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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 - 평범한 사람들의 기이한 심리 상담집
타냐 바이런 지음, 황금진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심리 치료, 혼돈에서 질서로 향하는 여정!
"요컨대 온전한 정신의 끝은 어디며, 정신이상의 시작은 어디인가?"(429)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부끄러운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동기 중 한 명이 어릴 때,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적이 있다. '그랬구나' 정도로 지나가며 우리는 여전히 친한 친구였고 지금도 친한 친구이지만, 솔직히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마음에 희미한 '쿵' 소리가 들렸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친구에게 미안하다. 쿵 소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내가 당황했다는 걸, 이유도 없이 희미한 두려움을 느꼈다는 걸 상징하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안에 숨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이 책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심리 상담집'이다. 저자는 영국의 권위 있는 임상 심리학자로 "2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임상 경험을 쌓은" 전문가이다. 그런데 저자는 완전 '초짜'(임상심리사 실습생)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전문가로서의 능숙함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초짜시절 자기가 가졌던 두려움과 부족함을 털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그녀의 고군분투를 독자들이 지켜봐주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내러티브, 즉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429).
임상 실습은 1989년부터 1992년 사이에 3년 동안 이어졌는데, 6개월 단위로 병동을 옮기며 실습을 한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저자가 옮겨다닌 총 여섯 곳의 상담실(외래환자 정신과, 아동을 위한 정신과 입원 병동, 일반의 진료소, 노인 요양소, 식이장애 입원 병동, 약물중독 병원)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이루어진 상담 사례를 소개한다.
"한 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책"이라는 아마존 독자의 평가는 허언이 아니었다. 칼을 들고 위협하는 소시오패스와의 긴박한 순간, 살고 싶어하지 않는 열두 살 꼬마 안에 감추어진 무시무시한 폭력과 비밀, 아이 아버지와 한 침대를 쓰기 싫어 자기 딸과 한 침대를 쓰려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격리되어 시설형 인간이 되어버린 장기 입원 환자, 자신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노년의 여자, 치매 때문에 악몽보다 더 지독한 과거(홀로코스트)로 돌아가는 노인, 완벽해 보이는 가족을 지배하는 각본과 그 안에 갇혀 신음하는 식이장애 소녀의 비극,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최악을 순간을 함께해야 하는 고통까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가 풀어집니다. 비밀 보장의 의무는 핵심 원칙이기 때문에 여기 등장인물과 정황 등 모든 내용이 허구라고 하지만, 여기 소개된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 그리고 우리 안에 엄연히 실재하는 이야기이다.
상담 사례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고, 또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임상심리사'로서 저자는 '이상행동'의 이유를 끊임없이 묻는다. 발작을 겪는 환자라면, 발작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람의 발작은 뭘 상징할까를 묻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일관된 내러티브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비정상, 정신이상이라고 말하는 이상행동이 환자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생존 모드)이며,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러니 나의 의사소통 방식에 그들을 끼워 맞추려 하지 말고, 그런 행동을 통해 환자가 우리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리 상담집이지만 이 책이 소설처럼 읽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병증이나 이상행동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삶과 사연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과 분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그 아래 숨은 진짜 인간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슬픈지 알겠다고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432).
"그들이 사회가 용납하기 힘든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들을 버리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433).
노희경 작가는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를 통해 '정신병'은 미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했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동일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긋기 전에, 부디 왜곡된 시선을 거두고 소리 없는 신음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보자고 말이다.
인류는 '진화'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그토록 잔인한 학대와 폭력이 일상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홀로 떨어져 고립된 삶을 사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혼자가 편하다고 위안해보지만, 사실은 모두가 사랑에 고프다는 걸, 그래서 아사 직전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마음에 자꾸만 들러붙는 '지독한 외로움'이라는 녀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녀석이라는 걸 알려 준다. 매혹적인 책이다. 그러나 따뜻한 위로 속에 오싹한 경고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