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 저만치 혼자서 Alone Over There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85
김훈 지음, 크리스 최 옮김, 전승희.니키 밴 노이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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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면서도 탐미적인 역설의 문체"

 

 

글쓰기 훈련의 한 방법으로 필사가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경숙 작가도 그렇게 누군가의 책을 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랐던 작가가 '김훈'이었습니다. 만일 나도 필사에 도전한다면 '김훈' 작가의 글을 베껴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김훈 작가의 문체를 "건조하면서도 탐미적인 역설의 문체"(96)라고 표현합니다.

 

"김훈 소설이 건조한 기사문 투로 인간의 비루한 밥벌이와 생로병사를 산문적으로 담아낼 때, 시적 울림이 증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흔이 이 '시적 울림'을 심미적인 독서 체험으로 환산하면서 김훈 소설의 탐미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자리에서 김훈 소설의 거절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생성시키는 것은 인간 삶을 바라보는 특유의 위상학일지도 모른다"(98).

 

만일 어떤 작가의 글을 필사하며 그 작가의 문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제일 먼저 김훈 작가가 건조한 기사문 투의 글이지만 그 사이로 시적 울림이 증폭되는 문체를 흉내내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입니다.

 

"여러 세기들의 저녁에 라인 강은 노을 속을 흘러서 하늘에 잠겼는데, 퉁퉁 불은 사체들과 전쟁 쓰레기들이 뒤엉켜서 물과 하늘이 닿은 그 너머로 흘러갔고 덜 죽은 말들이 떠내려가면서 울었다"(10).

 

 

 

이 책은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한국 대표 소설을 엄선해 국내외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기획자는 "문학을 통해 아시아의 정체성과 가치를 실피는 데 주력해 온 아시아는 한국인의 삶을 넓고 깊고 이해하는 데 이 기획이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취지를 설명합니다. 우리 문학을 알리고자 번역에도 공을 들여 한영대조판으로 출간했는데, 우리 소설을 영문으로 읽어보는 재미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저만치 혼자서>는 호스피스 수녀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수녀들의 마지막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철새가 떠나고 돌아오는 충청남도 바닷가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수녀들의 삶과 죽음도 순환하는 자연의 한자락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지만, 저절로 '도라지 수녀원'이라고 이름이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매장을 할 때 수녀들은 묘지에서 도라지꽃을 보았다. … 도라지는 삶에서 죽음으로 번지면서 건너가는 이 호스피스 수녀원의 이름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어졌어요. 그래서 '도라지'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잠이나 숨 같은 것입니다, 라고 오수산나 수녀는 설명했다. 보라색 꽃도 정처 없는 색감으로 흔들리면서 보라 저 건너편의 검은색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들 보이시지요? 그래서 보래색 꽃이나 하얀 꽃이나 차이가 없는 것이겠지요, 라고 오수산나 수녀는 말했다"(22).

 

거룩과 순결의 이름으로 한편생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수녀들이지만, 낡고 병든 몸은 가끔씩 대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대소변을 지린 속옷을 세탁부에게 주지 못하고, 팔목에 힘이 없어서 짜지도 못한 빨래를 손수 빨아 널지만, 빨랫줄에 널린 속옷에는 덜 빠진 오물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젊었을 때 나환자촌에서 씻겨주던 환자들의 몸처럼 느껴지는 시간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시간들,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수녀들의 날들이 길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시간들, 삶에서 죽음으로 번지듯이 건너가는 그 시간들. 홀로 그 마지막 시간을 다 건넜을 때, 늙고 병든 몸은 복도 바닥에 쓰러진 사체로 발견되고, 침대에는 오물이 묻어 있고, 뺄랫줄에는 속옷이 널린 채였습니다. 마지막 숨결이 빠져나간, 작고 가볍고 꼬부라져서 늙은 태아 같은 몸은 도라지동산으로 옮겨져 흙으로 돌아갑니다.

 

"김훈의 <저만치 혼자서>는 생로병사의 시간을 건너가는 개개 인간의 운명을 저만치 핀 도라지꽃의 색, 조개무덤 너머의 시공을 건너온 가창오리뗴의 울음, 빨랫줄에 널린 속옷의 얼굴 옆에 놓아두면서 그렇게, 냉혹하고 무심한 사실의 자연 앞에서 소설의 언어를 멈춘다"(104).

 

오늘 제 일정표에 의하면, 이 글을 어서 쓰고 장례식장에 다녀와야 합니다. 동료의 남편분이 간경화로 소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저항조차 할 수 없게 하니까요. 오늘 장례식장에 가면 저도 김훈 작가처럼 덤덤할 수 있을까요. 김훈 작가는 애써 울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장례식장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저만치 혼자서 오래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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