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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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법의학의 선구자라고 알려진 중국 남송시대의 학자 송자를 만나다!


법의학은 범죄와 관련된 죽음을 의학적 중심에서 조사하는 분야입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법의학 초기의 역사, 그러니까 법의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송나라 시대의 명판관이자, 세계적인 법의학의 선구자라고 알려진 인물 '송자'의 인생을 재구성한 역사추리 소설입니다. 송자는 "과학적 수사방법을 집대성한 세계 최초의 법의학서 <세원집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자라고는 하지만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며, 더불어 고대 중국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이 역사소설의 작가가 스페인의 공과대학 교수라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작가는 허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매우 엄정하고 정직하게 다"(572)루었습니다. 명실공히 "스페인 최고의 역사소설가"라고는 하지만, 스페인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송나라 시대의 의학과 교육, 건축과 음식, 소유권, 의상, 척도법, 화폐와 국가 조직과 관계"(571)를 면밀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역사추리 소설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송나라 시대의 평판관으로 유명한 또 한 사람, '포청천' 에피소드와 같이 다양한 명판결을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시체 읽는 남자>는 그보다 '송자'라는 인물의 독특한 생애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명판결 에피소드보다 그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송자는 조그만 시골동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수도인 린안으로 이사를 하면서 인생의 소용돌이 속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갑니다. 아버지를 따라 도축장 일을 돕던 송자는 아버지가 린안의 도청에서 회계원으로 알하게 되면서 평생 은인으로 여기는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송자는 펭 아래서 범죄 수사와 소송 관련 일을 돕게 되면서 수사의 기초를 배웠고, 동시에 해부학의 기초 지식을 습득합니다(15-16). 명판관에게 필요한 지혜와 지식, 세세한 일처리와 공평한 결정, 예리한 관찰과 빈틈없는 판결, 효율적인 일처리는 모두 펭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판관에 따르면, 범죄를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상처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외과 의사처럼 그 상처들을 이해하고 연구해야만 했다"(16). 위대한 인물 뒤에는 언제나 위대한 스승이 있는 법이지요. 


펭에게서 배우며 과거에 응시하여 "형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가던 송자는 예기치 못한 운명의 습격을 받습니다. 불행은 불시에 그를 급습했습니다. 살인죄(누명)로 붙잡힌 형,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화재, 병든 여동생, 어느 날 갑자기 도망자 신분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 송자는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참사가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99)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인간 행동의 결과이며 대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해 가능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의문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장치가 되어 이 소설이 단지 역사소설이 아니라, 역사추리소설이 되게 합니다. 여러 불행이 이유 없이 그를 강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시체를 읽는 사람입니다"(332).


그런데 독자는 한 역사적인 인물의 일대기를 읽어가며 또 한 번 인생의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닥친 모든 고난이 결국 그가 세계적인 법의학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끈 것이지요. 의학, 특히 해부학을 경시하던 시대에, 시체 만지는 일을 불결하고 불길하게 여기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명판관 펭 아래서 배운 것 뿐 아니라, 도축장에서 일한 경험, 고향 땅에서 농사를 지은 경험, 도망자 신세가 되어 떠돌며 공동묘지에서 시체 다루는 일을 했던 경험 모두가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신을 쫓는 포졸의 눈을 피해 공동묘지에서 시체 다루는 일을 하며 살인과 자살을 분간하고, 우연히 난 상처와 죽이려고 난 상처를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시체 읽는 남자'로 이름을 알리기 됩니다. "시간도 없고 도구도 없이, 그는 사소해 보이는 시체의 모든 흉터나 상처, 염증, 굳은 정도나 색깔 등 모든 것을 종합해서 완전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종종 머리털이나 엷은 고름이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221).


'시체 판독가'로 이름이 알려지고 황실과 관련된 살인 사건을 수사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을 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시체 읽는 남자>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100부짜리 대하사극도 가능할 것입니다. 대륙의 사람답게, 한 사람의 일대기가 굉장히 스펙타클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장대한 역사 이야기이고 흥미로운 추리극이 될 것입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중국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형법과 과거제도, 청렴과 정직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공직자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그 안에 감추어진 중국의 힘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권층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네. 우리는 발전하고자 하는 사람들, 노력하는 사람들, 자신의 가치와 지식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등용하네. 자네의 꿈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 시험은 사회계층이나 출신을 막론하고 누구나 응시할 수 있지. 농부도 내상이 될 수 있고, 어부도 판관이 될 수 있으며, 고아도 세리가 될 수 있네. 우리의 법은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엄격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네. 이걸 기억하게. 자네가 그들보다 더 뛰어나다면, 자네는 도와줄 권리뿐만 아니라, 그래야 하는 의무도 있는 것이야"(346-347).


책의 앞머리에 인용된 송나라 형법전서 <송형통> 중 <판관의 의무에 관한> 법률만 읽어보아도 확연히 나타납니다. 


성장이 임명한 검시관은

신고를 받고 네 시간 이내

범죄 현장에 출두해야 한다.

이 의무를 지키지 않거나

자기 책임을 전가하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 상처를 잘못 판정하면,

무능한 관리로 선포되고 

2년간 노비로 일해야 한다.


송나라 형법전서 <송형통> 제4조

<판권의 의무에 관하여>



러 모로 읽을 거리가 많은 재밌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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