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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마지막 그림 - 화가들이 남긴 최후의 걸작으로 읽는 명화 인문학
나카노 교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6월
평점 :
화가들이 남긴 최후의 걸작으로 읽는 명화 인문학
화가는 마지막 그림에 무엇을 담았나?
명화 관련 교양도서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는 책입니다. 저자는 "독일문학을 전공했고, 바로크에서 인상주의에 이르는 유럽 미술에 조예가 깊다"고 합니다. 미술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이 의외입니다. 유럽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문학을 전공한 이력이 저자를 "최고의 명화 이야기꾼"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글맛이 쫄깃하다고 할까요, 화가들의 이야기가 소설을 읽듯 재밌게 읽힙니다.
"15세기에서 19세기를 살아간 그들이 각각 어떤 문제에 부딪혔고
어떤 노력 끝에 걸작을 탄생시켰는지,
나아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무엇을 남겼는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7).
이 책은 제목처럼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 집중하는 책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마지막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화가의 전생애와 초기작품과 대표작까지 모두 살펴봐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화가는 마지막 그럼에 무엇을 담았나?"를 묻고 있지만, 그 답에 이르기 위하여 화가의 '전생애'를 조명합니다. 그동안 단편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통해 표피적으로 알고 있던, 아니면 많이 들어본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던 한 명 한 명의 '화가'를 매우 잘 알게 된 느낌입니다. 그것도 입체적으로 말입니다. 더불에 유럽 미술사에 대한 조예까지 깊어지는 것은 덤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는 사람의 관능을 일깨울 수 있는지 아는 자는 어떻게 하면 관능을 지울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확신범이다"(35).
이 책의 '느낌'을 전하기 위해 보티첼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이 책이 소개하는 첫 화가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가장 극적인 화풍의 변화를 보인 화가이고, 그리하여 그의 만년작은 그동안 내가 알던 그 '보디첼리'가 아니라는 충격을 함께 공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명작"입니다(23).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익숙한' 작품일 겁니다. 저자는 최전성기의 보티첼리 작품의 매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춤추는 것 같은 전체적인 분위기, 꿈꾸는 듯한 인물의 모습, 완벽한 색채, 넘치는 풍요로움과 화려함, 순수함, 서정성…. 보티첼리의 작품에는 이런 특징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 그 앞에 서면 해석 따윈 쓸모없게 느껴진다.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이다"(31). 그런 보티첼리 화풍에 가장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은 여성의 누드입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저자의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티첼리는 "육욕의 아름다움을 부추기는 화가나 문학가는 악마의 앞잡이다"라는 사보나롤라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도미니코회 수도사의 가르침을 접한 이후 작품에서 우아함과 아름다움, 서정성을 완전히 지워버렸다"(33). 보티첼리의 인기는 빠르게 식어갔다고 합니다.
보티첼리 외에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화가와 그의 마지막 작품은 고야와 밀레, 그리고 고흐입니다. 그들의 격동적인 삶과 화풍의 변화, 그리고 마지막 작품 이야기는 웰메이드 영화처럼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얼굴 같은 건 닮지 않아도 좋다. 위대함을 표현하라"(170).
나폴레옹이 화가 다비드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문화 전체가 민중과 함께 걷기 전", 그림은 왕후 귀족, 성직자, 또는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역사화(신화화, 종교화 포함), 초상화 등을 "의뢰받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가들에게 그림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화가의 삶에는 늘 후원자 이야기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특히 이 책에는 화가와 그를 후원하는 왕의 운명이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엔, 화가들이 안목 있는 왕의 덕을 많이 봤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더 큰 덕을 본 것은 화가가 아니라 왕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궤적을 남기지 못한 왕이라 해도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통해 그 이름이 기억되고 그 궤적이 추적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벨라스케스라는 천재가 없었다면 필리페 4세의 궁정 생활이 후대의 흥미를 끌 일은 없었을 것이다"(121). 반대로 뛰어난 군주였지만 위대한 화가를 만나지 못해 그 위풍당당함을 후대 작품으로 남길 수 없었던 안타까운 군주도 많습니다. "뛰어난 군주 또는 악명 높은 군주가 동시대의 뛰어난 화가에게 초상화를 맡길 수 있었던 예는 예상외로 적다. 엘리자베스 1세,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개성이 강한 이들은 유감스럽게도 그에 어울리는 초상화를 남가지 못했다. 한편, 모처럼 솜씨 좋은 화가를 곁에 두고도 군주의 역량이 부족했던 예로는 벨라스케스와 펠리페 4세, 반다이크와 찰스 1세, 루벤스와 마리드 메디시스(앙리 4세의 아내), 고야와 카를로스 4세를 들 수 있다. 화가와 군주 모두 역사에 커다랗게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경우는 뒤러와 막시밀라안 1세, 티치아노와 카를 5세 및 펠리페 2세, 홀바인과 헨리 8세, 그리고 다비드와 나폴레옹 정도일 것이다"(170).
"그림이란 화가의 삶의 방식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7).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화가는 '화가의 왕'이라 불린 루벤스이고, 살아서는 이 보다 더 불행할 수 없었으나 그 비극적인 이야기가 오히려 작품에 더 강렬한 감동을 남기는 비운의 아이콘은 '고흐'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그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화가의 행복과 불행이 함께 보일 듯합니다. 이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림 속에서 화가를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그것을 만들어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기도 한다"(114).
자꾸만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에만 익숙해지는 우리입니다. 이 책과 더불어 모처럼 교양 좀 쌓아보면 어떨까요? "최고의 명화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저자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읽는 재미, 보는 재미, 그리고 앎의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