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인생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아주 많다"(533).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생각할 때마다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시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섬 같이 고립된 존재인가? 아니면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서 점차 멀어지는가?' 이 책이 새삼 저에게 던져준 질문입니다.
"세실리아가 존 폴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는 건 존 폴을 배신하는 것과 같다. 세실리아는 존 폴이 자기 딸들을 성폭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기의 인생을 걸 수도 있었다"(151). 자신은 남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내와, 쌍둥이 자매처럼 자라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촌과, 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엄마가 있습니다. 세실리아는 예쁜 세 아이를 키우며, 그릇을 판매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가정적인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주 열정적인 여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된 편지 한 통이 그녀의 일상을 헝클러놓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사회불안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테스는 쌍둥이 자매처럼 자란 이종사촌 펠리시티와 남편 윌과 함께 사업을 하며, 아들 리엄과 행복한 일상을 가꿔가는 수줍음 많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 말이 있다며 자신 앞에 마주 한 윌과 펠리시티의 폭탄 고백으로 그녀의 일상은 급속도로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학교에서 행정비서 일을 하며 혼자 사는 할머니 레이첼은 아들 내외와 사랑하는 손자가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한 상실감에 빠져듭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남편마저 떠난 그녀의 삶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상실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즈번드 시크릿>은 불길한 예감 속에 남편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가는 세실리아와, 남편과 사촌이 자신을 속였다는 상처 속에서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만들어가는 테스와, 살해된 딸의 비밀을 풀지 못한 미궁 속에서 여전히 혼란한 삶을 살고 있는 레이첼의 이야기가 '세인트 안젤라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씨줄과 날줄로 교차되며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해갑니다.
"테스는 고개를 들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비행기를 타고서 하늘 위 어딘가를 날고 있을,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해하며 다른 날, 다른 계절, 다른 인생으로 날아가고 있을 펠리시티를 생각했다"(505).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엄청난 비밀을 숨긴 채 나를 속여왔음이 드러나는 순간, 신뢰가 깨저버린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사랑은 격렬한 증오의 가시가 되어 심장을 파고듭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 사이에는 베를린 장벽만큼 절망적인 장벽이 가로놓이게 됩니다. <허즈번드 시크릿>은 사랑하는 사람의 비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안과 고통과 충격을 감각적인 문체로 정밀하게 포착해냅니다. 등장인물 중 '세실리아'라는 인물은 혼자 하는 생각조차 수다스럽게 느껴질 만큼 시끄러운데,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의 저자가 꼭 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햇습니다. 고요한 내면을 파고들 때조차 저자는 수다스럽게 그것을 묘사하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세실리아는 결혼 생활이 완벽하게 박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폴리를 위해, 부상당한 병사들이 그렇듯 절름거리며 걸어가야 한다. 세실리아는 증오의 물결을 안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세실리아의 비밀이 될 것이다.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비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증오의 물결이 지나가면 또다시 진잔한 사랑이 찾아올 거다"(531). 누군가 날 속였고 더 이상 그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면, 돌아서버리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 몸으로 묶인 가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상처 속에서도 다시 서로를 끌어안아야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역겨워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한 걸음을 다시 떼어야 합니다.
"세실리아는 존 폴에게서 시선을 떼고 폴리를 보았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죽어가거나 장벽으로 막힌 도시에서 사는 것 같은 타인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기 전까지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도 자기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말이다"(509).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도 비밀을 갖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사실이 알려지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받을까봐? 알려지면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서?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세상엔 비밀이 없는 사람이 없으며, 나도 한 두 가지쯤 나만의 비밀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누군가의 비밀을 함부로 파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줍잖은 호기심은 더욱 위험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으로도 완벽하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책의 '에필로그'는 다른 그 어떤 작품보다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인생이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살아볼만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정말로 '다' 안다면 오히려 따분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사랑을 이끌어가는 긴장을 만들어내지 않을까요?
"우리 인생이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어떤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는다. 그저 판도라에게 물어보자"(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