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루스 오제키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자기 자신을 읽는다"
(마르셀 프루스트, <되찾은 시간>, 157)



한마디로 정의할 수도, 요약할 수도, 소개할 수도 없는 소설입니다. 징그러운 괴물 같기도 하고, 투명한 꽃잎 같기도 하고, 역사 같기도 하고, 철학 같기도 하고, 결국 역사와 철학과 자연과 과학과 재해와 서사와 그리고 모든 것을 품은 문학일텐데, 작품보다 이런 작품을 잉태한 작가의 괴력에 더 놀라게 되는, 읽었다기보다 어떤 체험으로 다가오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지루할 정도로 촘촘하게 쏟아지는 잔혹한 현실을 읽어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울수록 지루해지고, 몰입될수록 거부감이 생겼던 것은, 현실은 더 잔혹하다는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되며 여러 가지 서사가 겹치는데, 인생이 살아가면서 맞딱드릴 수 있는 모든 무자비한 환경(실직, 괴롭힘(왕따), 불화, 전쟁, 구타, 테러, 착취, 재난(지진과 쓰나미, 폭우), 야생(늑대), 죽음 등)이 펼쳐지고 그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야만과 고통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문화, 폭력에 드러나는 야만성을 다룬 작품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처럼 투명하게 본질을 들여다보면서도 몽환적이고, 생생한 비극과 신비한 아름다움이 이토록 조화롭게 그려진 작품이 또 있었던가 싶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느낌을 미리 맛보고 싶은 독자들께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흥미로우면서도 지루하고, 잔혹하면서도 아름답고, 다음 내용이 궁금하여 조급하면서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던 문장들 중 하나입니다. "인터넷은 시간의 환류 같은 것이어서, 지구상의 부유물 같은 이야기들을 그 궤도로 빨아들이는 것일까? 그 환류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 그 부유물들의 반감기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그 걷잡을 수 없는 물결은 관찰되고 나면 조그만 조각들로 부서진다. 그 조각들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방사선 방호복으로 완전무장한 채, 엄마 품속에서 꼬물거리는 맨 얼굴의 아기에게 방사선 측정기를 들이대는 의료진. ... 헤아릴 수 없는 다수를 대표하는 미미한 소수에 불과한 이 영상들은 소용돌이치고, 나이들고, 환류의 궤도를 한 번씩 돌 때마다 퇴화하며,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조각들로, 밝게 채색된 파편으로 천천히 분해된다"(164).






 

"유시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당신과 나, 그리고 지금 존재하고 예전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람을 뜻해요. 나로 말하자면, 지금 난 아키바 전자상가의 프랑스 메이드 카페에 앉아 있어요. 당신의 과거이자 나의 현재인 지금, 흘러나오는 슬픈 샹송을 들으며 이 편지를 쓰면서 내 미래 어느 즈음엔가 있을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어요"(11).


도쿄에 살고 있는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나오'는 자신의 삶을 끝내기 전에 한 가지 계획을 세웁니다. "지코 할머니의 삶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프루스트의 책에 쓴 다음, 다 쓴 책을 어딘가에 두어 당신이 찾게 하겠다!"(42) 지코 할머니는 백네 살 비구니 선승으로, 나오의 증조할머니입니다.


캐나다의 조그만 섬에 남편 올리버와 함께 살고 있는 '루스'는 어느 날 해변에 밀려온 도시락 통 하나를 줍습니다. "손으로 쓴 조그만 편지 묶음 하나, 빛바랜 붉은 표지로 장정된 도톰한 책 한 권, 무광 검정색 글자판에 야광 눈금이 달린 튼튼한 골동품 손목시계 하나. 그것들 옆에는 바닷물의 부식작용으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한 헬로키티 도시락 통이 놓여 있었다"(21).


'루스'가 '나오'의 일기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도 그들은 시간과 공간은 마법처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왜, 어떻게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바다에 던져졌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루스가 보잘것없는 여자애의 하찮은 일기장이라고 치부해버리지 않고,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나오'(와 그 마음)를 읽기 시작했을 때, 오직 특별한 한 사람을 위한, 완전히 사적이면서도 진실한 이야기가 되어 시간을 헤치고 나아가 루스에게 닿습니다. 




"인생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단다. 아니, 어쩌면 인생은 그저 이야기에 불과한지도 모르지. 잘 자라. 우리 예쁜 나오"(343).


인생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에는 많은 인생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서 온 나오의 이야기와 오늘의 살아가는 루스의 이야기가 계속 교차하는 가운데, 실직 후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 가족들은 아무도 몰랐던 아버지의 비밀 이야기, 사랑하는 아들을 자살특공대로 잃어버린 지코 할머니의 이야기, 평화를 사랑했으나 자살특공대가 되어 삶을 마감해야 했던 지코 할머니의 아들 하루키 1번의 이야기,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나오의 이야기, 그들을 둘러싼 지진과 쓰나미, 도쿄 전력의 미흡한 대응, 환경 오염, 9.11테러와 게임처럼 즐기는 전쟁 이야기, 똑똑한 아이들을 학도병으로 끌어다가 투지를 심어준다며 날바다 괴롭히고 뼈를 부러뜨리고 기를 꺾으며 아이들을 멸시했던 군대 이야기, 그리고 다시 이 모든 것들을 둘러싼 시간과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복잡해보이지만 아름다운 구조를 가진 프랙털처럼 신비롭게 펼쳐집니다.



"하지만 계속 읽겠다고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나와 통하는 유시인거고 우린 함께 마법을 만들어낼 거예요!"(12)


책을 읽고 있으면 저자야말로 시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아이를 구하려는 루스의 절박함은 과거를 바꾸는 힘이 되고, 그리하여 현재가 바뀌고 미래가 바뀌는 마법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고,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고,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함께 마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반대로,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지 못할 때, 자기 앞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서로를 읽지 못하여 서로 연결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인생을 탕진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간은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무자비하며, 나와 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야만적이며, 삶이라는 일상은 우리가 감지하는 것보다 위태함으로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실오라기 같이 작고 연약한 것일지라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의문과 무력감이 때로는 의지를 짓누르고, 생의 활력을 앗아갈지라도, 서로를 의지하는 힘으로 버티고 일어설 때, 인생은 비극을 품었을지언정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곁에 남을 것입니다.


"남은 삶이 길지 않으니 겁쟁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한 진심을 다해, 깊이 느끼며 살겠습니다. 제 생각과 감정을 엄격하게 반성하고 가능한 한 제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공부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순간이 오면 고결하고 지고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인간으로 아름답게 죽겠습니다"(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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