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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평점 :
"이 마법의 단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이는 바로 이 여인, 러시아의 눈 내리는 광활한 평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이 프랑스 여인, 우리 외할머니였다"(13).
"샤를로트의 과거 삶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렇게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은 채 현존하고 있었다"(37).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치던 해에 태어나신 우리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서러운 기억이 많아서였을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일본말을 전혀 모르시는 것은 북쪽 국경선 근처에 사셨기 때문이고, 그래서 중국말은 조금 하시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아흔이 넘어서도 서러운 눈물을 흘리신다는 건, 한참 자라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결정하신 '피난' 한 방이 이후 가족들의 삶에 미친 영향은 더 한참 자라고 그 의미를 겨우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 이야기 속에 내 삶의 뿌리가 있고, 나라의 역사가 있고, 세계사의 흐름이 있고, 그렇게 이야기는 이어서 흘러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프랑스 유언>은 "시베리아 초원 지대 인근 마을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는 열 살짜리 소년과 그 할머니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1995년도에 초판된 책이라는 것과 자전적이지만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1995년도에 초판된 책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시대적 감각을 익하기 위해서이고, '소설'에 강조점을 둔 것은 이 책이 절대(적어도 저에게는) 소설로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 소개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선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가의 일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고백록처럼 읽힙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가 글쓰기를 통한 기억 작업으로 불러낸 환상과 자신의 현실적 삶 그리고 역사와 인간의 분열상들은 봉합되고 화해하게 된다"
(372, 옮긴이의 말 中에서).
자전적 소설로 이 작품을 읽을 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섬세한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서정성입니다. 오래 전 잠든 신화가 이야기를 통해 다시 깨어나듯, 세월에 휩쓸려간 오래된 사진, 오래된 신문, 오래된 기억이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 우리 앞에 다시 소환될 때, 독자는 순간을 영원으로 붙드는 언어의 마법에 매혹당합니다. 그것은 지금은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 프랑스 여인의 낡은 기억이지만, 그 안에서 대홍수가 깨어나고, 황제를 맞이하는 연회의 밤이 재현되고, 그 속에서 막 한 소년의 인생의 시작된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하며, 프랑스라는 한 나라가, 전쟁이라는 역사(세계사)가 전혀 다른 입체감으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의 섬세한 언어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어보게 만듭니다.
"나는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무의식적인 추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나의 프랑스 조상들이 내게 보낸 울림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그 추억의 요소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다 되찾을 것이다. 할머니가 프랑방스를 여행할 때의 가을 햇빛, 라벤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판의 향기, 그리고 향기 가득한 공중에서 너울거리던 거미줄"(17).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유언>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습니다. 문장(언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흥미로운 스토리에 집착하는 저와 같은 독자에게는 초반부가 다소 지루할 수도 있고,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는 것도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이 책의 가치,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옮긴이의 말>을 많이 의지했고,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두 비극적인 이야기 사이에서 몸부림쳤다"(233).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라며 할머니의 언어로 할머니의 프랑스를 유산으로 상속하며 "프랑스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기에 모든 걸 러시아식으로 생각해야만 했"던 소년(작가)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중 분열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소년이 삶의 자리를 프랑스로 옮겨 앉으며 결국 그런 이중 분열은 소년(작가)에게 저주가 되고 말지요(이 작품이 탄생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는 축복이 되었지만요).
"우리 삶이 이처럼 이중 분열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차진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할머니 곁에서 산다는 것은 곧 우리가 다른 곳에 있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했다"(31).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이식된 프랑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내가 내 가슴속에 들어 있는 이 제2의 심장을 질식시키는 데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심장이 마지막 숨을 내쉰 그날은 내게 있어서 유령들이 나타나지 않는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4월의 그 오후와 정확히 일치했다…"(236).
"나는 처음에는 씁쓸하게, 나중에는 미소 지으며 '프랑스-러시아'가 내게 내린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내게 이식된 프랑스적 특성을 숨겨야 했지만 이제는 내가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이다"(340-341).
작가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언어 집착증처럼 보일 정도로 어떤 사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찾기에 고심하는데, 그런 작가가 그려내는 프랑스, '매혹의 대상인 동시에 배척의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프랑스'는 가득 기억이나 회상이 아니라 '체험'이었습니다.
"마킨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곧 번뜩이는 직관과 섬세한 언어 작업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눈앞에서 되풀이되는, 어떤 이야기 또는 어떤 과거와 조우하는 일이다"(372, 옮긴이의 글 中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한 줄 문장이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마킨의 글쓰기는 "또한 시간 개념을 소거함으로써 인간 역사에 너무 자주 흔적을 남기는 악을 없애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해석이 아름다운 통증으로 남습니다. 아름답지만 재미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쉽게 읽히지도 않습니다. 빠르게 읽고 지나가는 소설이 아니라 순간을 영원처럼 붙드는 작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체험해야 하는 그런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