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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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순응 vs. 자아 발견

행복을 찾아 막다른 두 길을 폭주하는 이 세대에게!



읽을 만한 신앙서적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분들에게 요즘 꼭 읽어야 할 신앙서적으로 추천해드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입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처럼 유명한 성경 이야기도 없을 터인데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를 모티브로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탕자 비유'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이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가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은혜 충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매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탕부"라고 소개합니다. "탕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란 뜻입니다. "'탕자(蕩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프러디걸)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다"(20).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제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蕩父)이시다.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21). 그러나 우리가 '탕자 비유'라고 부르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도, 어쩌면 탕자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하고 아낌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탕부 하나님도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탕자의 비유"를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정정하며, 두 아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하며, 둘 다 아버지를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합니다. 둘째 아들(동생)은 "세리와 죄인"에 상응하며, 맏아들(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상응합니다. 둘째 아들 부류는 제멋대로 사는 죄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고, 맏아들 부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가는 길이 자아 발견의 길이요, 탐미적인 길이라면, 맏아들이 가는 길은 도덕적 순응의 길이요, 윤리적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 부류의 사람은 "진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는 완고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제멋대로 구는 부도적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63)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들과 맏아들로 대표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세대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책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충격적인 사실은, 둘 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났단느 것입니다. 둘째 아들(탕자)만 집을 나간 것이 아닙니다. "보통 기준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하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둘 다 똑같다"(65). 두 형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반대의 삶을 지향하지만, 아버지를 멀리 떠나 있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반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뜻이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다"(68).






 




"이 이야기의 과녁은 '제멋대로 사는 죄인들'이 아니라 매사에 성경의 규정대로 행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다"(34).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야기의 타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아니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는 탕자들을 향한 은혜의 메시지가 아니라, 형들이 넘쳐나는 교회, 다시 말해 '종교'가 되어버린 교회를 향한 매서운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탕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선포될 때에, 두 부류가 얼마나 다르게 반응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십니다. 탕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이끌리는 사람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형'이 아니라, 허랑방탕한 '동생'입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형'들은 오히려 그런 현상에 당황하며 경악과 분노 속에 불만과 비판을 쏟아놓습니다. 탕자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속이 뒤집히는 이유는 자신의 의로움 때문입니다. 형 부류의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워 그분을 통제하려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구주로 행세"하기 위함입니다(76).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왔지만, 형은 '잃어버려진 상태'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맏아들을 멀어진 상태로 놓아둔다. 못된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는데 착한 아들은 그렇지 않다. 창녀들과 놀아난 사람은 구원받는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여전히 잃어버려진 상태다"(66). 팀 켈러 목사님은 눌 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형 같은 바리새인의 상태가 영적으로더 절망적이라고 말합니다(80). 돌아와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훨씬 더 멀어지는 쪽은 독실하고, 도덕적인 형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은 "복음의 독특하고 급진적인 속성"(17)을 비유를 통해 예리하게 포착해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처럼 착한 사람이 더 문제라고, 도덕적인 사람이 더 문제라고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의의 뿌리까지 회개하라"는 이런 가르침은 종교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 복음은 종교가 아니며, 종교와 전혀 다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보다 더 독특하고 급진적인 선포는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예수님의 급진적인 재정의, "예수님은 도덕적 비행을 사실상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도 가장 방탕하고 부도덕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철저히 잃어버려진 상태일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 왜 그럴까?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몰어내려던 두 아들처럼 말이다"(76).


모든 교회, 스스로 '크리스천'임을 자처하는 모든 성도는 잃었다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매우 위험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형들이 넘쳐나는 교회"를 조명합니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도덕주의적인 '형'의 태도에 빠지게 쉬운데, 그럴수록 자신이 '형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절대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음을 알았으나 형은 몰랐다"(103).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을 수도 있다는 이 충격적인 메시지를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탕부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습을 벗어난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그 의미는 하나뿐이다. 우리의 설교와 행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41).


형과 같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복음이 얼마나 방해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복음이 우리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해결책은 지금부터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못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174).


보상을 바라는 신앙 태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억울한 심정에 자주 사로잡히는 신앙 태도, 스스로를 의롭게 여겨 재판장, 선생 노릇을 즐기는 신앙 태도가 복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식스센스와 같은 반전처럼, "내가 바로 바리새인이었구나" 하는 경악할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어쩌면 오래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늘 아버지와 함께하며 아버지를 섬기는 생활을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예리하게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모든 성도가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급진적인 복음의 물결이 우리의 온 심령을 사로잡아 주시고, '거듭나게' 해주시기를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누구보다 오래된 신자, 모든 교회가 읽어야 할 책입니다. 그러나 에수 복음의 심장부를 알고 싶어하는 구도자들에게도 기꺼이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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