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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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삼십 대의 청청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당신을 주님이라고 영접하게 됐을까?"(81)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 그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이성이 가장 믿을만 하다는 '믿음'입니다. 누구나 어떤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나라에서 나고 자라며 비슷한 환경, 비슷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다른 믿음, 정반대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중에서도 하필 2천 년 전에 지구의 변방 한 점에 불과한 땅에서, 그것도 "삼십 대의 청청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예수라는 인물을 신으로 믿는 믿음은 어떻게 가지게 되는 걸까요?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로 이름이 높은 박완서 작가님도 그런 물음을 가지고 있었던가 봅니다. 누군가는 벼락이 친 것처럼 순간적으로, 도망갈 도리 없이 예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는데, 박완서 작가님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의심과 탐구 속에서, 저항과 번민 속에서, 따름과 실패 속에서 서서히 물들어갔다고 고백합니다.


<빈방>은 "1996년부터 1998년 말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다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입니다(7). 2006년도에 초판되었고, 2016년 3판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자신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게 된 동기"를 여러 모양으로 고백하는데, 자신은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에 "뭐 이런 소리가 다 있나 싶은 저항감 때문에 예수의 언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게 서서히 신앙으로 발전한 경우"(43)랍니다. 예수를 본받을 만한 분이라 생각은 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주님을 영접할 용기를 낸 것은 "암울한 시대상을 향해 거침없이 외친 정의 구현 사제단의 참다운 용기에서 영향"(183-184)을 받은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이라 할 수 있는 한 분을 예수께 이끌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정의에 이끌렸고, 사랑에 매혹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의와 사랑은 박완서 작가님의 성품과 삶의 지향점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특히 권력과 부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관심과, 먹을 것을 나누는 일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분이 한평생 짊어진 고민, 뜨거운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빈방>은 그렇게 자의식 강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매혹 당하는 과정, 우레와 같은 충격이라기보다 갈증을 적셔주는 단비처럼 서서히 깊어지는 묵상, 영혼의 심지에 불을 당기는 불꽃 같은 갈등과 깨달음의 열매가 아름답게 녹아 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22)라고 고백하는 박완서 작가님은, 그래서인지 유독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에 날카롭게 반응합니다. 사실 그것은 박완서 작가 개인의 위선이 아니라, 종교인의 위선이며,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한 위선입니다. 그래서 <빈방>은 세례 요한의 설교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찔러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을 쏟게 만듭니다.



"좋은 교인이란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닐까"(184).


<빈방>은 분명 같은 믿음을 가진 독자들에게 더 쉽게, 더 깊게 와닿는 묵상집입니다. 그러나 구도자적 물음 안에서 고통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이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 만큼이나 사회를 꿰뚫는 통찰도 날카롭습니다. 성경적 깨달음이 사회적 통찰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날카로운 사회적 통찰이 성경을 읽어내는 깊이를 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이 영혼을 힘차게 힘들어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진실되고 따뜻한 고민, 통렬하면서도 겸손한 고백이 삶과, 신앙과, 이웃과, 오늘과, 나와, 나눔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책입니다. 기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자비심 없는 종교란 나쁜 정치 못지않게 사람을 억압할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도 해방의 소식을 도리어 억압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닐까요"(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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