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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 정여울과 함께 읽는 생텍쥐페리의 아포리즘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생텍쥐페리의 명문장과 내(정여울)가 나눈 대화록이다"(6).
1988년, 그때의 나는 응팔의 덕선이처럼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갑자기 폭풍처럼 몰아닥친 사춘기라는 열병에 성장앓이를 하느라 아팠습니다. 그 열병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가며 우리를 감성적인 문학소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들 우정의 교본이었던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우리들 우정의 교본이었고,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를 읽으며 외로움을 견디었고, 강신재 작가의 <젊은느티 나무>를 읽으며 설레였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으며 우리가 잃어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커다란 공명을 만들어내는 문장을 만날 때면 편지를 써서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는데, 가장 많이 인용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였을 겁니다. '길들이다' 때문이었지요. <어린 왕자>라는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걸어 이 책을 읽어주었기 때문인데 친구가 가장 먼저 읽어준 부분도 바로 이 '길들이기'였습니다. 숨죽여 듣고 있는 저를 위해 친구는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어린 왕자>를 조금씩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제가 매일 전화를 기다리고, 전화올 시간이 다가오면 설레이기를 바랐습니다. 사막여우에게서 배운 대로 저를 길들이고 싶어했지요. 한때 제 전화번호 뒷자리는 '8612'였습니다. 어린 왕자가 살았던 소행성 'B612'를 따서 말입니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은 정여울 작가가 생텍쥐페리의 명문장과 나눈 대화록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작품 중 <어린 왕자>만 넑리 읽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정여울 작가는 독자들이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어린 왕자>뿐 아니라, <인간의 대지>,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정여울 작가의 마음에 따스한 공명을 읽으켰던 문장과 사색들을 여기에 풀어놓은 것도, 이 작품들과 독자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지 말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 그 허영심 섞인 말 뒤에 사랑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채야 했는데. 꽃들이란 모순 덩어리거든.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102).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사랑했던 <어린 왕자> 너머에 그 아름다운 동화를 탄생시킨 '생텍쥐페리'라는 작가를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지독한 편지광이었고, 어머니를 사랑했고, 하늘이 주는 지극한 해방감을 사랑하여 지상의 안락한 삶을 포기한 조종사였다는 것도요. 요즘 애니메이션 영화로 '어린 왕자'가 개방되면서 <어린 왕자> 다시 읽기 열풍이 감지되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면 꼭 다시 읽어야 할 동화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릴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랍니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읽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을 울렸던 한 문장은 어린 왕자의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102).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내 지난 날에 대한 회한이 이 한 줄 위로 우르르 쏟아져내렸습니다. 우린 이미 모든 것을 알 나이라고, 다 안다고 우겼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고, 무엇보다 사랑에 가장 서툴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하는데 육신의 눈은 세월이 지날수록 쇠하여 가지만, 마음의 눈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시력이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눈에 보는 것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정여울 작가처럼 저도 "다 타버려 지저분한 촛농 덩어리만 남은 흔적을 보고도 그 양초가 얼마나 환한 빛을 피워 올렸을지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사람"(49)이 되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마도 세월의 내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은 책을 정말 '잘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해치우듯 읽어제끼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깊은 사색의 우물을 길어내는 정여울 작가를 보며 나의 독서습관을 많이 반성했습니다. 독서의 내공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습니다.
나에게 이 책은 열병 같은 사춘기를 지나 이제 정말 어른이 된 친구가 보내온 편지 같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아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상처받을지라도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