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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 - 최신 원전 완역본 ㅣ 아르센 뤼팽 전집 7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평점 :
아르센 뤼팽이 등장하지 않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아르센 뤼팽 전집> 일곱 번째 시리즈 <포탄 파편>에서는 주인공 아르센 뤼팽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센 뤼팽이 등장하지 않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뭔가 아이러니합니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아르센 뤼팽은 언제쯤 등장을 할까? 남자 주인공 폴 들로즈가 아르센 뤼팽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까? 그의 아내 일리자벳이 아르센 뤼팽과 관련이 있을까? 의문의 남자 헤르만 소령이 혹시 아르센 뤼팽은 아닐까?" 별별의 추측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아르센 뤼팽의 궤적이나 신출귀몰한 양상을 살펴봤을 때, 충분히 "신분 위장"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그런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야기가 중반부를 넘어갈 쯤 아르센 뤼팽이 딱 한 번 등장합니다! 미궁에 빠진 남자 주인공에게 나타나 사건의 연결고리를 풀어주고 홀연히 떠나는 인물로 말입니다. 아르센 뤼팽은 뭔가 다른 일로 무척 바빠보입니다!
왜 <포탄 파편>에서는 아르센 뤼팽이 등장하지 않을까요? 그건 아마도 이 책의 스토리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실제로 프랑스는 전시 중이었으므로, 늘 공권력을 조롱하며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둑"의 활약을 그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게다가, 이어지는 8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르센 뤼팽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국 프랑스를 위해 일하는 대단한 애국자이기도 합니다! 7편 <포탄 파편>이나 8편 <황금 삼격형>에서 작가 모르스 르블랑이 특별히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장교, 대령, 대위, 또는 상이용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이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지 그리는 것을 보면, <포탄 파편>의 탄생은 애국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포탄 파편>은 한마디로 전쟁 로맨스입니다! 폴 들로즈와 엘리자벳은 오늘 아침 막 결혼식을 올린 행복한 신혼부부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 오르느캥 성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그 성은 엘리자벳의 아버지가 아내를 잃고 꽁꽁 닫아두었다가, 딸의 결혼지참금으로 준 것입니다. 세상은 전쟁에 대한 소문과 징집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폴 들로즈는 아내 엘리자벳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한 엄청난 비극을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여행 중이었던 폴 들로즈는 어느 한적한 숲 속 공터에 있는 예배당에서 뜻밖에 독일 황제와 마주쳤고, 곧이어 황제가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언을 들고 찾아온 부인과 다툼을 벌이다 아버지는 그 부인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그런데 누군가 아버지 살해와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완벽하게 지워버렸고, 오직 폴 들로즈만이 자신의 기억 속에 그날의 사건을 각인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폴 들로즈와 엘리자벳이 오르느캥 성에 도착해 엘리자벳의 어머니가 그려진 초상화를 본 순간, 그들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초상화 속의 여자가 바로 폴 돌로즈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이었기 때문입니다!
폴 들로즈는 오르느캥 성이 독일의 작은 마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숲으로 난 지름길을 통해 아버지가 살해되었던 예배당과 공터를 발견하고 경악합니다. 이로써 엘리자벳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더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폴 들로즈는 그곳에서 한 괴한에게 공격을 받는데, 괴한은 "H, E, R, M."이라고 새겨진 단도를 떨어뜨린 채 달아납니다.
순수했던 어머니(등드빌 백작부인)가 남편 폴 들로즈의 아버지를 살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엘리자벳, 아버지를 살해한 여인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폴 들로즈는 서로 괴로워하는데, 결국 동원령을 받고 폴 들로즈가 입대함으로써 이별하게 됩니다. 비극적 운명 앞에 정신이 혼란해진 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에 임하며 혁혁한 공을 세워가는데, 아버지를 죽인 여자, 오르느캥 성의 초상화 속 여자, 엘리자벳의 어머니인 헤르민 당드빌과 너무나 닮은 정체 불명의 인물에게 계속 공격을 받습니다. 폴은 그 정체 불명의 인물이 독일의 '헤르만 소령'이라는 걸 알아내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오히려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엘리자벳의 어머니 헤르민 당드빌은 정말 폴의 아버지를 살해했는가? 헤르민과 너무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계속해서 폴을 공격하는 헤르만 소령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살해되던 날 독일 황제는 왜 그 숲속에 있었을까? 포탄 파편에 남아 있는 엘리자벳이 포탄에 맞아 죽었다는 증거처럼 엘리자벳은 정말 독일군에게 살해당했는가?
<포탄 파편>은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건의 연결고리가 막바지에 가서야 확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쓰인 작품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조극 프랑스를 위해 작품으로 독일군과 싸우는 작가의 애국심을 즐기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괴도 뤼팽의 신출귀몰한 모험담이 아니라, 전쟁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라는 점이 색다른데, "무기여 잘 있거라"나 "진주만"과 같은 수많은 전쟁 로맨스가 이 작품에 빚을 지고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