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시 삼백수 : 5언절구 편 우리 한시 삼백수
정민 엮음 / 김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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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황진이

 

 

곤륜산 옥 누가 깍아

직녀의 빗 만들었노.

견우와 이별한 뒤

속상해서 던졌다네.

 

 

황진이, 그녀의 시는 참 재치가 있다. 얼레빗 같은 노란 반달이 반공중에 걸려 있다. 누가 쓰던 걸까. 누군가 곤륜산의 좋은 옥을 캐어다가 마르고 깍고 직녀에게 선물했겠지. 그 빗으로 매일 곱게 단장하며 견우와 사랑을 속삭였겠다. 하지만 견우가 내 곁을 떠나 은하수 저편으로 건너가 날마다 함께 있던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뒤로 얼레빗은 이제 쓸모가 없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굴 위해 머리 빗을 일이 없다. 곱게 단장할 일이 없다. 속이 상해서 푸른 허공에 냅다 던져버린 그녀의 빗은 지금도 허공에 걸려 저렇게 빛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처럼,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같이(247).

 

 

낮술

 

이덕무

 

 

 

가을 샘 무릎 밑을 울며 지나고

깊은 산속 가부좌를 틀고 앉았지.

낮술이 해 질 녘에 잔뜩 올라와

후끈후끈 두 귀가 단풍 같구나.

 

 

밤나무 아래 쉬면서 지은 시다. 찬 샘물이 나무 밑에 가부좌 틀고 앉은 내 무릎 아래쪽으로 찬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물소리 들으며 눈길을 앞에 주니 빗긴 햇살 비친 가을 산이 온통 벌겋다. 햇살에 얼비친 내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른다. 내 귓불이 이렇게도 붉은 것은 건너편 단풍나무 붉은빛이 얼비친 것일까? 아니면 아까 낮에 반주로 마신 몇 잔 술이 느닷없이 이제 와 올라온 것일까? 나는 아무 말 않고 불게 앉아 있다. 단풍나무처럼.

 

 

내 집

 

이덕무

 

 

정승 이름 나 몰라라

도서 취미 알 뿐일세.

뜨락 나무 나와 같아

맑은 바람 모은다네.

 

 

정승이 누군지 장관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고맙고 달다는 것뿐. 세상길을 보면 먼지만 뿌연데 책 속을 보면 갈 길이 또렷하다. 지금 사람과 얘기하면 탁한 느낌이 들지만 책 속의 옛사람은 맑은 음성을 들려준다. 나는 세상과 담쌓고 책과 마주한다. 그렇다고 세상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을 나는 책을 통해 배운다. 내 집 마당의 나무도 주인을 닮아서 빈 허공에 두 팔 높이 들고 서서 지나가는 맑은 바람들 다 들렀다 가라고 불러 모은다.

"흘러가는 것이 어디 물소리뿐이랴. 덧없는 욕심들도 함께 씻겨 흘러간다"(265).

​5언절구 <우리 한시 삼백수>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시 3편입니다. 시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제법 우리 시를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높은 산에 오른 날이나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날이면 아버지는 외우고 있는 시들을 한 편씩 읊어주곤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해주셨듯이 달이 예쁜 밤이면 저도 누군가에게 황진이의 '반달'을 분위기 있게 읊어주고 싶습니다. 가을 날 나무 아래 앉아 쉬며 벌겋게 달아오신 가을 산이 햇살에 비치는 모습을 본다면 이덕무의 '낮술'을 멋스럽게 읊어주고 싶습니다. 맑은 바람 부는 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날이면 '내 집'이라는 이덕무의 시를 조용히 읊조려 보고 싶습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는 우리 한시 중에 '5언절구'만을 모아 작가 연대순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시어 중 풀이가 필요한 표현은 따로 어휘를 풀어 설명"하고, "한시의 원문 아래에는 한글 독음을 달아"주어 한시의 음률도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한글 독음으로 읽는 것이지만 또 그 리듬이 좋아 시를 읽는 은근한 재미가 있습니다. 또 "평설을 작품의 행간 이해를 돕는 수준으로 그치고, 형식적 요소나 고사 설명은 할애"했으며, "제목은 작가 이름 아래 원제와 풀이 제목을 달고, 표제는 내용에 맞춰 따로 달았다"고 일러둡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는 작가의 짧은 평설이 또 하나의 읽는 재미를 주는 책입니다. 해설이 또 한 편의 시가 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듯 풀이가 재치 있고 아름다워서 시를 읽듯이 가만가만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시를 평역한 '정민'이라는 이름을 외워두었습니다. 이 분의 책을 더 찾아 읽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를 읽으며 처음 느낀 것은 시는 음악이기도 하면서 또 철학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마음을 돌보는 일이며, 덧없는 욕심들도 함께 씻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에 배여 있는 감정들, 다 부질없다는 허망함, 나 홀로 잊혀가는 외로움, 빛바랜 치마 같은 이별 뒤의 기억, 달빛과 마주 앉아 밤을 지새우는 아픈 사랑, 자꾸만 번져가는 그리움들이 시를 통해 마음에 흐르면서 나의 묵은 감정들도 씻겨가는 듯했습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적 정신적 자산입니다. 국적 불명의 K-팝 가사가 소음처럼 들리는 저에게는 우리에게 있는 이런 멋스럽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더 없이 소중하게 와닿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니 저부터 시를 노래하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음이 허허로운 날이나, 외로운 날, 또는 아름다운 자연에 취한 날이나 혼자 떠난 여행 길에서 우리 한시 한 수 읊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 많이 많이 읽혀지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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