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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평점 :
"항상 다른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다가 혼자가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107).
좀 까칠하게 평가하자면,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 같은 스토리이다.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는 괴팍한 예순세 살 할머니가 어찌어찌 하여 떨거지 소도시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떨거지 아이들과 엮이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떨거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러면서 떨거지 소도시에도 새바람이 불고 할머니 인생에도 새바람이 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프레드릭 배크만의 책은 그렇게 간단하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며, 그렇게 간단하게 읽어서는 안 될 소설이다. 평면적인 줄거리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활자 곳곳에 따스하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이 가진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현실세계라면 우라지게 짜증나는 인물이 분명한데도 결국 그/그녀를 사랑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는 읽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서도 그랬듯이 <브릿마리 여기 있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서 "가장 밥맛이었던 사람" 1위 켄트(브릿마리의 남편), 2위 브릿마리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476).
청소에 강박적인 집착을 보이며, 모든 게 늘 똑같은 집에 머물기를 원하며, 친구를 사귀지도 않고,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에 여행을 싫어하고, 40년 동안 살던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는 브릿마리는 그래서 남편(과 남편의 아이들)에게 수동 공격적이며, 사회성이 부족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평가를 늘 의식한다는 놀림을 받는다. 그렇게 제자리를 놓인 물건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평생 다른 누군가(남편과 남편의 아이들)를 위해 살아온 브릿마리가, 스스로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나이(63살)에, '보르그'(가상의 소도시)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남편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졌을 때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공이 길거리를 굴러오면 발로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같다.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149).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떨거지 소도시에 브릿마리가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 보르그와 브릿마리 인생에 변화가 시작되고, 그 중심에 축구가 있다. 어찌하다 축구팀 코치를 맡게 된 브릿마리는 축구를 통해, 아니 축구를 사랑하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과 축구를 사랑하는 보르그 마을 주민들 속에서 평생 처음 순수한 감정으로 우렁하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기회를, 누군가를 격렬하게 사랑할 기회를, 열정적으로 폭발할 기회를 얻게 된다.
"누구라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법이다"(283).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도와줄 사람 다 하나씩 도와준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유시진의 말에 강모연이 이렇게 대답을 한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파티마의 삶은 바뀌겠지요. 그리고 그건 파티마에게는 세상이 바뀌는 일일거에요." <브릿마리 여기 있다>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배울 수 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누군가의 삶은 바뀔 수 있고, 그리고 그 사람에겐 그것이 세상이 바뀌는 일일거라는 것말이다. 그 어려운 일을 브릿마리가 여기서 해낸다.
"모든 인간에게 사랑이 불꽃놀이일 필요는 없겠지만" 누구에게나 사랑은 필요하고, 나를 잃어버리기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살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 남편과 남편의 아이들을 위해 브릿마리는 자신의 꿈을 접고 평생 가정을 지키고, 그녀의 자리를 지켰지만, 그녀를 이해할 마음이 없는 그들에게 브릿마리는 '잔소리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 '없으면 불편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찮게 여기는 브릿마리의 능력(청소, 정리, 돌봄)이 어떤 마법 같은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 평생 모를 것이다. 보르그 주민들은 브릿마리의 죽은 언니처럼, 그래서 평생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브릿마리를 알아봐주어 다행이다. "그래서 잉그리드가 바깥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는 동안 브릿마리는 모든 집안일에 뛰어난 솜씨를 갖춘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청소, 정리. 언니는 그걸 알아주었다. 언니는 그녀를 알아주었다"(114).
"화분에는 흙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밑에서 꽃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이 보이는 것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물을 주어야 한다"(68-69).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가독성이 뛰어나다는 것이고(번역도 한 몫한다), 따뜻한 유머 속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축구를 알면 더 재밌겠지만 사실 몰라도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리버풀을 응원하는 아빠 밑에서 자라면 언제든 역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리버풀을 응원하는 아버지를 둔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토트넘 팬이면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많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는 것. "토트넘은 늘 환상적인 경기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해요. 그런 식으로 희망을 심어줘요. 그래서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점점 더 기발한 방법으로 팬들을 실망시키죠"(277). 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인가 뭔가를 응원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면, "그 팀은 늘 이겨요. 그래서 자기들은 그럴 만한 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요"라는 것! (재밌어서 메모해두었습니다^^)
. 자신의 앞날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을 참고 견디며,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법을 터득하고, 남(남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기며, 그(남편)의 꿈이 그녀의 인생이 되어버린 채, 다른 사람의 그늘 속에서 사는 데 이골이 난 브릿마리가, 어느 날 '브릿마리', 그러니까 '나 자신'으로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에게 집중했다면 그저 그런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줌으로써 누구라도 서로에게 눈부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