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문장 - 책 속의 한 문장이 여자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한귀은 지음 / 홍익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삶과 문장이 만나는 순간!



<여자의 문장>이라는 책 제목, 그리고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두 문장, <책 속의 한 문장이 여자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생의 결정적 순간, 내 인생을 바꾼 문장들>. 이것들을 보고 독자는 무엇을 기대해야 옳았을까요? 적어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책입니다. 콘셉트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잘 읽히는 책이기는 합니다. 소개팅 자리에 들었던 것과는 좀 다른 사람이 나와 있어 실망했지만, '의외로' 신선한 재미를 주는 상대방에게 끌렸다고나 할까요. 배운 것도 많은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여자의 문장>은 여자로, 작가로, 엄마로 살아가는 40대 여교수의 자기 성찰적 에세이입니다. 생각이 많고, "바쁘냐?"고 묻는 영혼 없는 인사를 싫어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엘피판을 들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니체를 좋아하고, 공부하지 않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아들 때문에 은혜받는 신자가 된 기분을 느끼는, 개성 강하고, 자의식 강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관계에 있어 진실되고, 자기반성도 잘하는, 책만큼 영화도 좋아하는데 슬픈 영화, 아름다운 영화를 보면 몇 날이고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책임감도 강하고 매사 이성적이지만 때로 감성에 풍덩 빠쪄 헤매기도 할 것 같은, 그럴 것만 같은 여자입니다. 무신론의 대표 사상가인 니체나 버트런드 러셀의 책을 좋아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한 권의 책을 읽고 이렇듯 한 사람을 함부로 넘겨짚는 것이 불쾌하시다면 큰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시험 이틀 전 날, 아이가 흥분하면서 말했다. 

"엄마, 빨리 시험 치르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응? 왜?"

"그래야 시험 마치고 바로 놀 수 있잖아요."

"너 지금도 충분히 놀잖아."

"그래도 마음 편하게는 못 놀잖아요"(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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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랑해?"

아이는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응."

일차 긍정이 나왔으므로 이차 부연 질문에 들어간다.

"엄마를 사랑한다면, 엄마가 원하는 걸 해야지?"

아이는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노예지"(250-251).


이렇게 사랑스럽고 명민한 아이라니요. 엄마와 아들이 나눈 대화인데 한참을 웃었습니다. 아이가 참 매력적입니다. 엄마와 스스럼 없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천진하고 지혜로운 아이를 보니, 엄마도 어떤 사람인지 미루어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독자입니다. 글 속에서 그 사람이 너무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수려한데 그 글을 쓴 사람이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책을 덮어버리고도 영 찝찝합니다. 그래서 <여자의 문장>을 읽을 때도, 말보다 어떤 사람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삶과 문장이 만나는 순간에 관해 쓰고자 했다"고 말합니다(7). 저자처럼 내 삶과 이 책의 문장이 만났던 순간들이 있는데, 가장 강렬했던 만남은 다음의 문장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학교는 학교답게 만든 아이들은 공부만 했던 아이들이 아니라 잘 노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우리 추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추억이 자아를 만드는 거다"(98). 이 한 줄 문장이 지나온 날, 학창시절뿐 아니라, 주어진 일로 생의 절반을 채우고 있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삶의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해준 것이지요. "추억이 자아를 만드는 거다"는 한 문장은 내 삶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알려주었습니다. '자아계발'과 같은 나 중심의 성취적인 목표를 지향했던 2-30대를 지나니 비로소 '관계'의 중요성이 눈에 보입니다. 


<여자의 문장>은 재미있게 잘 읽히면서 배울 것이 참 많은 책입니다. 책 속 사진처럼 다소 외로운 기분이 들 때, 조용히 잠겨들기 좋은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나도 저자와 같이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외면의 일기가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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