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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평점 :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꽃 같은 미소였다"(악의 꽃, 212).
<다세포 소녀>라는 영화를 보면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나옵니다. 소녀 등에는 잿빛의 우울한 인형이 항상 매달려 있지요. B급 감성이 충만한 영화였지만, 우리 모두가 짊진 인생의 짐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이건 질병이건 실패이건 거절당한 아픔이건 인생의 짐이라는 것이 참 징글징글합니다. 등짝에 착 들러붙어 여간해서 떨어져나가지 않으니까요. 인생이란 그렇게 "거듭되는 '오늘'을 있는 힘을 다해 버"(105)텨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9년 전의 기도>는 그렇게 저마다의 짐을 지고 거듭되는 오늘을 있는 힘을 다해 버텨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이타 현 남부의 바닷가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총4편('9년 전의 기도', '바다거북의 밤', '문병', '악의 꽃')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연작소설입니다. 꾸불꾸불한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자리잡은 마을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귀향을 합니다.
"올해 서른다섯이 된 사나에는 아들 캐빈을 데리고 도쿄를 떠나 이 바닷가 작은 마을로 돌아왔"(10)습니다. 캐나다 사람과의 동거로 천사 처럼 예쁜 아들을 얻었지만, '갈가리 찢긴 지렁이'처럼 울부짖는(아마도 자폐) 아들을 홀로 키울 수 없어 귀향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9년 전 함께 캐나다 여행을 떠나 밋짱 언니의 소식을 듣습니다. 밋짱 언니의 아들이 큰 수술(뇌종양)을 하고 입원해 있다는 것입니다. 사나에는 밋짱 언니의 뒷편에 슬픔이 버티고 서 있었던 9년 전 여행을 기억하며, 어제 자신의 뒷편에 서 있는 슬픔의 존재를 느낍니다(9년 전의 기도).
이제 막 대학교 3학년이 된 잇페이다는 같은 동아리 친구 유마, 도오루와 함께 강의를 빼먹고 바닷가 작은 마을로 여행을 왔습니다.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의 손인지, 아버지의 손인지 모르지만, 바다거북의 산란을 보러갔던 기억을 좇아 아버지의 고향에 온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재했던 아버지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할어버지의 집이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가 심각한 뇌종양 수술을 받고 누워있는 지금, 그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흐릿한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바다거북의 밤).
4편의 연작소설을 이어주는 것은 이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도시야'와 그의 친구이기도 한 밋짱의 아들 '다이코'입니다. 아버지의 고향을 찾았던 잇페이다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돌아가는데 '도시야'의 도움을 받습니다. 잇페이다는 아버지(할아버지의 집)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자신을 도와주는 '도시야'가 자신의 아버지를 친형처럼 따르며 지금은 폐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잇페이다의 아버지 마코토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도시야는 다음에 다이코를 문병갈 때 마코토 형도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 상태입니다('문병').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던 젊은 여자" 치요코는 이미 자신을 매섭게 학대했던 시어머니처럼 늙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처럼 증오나 악의, 적의 등이 간단히 잊혀질 때가 오리란 것을 알았더라면 자신도 남을 마음껏 미워할걸 그랬단 말인가"(악의 꽃, 210). 세월은 그녀를 쫓아다녔던 증오나 악의, 적의 등을 쓸어가버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주위에 피어나는 악의 꽃을 봅니다. 치요코 할머니는 틈만 보이면 번성하려는 악의 꽃을 뽑아 주었던 다이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악의 꽃).
"다이코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치요코 주변에서 틈만 보이면 번성하려는 악의 꽃을 뽑아 줄까?"(악의 꽃, 213)
이 소설은, 슬픔은 우리 가슴에 있지 않고 우리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다고 말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슬픔이란 존재가 등 뒤에 버티고 서 있지만, 우리가 손을 맞잡으며 서로를 위로할 때 우리 가슴은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사나에의 가슴에는 아무런 슬픔도 없었다. 그것은 사나에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돌아본들 햇살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않는다는 것을 안다. 슬픔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몸을 웅크리더니 사나에의 손 위에 그 손을 올리고 위로하듯이 쓰다듬었다"(9년 전의 기도, 112).
이 책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디에도 자신이 있을 장소를 찾지 못하고, 왠지 주위와 어울리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입니다(91).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자신의 삶이 비루해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인물은 "걸음마가 늦고 말도 늦어 아직 젊은 와타나베 코지와 미츠 부부를 많이 걱정하게 한 그 아이"(210), 지금은 뇌종양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있는 다이코입니다.
최근 큰 화제를 낳으며 종용한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암에 걸린 난희와 치매에 걸린 희자가 만났습니다. 간암 수술을 앞두고 있는 난희는 치매에 걸린 희자를 끌어안으며 "언니는 나보다 낫다고 생각해라, 나는 언니보다 낫다고 생각할게"라고 울먹이며, "이제야 좀 위로가 되네"라고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등에 슬픔의 진을 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슬픔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비슷한 슬픔을 짊어진 사람들입니다. 뒤집어진 바다거북이 사지를 휘젖듯이 거듭되는 오늘을 버텨내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을 밀쳐내고 있는 것인지, 모래를 밀쳐내고 있는 것인지, 시간을 밀쳐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바다거북처럼, 있는 힘을 다해 슬픔을 밀쳐내고, 고통을 밀쳐내도 여전히 반복되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우리가 밀쳐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고 속절없는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꽃 같은 미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질없고 속절없어 슬프지만, (노희경 작가의 말처럼) 또 아무것도 아니기에 슬플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리 슬플 것도 없고, 거기에 맞잡을 수 있는 서로의 손이 있다면 거듭되는 오늘을 버텨내며 살아도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가슴에 품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