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 간서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들려주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내면 풍경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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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인문학자들은 조선의 18세기를 '위대한 백 년'이라고도 부른다"(5).



<조선의 최고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18세기 성호학파와 북학파가 양대 축을 이루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 등장했고, 그들이 조선 인문학의 르네상스를 형성했으며, 그 중심에 '이덕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덕무는 "북학파 또는 백탑파라고 불리는 지식인 그룹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6). 그런데 아마도 많은 독자들에게 이덕무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낯선 역사적 인물일 것입니다. '간서치'(책에 미친 바보)라는 별명으로 독서, 글쓰기 관련해서 새롭게 조명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대하 사극이나 역사 드라마에서 비중 있게 그려지거나 조명을 받아본 적은 없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덕무는 아직 대중적이면서, 대중적이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최고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이 대중적이면서도 대중적이지 않은 이덕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 미친 바보 정도가 아니라, 그가 남긴 사료를 중심으로 그가 섭렵한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전방위적으로 읽어냈습니다.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문물과 제도, 문화와 풍속 등 백과사전적 지식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책만 보는 바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책만 보는 바보는 아니였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빌려서라도 온갖 서적을 폭넓게 읽은 이덕무는 독서가, 문장가, 비평가였을 뿐만 아니라, 민속학자, 박물학자, 북학사상가이자 남학(일본학)의 최고 권위자로서도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인의 개성과 기호를 중시하며, 사소하고 하찮은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고 성찰하는 능력과 생활 철학을 가지지 못했다면 이처럼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학문의 세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덕문의 이러한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의 특징을 개방성, 확장성, 혁신성, 창의성이라는 네 가지 단어로 특징짓습니다. 그리고 이덕무의 이렇나 특징은 그가 "평생 성현의 삶만을 모델로 추구했던 성리학적 지식인들"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세계, 즉 조선이라는 세계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조선의 최고 문장 이덕무를 읽다>가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이덕무의 모습과 학문의 세계 중에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던 내용은 바로 '영처의 철학'이라는 한 단어였습니다. 이덕무라는 한 인물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처의 철학은 "이덕무가 지형한 삶과 글쓰기의 철학"이 무엇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자는 독자에게 짧막한 설명과 함께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줍니다.


그의 나이 스물이 되는 해인 1760년(영조 36) 3월, 자신의 시문을 모아 엮은 최초의 원고에 '영처'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영처는 그가 사용했던 수많은 자호 중 하나다.글자 뜻 그대로 보면 '어린아이와 처녀'를 말하는데, 글 쓰고 독서하는 일을 전업으로 삼은 선비가 느닷없이 어린아이와 처녀를 가리켜 자신이 뜻을 둔 곳을 드러낸 까닭은 무엇인가?(35)


이에 대한 이덕무 본인의 대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덕무는 자신이 글을 쓰는 근간에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이 자리하고 있어서 '진정' 그대로임"을(36) 말합니다. 


글을 짓는 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다르겠는가? 글을 짓는 사람은 마땅히 처녀처럼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 그러나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은 천진 그대로이며, 처녀가 부끄러워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인데, 이것이 어찌 억지로 힘쓴다고 되는 것이겠는가?(35)


이덕무의 천진함과 순수함이 글에만 들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또한 매탕, 즉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자호를 지을 만큼 매화 마니아였다는 것도 이덕무라는 한 인물이 가진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덕무의 새로움에 대한 시대적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덕무의 작풍은 중국의 고문을 문장의 전범처럼 추앙하던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샀다. ... 그렇다면 이덕무는 과연 옛것 곧 중국의 고문을 배척했을까? 아니다. 그는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동안 옛 문인과 학자들이 남긴 시문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독서인의 삶을 살았다. 다만 옛것을 비슷하게 모방하거나 그대로 답습하는 일을 배척한 것이다. 그는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짓을 인명창, 즉 사람 몸에 나는 종기나 부스럼이라고까지 질타했다(168).


학문의 대가로 고결한 선비이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의 소꿉놀이처럼 글쓰기를 즐기며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이덕무의 가르침이 한 편으로 엄중하고 매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천진함과 순수함이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입니다. 


견문과 지식을 쌓더라도 동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만약 동심은 잃어버린 채 견문과 지식에만 의존해 글을 짓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옮겨 적은 '가짜 글'에 불과할 뿐이다(39).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는 이덕무라는 지식인을 통해 본 18세기의 역사(지성사)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오랜 연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흥미위주로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교양서적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무거울 수도 있겠다 싶지만, 역사적인 한 인물에 대해 전문적으로 탐구한 연구서 한 권을 깊이 있게 읽는 것도 이덕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반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을 가졌고, 그를 즐거이 연구한 연구서가 출간되어 모든 독자에게 공평히, 그리고 널리 읽힐 수 있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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