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 인도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이화경 지음 / 상상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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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도(印度)가 인도(引導)하는 대로 따라가 보라고(15).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간이 필요했다>는 이화경 작가의 인도여행 에세이입니다. 그녀는 콜카타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콜카다 대학에서 한국어 선생을 모집한다는 대학교 게시판 공고 한 장이 그녀를 그곳까지 가게 했습니다. 결혼도 했고, (아마도 그때 이미) 딸도 있고, 몇몇 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사는 작가가, 더구나 "한나절이 걸리는 외출도 맘 편하게 하지 못하는 아줌마"(23)인 그녀가 왜 돌연 콜카타로 도망치듯 떠나야'만' 했는지,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미급한 누군가를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제목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인도 여행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후지와라 신야였습니다. 덕분에 인도하면 제일 먼저 시체 태우는 갠지스 강이 그려지고, 죽음을 은폐한 채 살아가는 우리 앞에 떡하니 죽음과 시체를 던져주었던 그의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가 타자적이고, 외부적이라면, 이화경 작가의 이야기는 (타자와 반대되는 개념에서) 자아적이고, 내면적입니다. 그리하여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가 사회와 풍경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갖게 했다면, 이화경 작가의 이야기는 일상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책의 첫머리부터 격하게 공감하고 말았는데, 내 안에 일어났던 지진 같은 균열을 그녀도 똑같이 겪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만 별스러워서, 까다로워서, 성질이 더러워서, 심보가 고약해서, 막돼먹어서, 그렇게 발광을 하는 줄 알았지. … 십 대 아이들만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게 아니라는 걸, 어른도 끊임없이 성장통을 겪는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어. … 현실적인 맥락에서는 점점 더 무력해지고 동시에 내면에서는 갈수록 분노와 악에 치받치는 나 자신이 문제 있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또렷이 알 수 있었어. 그때는 세상과 사람과 관계에 대해 수동적인 무력감과 동시에 공격적인 적개심을 느끼는 게 우울증의 전형적인 징우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마디로 나는 '앓고' 있었던 거야(14). 


그녀의 친구가 했다는 지적처럼 "여행 가고 싶은 열망과 가야 할 필요와 갈 수 있는 백가지 조건이 일상이라는 단 한 가지 핑계 앞에서 맥없이 껶여 버린 적이"(24) 나 역시 한 두번이 아닌데, 생면부지의 길 위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 여인은 이미 제겐 영웅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환호할 준비가 되어버린 거지요. 글을 예쁘고 맛깔나게 참 잘 쓰는 작가라는 걸 알기도 전에 말입니다. 


… 나중에 상상도 못할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지금 이곳을 떠나 저 멀리로 가고 싶다는 마음속 떨림이 전혀져 왔어. …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그저 인도(印度)가 인도(引導)하는 대로 따라가 보라고. 일단 그 길을 따라가 보라고. 그렇게 나는 벵골의 밤 속으로 천천히 따라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어(15).



생명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축제가 아니던가(111).


후지와라 신야는 우리 눈앞에 '죽음'과 '시체'를 던져주었었는데. 그리하여 인도 여행의 핵심 키워드는 '구도자의 길'이었고, '철학자의 사색'이었는데, 이화경 작가의 여행은 통찰과 사색이라기보다 날 것 그대로의 '존재 앓이'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도도 사람 사는 동네"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51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하면서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인도를 궁금하게 해주고(61), "천국은 틀림없이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거리의 책방 속으로 뛰어들고 싶게 만들고(69), 무례한 호기심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영역 안에서 철저하게 개입할 때만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인도의 카스트"라는 걸 주의하게 해주고(86), "세계 어디에도 없는 레닌 동상이 콜카타에 서 있"는 운명의 아이러니도 생각해보게 해줍니다(93). 인도에서 살았고, 인도를 여행했고, 인도를 이야기하지만, 섣불리 인도를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인도에는 많은 인도가 있다고. 인도의 모든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상이한 것들 속에 존재한다고. 거기에는 단 하나의 표준도, 단 하나의 고정된 정형도 없다고. 인도로 가는 일방통행은 없다고. 인도를 이해하는 원 웨이는 없다고(62).



이 책이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화경 작가는 이 책의 부제를 "인도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이 책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음 문장을 읽어주고 싶습니다. 


소는 들판에 풀어놓으면 평생 그 들판에서 풀이나 뜯어 먹으며 산다지. 언덕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사람은 허블 망원경을 우주 공간으로 올리는 데 15억 달러를 쓰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수리비로 20억 달러를 더 쓴다지. 소가 들으면 풀 뜯다 웃을 일에 엄청난 돈을 쓰는 이유는 뭘까.딱 한 가지.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 뭐겠어(67).

삶이라는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순수한 호기심이 나를 이끌어가기를, 그리하여 더 적극적으로 나에게 사치와 낭비를 허하겠노라고, 혼자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그저 얻어지는 게 없다는

측면에서, 길은 진실했다


몸으로 길바닥과 만나고, 몸으로 사원에 엎드리고, 몸으로 밥을 비비고, 강물에 몸을 적시고, 딱딱한 침대와 몸을 섞다보면, 그 몸속에 인도의 영혼이 시나브로 소리 없이 깃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실존의 물음을 던지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자의식의 우물로 가라앉기만 할 뿐. 그러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자아를 찾으려면 그저 입 닥치고 길바닥으로 나설 밖에(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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